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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의 신들은 천연의 대사원이다. - 러스킨

 

 

여행은 일상의 허물 벗기다.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여행에서 돌아온 마음은 확실히 때묻은 허물을 벗은 듯 깨끗하다. 그러나 어떤 여행이든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여행길은 즐겁지 않다. 그곳이 세계 제일의 명소라도 마음이 머물지 않는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 명산의 명당자리는 다 절이라는 말처럼 부산의 명산은 금정산이고 이 금정산에 범어사가 있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에선 내가 먼저 마음 속에 길을 만든다. 길이 험해도 마음이 가볍게 올라가게 한다. 내게 범어사 가는 길은 가까운 거리지만, 어쩜 추억에로의 먼 여행인지도 모른다.

 

범어사의 금정산은 사실 하루만에 다 살펴 볼 수 없는 크고 넓은 부처의 품과 같다. 금정산에는 오를수록 더 자주 오르게 하는 미혹의 부름이 있다. 이  미혹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러나 금정산은 추억의 산이며 내게 용기를 주는 산이며 기도의 산이다. 금정산과 범어사에는 나만의 작은 생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금정산은 입체적인 한 채의 자연 사원이다. 앞면과 뒷면은 물론 윗면 아랫면이 있는 자연의 풍경. 나는 그 금정산의 범어사 앞으로 산을 오르지 않는다. 금정산의 뒷면, 범어사의 북쪽에는 화강암 절벽 위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소재지가 양산 가산리이지만, 범어사 북쪽 금정산 정상 부분의 화강암에 그려진 절벽의 마애불이다. 높이 12m의 거대한 불상이다. 가는 선으로 새긴 불상은 천년의 비바람으로 희미하다.
 
이 높은 단애에 그 누가 무엇으로 공드려 새긴 것인지 기록은 없다. 원효 대사는 사성암에 손톱으로 새긴 마애불을 남겼듯이, 어쩜 그 누가 손톱으로 새긴듯 보여지는, 가는 선으로 상투를 튼 모양의 머리묶음이 둥글게 솟아 있고,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지게 부처의 형상을 그려 놓고 있다.
 
얼굴은 네모고, 가는 눈과 큰 코 등이 토속적인 부처의 형상이다.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채 입고 있다. 가슴 아래부분은 심하게 옷깃이 낡은 듯, 살펴보기 어렵다. 학계에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측한다.

 
 
금정산의 봄은 바다 건너서 오기에 빨리 도착하고, 금정산의 가을은 휴전선을 넘어서 오기에, 아직 가을행군이 다 당도하지 않은 듯… 그러나 단군의 하얀 수염처럼 날리는 억새밭을 헤치고 범어사로 넘어오는 길은 온통 억새밭과 하얀 며느리 밥풀꽃과 망초꽃이 장관이다.
 
억새밭 사이로 숨어 엎드린 작은 길이 있어 길은 다른 길로 접어들다가 되돌아 나오기도 한다. 키보다 높은 지난 가을의 억새와 그 지난해의 억새들의 대를 이어가는 억새군단들은 바람에 칼가는 소리를 내게 들려준다.
 
사진이 귀한 시절에는 이 길목에도 기념사진 찍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항상 이곳에 오면 사진기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사진사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왠지 쓸쓸하다. 마치 무얼 잃어버린 것처럼… 아니 가만히 생각하니 이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서 꼭 다음 가을에 찾자던 그 약속을 못 지키고 멀리 호주로 떠나버린 친구 생각에 센티해진다.
 
 
범어사는 다른 절에 비해 볼거리가 많지만, 이 일주문만은 꼭 보고 가야 범어사를 봤다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부산시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이 일주문은 특이하게 구조 되어 있다. 돌과 나무가 만나 기둥을 이루고 있다.
 
나무와 돌이 만나는 순간 돌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돌이 된, 일주문은 속세와 불계를 구분짓는 경계 구실을 한다. 이 일주문은 모든 법이 하나로 통한다는 법리를 담고 있다. 앞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높은 돌 위에 짧은 기둥을 세운 것이 특이하며 모든 나무재료들은 단청을 하였다. 
 
'범어사'라는 절 이름의 유래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금정산은 동래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금정산 산마루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그 둘레는 10여 척이며 깊이는 7촌쯤 된다.
 
물이 항상 가득 차 있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그 빛은 황금색이다.세상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 마리의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梵天)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샘(金井)'이라는 산 이름과 '하늘 나라의 고기(梵魚)'라고 하는 절 이름을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에 기거했던 고승의 일화가 많지만, 내게는 작가 한승원 선생의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태어난 산실로 기억된다. 한승원 선생은 범어사 아래 허름한 여인숙에 묵으면서, 날마다 범어사에 올라 참배하며, 큰 스님들을 만나 이 작품을 만드는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
 
돌담 곁에 하늘 하늘 피어 있는 미소가 염화미소처럼 번져가는 범어사의 경내는 초파일이 아닌데도 초파일처럼 연등이 환하고, 범어사 경내의 약수터에서 흐르는 감로수는 정말 꿀맛처럼 달다.
 
하늘은 거울처럼 맑고 대웅전 처마 끝에 매달린 목어는 구름을 뜯는 범어사, 봄의 범어사가 다르고 여름 범어사가 다르고 가을 범어사가 다르다. 그 중 가장 내 마음에 드는 범어사는 가을 범어사…. 낙엽이 한 잎 두 잎 은화지처럼 떨어지는 좁다란 오솔길 뒤로 돌아가면 청대숲이 있다. 그 대숲의 바람소리는 방장 스님의 죽비소리처럼 일품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
늑대 한 마리 감추고 사는갑다
중략
달빛 받으면 사랑이 되고
별빛 밟으면 시가 되는
그런 사랑 노래 들을 수 있는 귀 하나 달고
마애불들 오른 손 위로 보름달은 떠올라
그 왼 손 위로 산그림자 남기며 사라질 때까지
우우 울부짖으며 되살아나는
마음 속의 늑대 한 마리
새벽이 올때까지 사유의 깊은 울음 그치지 않는다.
<마음의 늑대>중-'정일근'
 
  
길을 가다보면 우연히 아는 사람을 자주 마주치는 날이 있고, 범어사의 암자에 스님이 된 아는 시인을 공교롭게 돌계단에서 만났다. 이 분의 "밤 세시의 범어사 목탁 소리와 경 읽는 소리를 들어보고 가라.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두고 두고 후회하리라"는 화두와 같은 말씀에,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은 내게 지루했지만, 막 3시가 되기도 전에 스님들이 부산히 절마당을 오가면서 새벽예불 지내는 모습을 보고 직접 예불에 참배하면서, 아, 정말 내가 모르는 시간이 이 세상에  나와 함께 공존하고 있구나, 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까. 
 
사람은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자기가 가진 시간이 이 세상의 시간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아가지만, 새벽 여명이 움트는 3시의 예불시간은 내가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즉시색  색즉시공 (色卽是空空卽是色)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다.
 
 
범어사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만큼, 내가 이야기하는 범어사는 어디까지나 내 시간 속에 내재한 범어사의 한면의 풍경에 불과하다. 마치 정면으로 찍은 퇴색한 누런 흑백 사진 속의 그리 크지 않은 절 한 채처럼. 
 
그래서인지 올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구석구석 살펴보지 못하고 지나치다가 어느날 나한전의 나무 기둥 사이에 벌을 받고 있는 동자승이 처마를 힘껏 들고 있는 상을 발견했듯이, 전에 지나쳐 보았던  천리향 나무와 소나무의 기묘한 모습과 현호색의 석탑이 전과 달리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범어사 대웅전 앞에 있는 이 석탑은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록에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에 세운 탑. 그러나 일제시대에 크게 수리를 할 때 기단 아래부분에 돌 하나를 첨가하는 바람에 기단부가 너무 크고 높아 보인다. 
 
탑을 보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이 절로 모아지고, 윤회하듯 탑돌이를 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태그:#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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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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