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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일기예보는 점쟁이 말이 가진 속성을 그대로 빼닮았다.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렇게 무책임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침의 일기예보는 오늘 강원 산간지방에 비가 내릴 것이라고 했다. 요즘 TV는 교활해졌다. 자신의 무책임에대한 방어기제로 확률이라는 걸 도입한 것이다. 비 올 확률이 40%란다. 비가 온다는 쪽에 걸어야 할까. 오지 않을 거라는 쪽에 걸어야 할까.
 
그러나 비가 온다는 쪽에 걸든 아닌 쪽에 걸든 어차피 강원도 오대산엘 가겠다는 내 산행 계획에는 하등의 영향도 끼치지 못했을 것이었다. 경부고속도로변엔 아침 안개가 잔뜩 끼었다. 중부고속도로 바꿔 타자 안개조차 끼지 않은 아주 화창한 날씨다. 그러나 진부 근방에 이르자 상황은 크게 변하고 만다. 먹구름이 잔뜩 하늘을 덮고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퍼부을 듯한 분위기다.
 
오대산으로 들어서자, 벌써 비가 내리고 있다. 할 수 없지. 상원사  들머리, 관대걸이가 있는 곳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관대걸이란 조선 세조가 목욕할 때 옷을 걸었다는 돌로 된 옷걸이를 말한다. 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길바닥엔 산행객으로 넘쳐난다. 일기예보를 들었는지 모두 등산복 위에다 얇은 비옷을 걸치고 있다.
 
 
상원사로 오르는 돌 계단에는 '가을 문수 기도 7일'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낮 12시, 상원사를 나와 본격적인 산행을 서두른다. 우선 목표는 중대 사자암이다. 산악회에서 온 단체 산행객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벌써 비로봉까지 갔다 오는가 보다.
 
우리나라 산 중에서 대표적인 화산(火山)을 꼽는다면 금강산과 설악산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눈요기를 위해서라면 바위가 삐죽삐죽 솟은 화산 이상 없다. 반면에, 대표적인 토산(土山)을 꼽으라면 지리산과 이 오대산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다는 불교 성지가 아니던가.
 
해발 1500m가 넘는 높은 산이지만, 오대산이 사랑받는 이유는 쉽게 가까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라보는 눈 맛보다는 자신이 직접 오를 수 있는 산을 더 사랑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적멸보궁'
 
 
 
중대 사자암을 지나 적멸보궁을 향해 간다. 길 옆으로는 제법 보기 좋게 단풍이 물든 나무들이 군데군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쩌면 단풍이란 나뭇잎이 곧 퇴장하게 될 자신의 쓸쓸함을 감추려고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물들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 시인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시 '낙화')라고 썼지만 정말 아름다운 것은 떨어지는 꽃이 아니라 낙엽이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단풍이다. 마침내 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무들은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몸을 가진 '적멸보궁'이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잎을 모조리 떨어낸 나무들 곁을 지날 때 자신도 모르게 숙연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적멸보궁 앞에는 비로봉 1.5km, 상원사 1.5km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적멸보궁은 그렇게 비로봉과 상원사의 딱 중간 지점, 해발 1190m 높이에 있다. 적멸보궁엔 중대 사자암 비로전 목탱화 개금불사 동참을 권유하는 현수막과 등달기로 요란하다. 사라진 '적멸'을 아쉬워하며 다시 비로봉을 향하여 발길을 돌린다.
 
 
 
풍경을 멀리 조망할 수 없어 좀 답답한 산행이다. 그 점만 빼고 나면 비 내리는 날의 산행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간간이 뺨에 와 닿는 빗방울의 차가움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고, 나뭇잎이나 꽃의 아름다움이 햇볕 쨍쨍 내리쬐는 날보다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졸참나무와 갈참나무, 전나무가 교대로 나타나는 길을 지난다. 이곳의 졸참나무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았던 졸참나무보다 훨씬 등걸이 굵다.

비로봉까지의 거리를 약 800여m가량이나 남겨두었을까. 그때부터 목제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왜  맨땅을 오르기보다 계단 오르기가 훨씬 더 힘들고 숨 가쁠까. 앞서 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내 뒤로 처진다.
 
 
드디어 1563m 비로봉 정상에 올라선다. 비구름 때문에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두로봉(1421.9m), 동대산(1433.5m)등이 4개의 봉우리가 모두 제 모습을 감추고 있다.
 
정상 부근 주목 군락지에는 밧줄을 쳐 가로막아 놓았다. 비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주목의 고사목이 보인다. 주목은 살아 있는 나무도 멋있지만, 죽어버린 고사목이 훨씬 멋있다. 마치 정골 사리만으로 산정에 버티고 선 부처 같다. 
 
제아무리 비 오는 날의 산행이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 한들, 산꼭대기까지 올라와서 봉우리 하나 바라볼 수 없다는 건 비극이다. 옆에 선 사람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는지 투덜거린다. 누군가 "이건 우리에게  한 번 더 다녀가라는 오대산의 계시"라고 해서 모두 껄껄 웃었다. 역시 꿈은 그 자체보다 해석이 좋아야 한다.
 
아름답게 불타는 한 그루 나무가 되려면
 
 
"이제 하산해도 좋다"라는 오대산 산신령의 재가를 받지 않았지만, 이제 하산할 때가 된 것 같다. 서서히 산을 내려간다. 비가 내리고 있어 계단이 몹시 미끄럽다. 아까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다. 원래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비로봉 →상왕봉→  북대사→ 관대거리로 해서 하산할 예정이었다.
 
적멸보궁께에서 참배를 마치고 내려오는 젊은 스님과 만난다. "어느 절에 계시는 스님이냐?"라고 물었더니 통도사에 있다고 대답한다. 다시 입산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고 했더니 2년밖에 안 됐다고 한다. 아직 승가대학에 진학하지도 않은 이 스님은 해제 철을 맞아 이곳저곳을 만행 중인 모양이다.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을 거서 이곳에 왔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오다가 중대 사자암 앞에서 합장으로 작별을 고한다.
상원사까지 얼마 남지 않은 길 위에는 떨어진 단풍들이 널려 있다. 창덕궁 옥류천 지역이 생각난다. 지금쯤 단풍이 곱게 물들었을 것이다. 옥류천 지역의 단풍은 우리나라 어느 산의 단풍보다 아름답다. 게다가 길은 또 얼마나 고즈넉한가. 2004년 개방 된 후, 해마다 다녀왔는데 이상하게 갈 때마다 비가 내렸다. 올해도 갈 수 있을까.
 
관대걸이에서 차를 타고 월정사로 간다.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는 무려 9km나 되는 거리다. 월정사에서부터 걸어서 비로봉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하루 산행으로선 무척 빠듯한 거리다.
 
산기슭보다 오히려 월정사 쪽 계곡의 단풍이 훨씬 고운 것 같다. 감탄을 거듭하다가 도종환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도종환 시 '단풍 드는 날' 일부)고 시인은 말한다. 이 가을엔 무엇을 버려야 할까. 그리고 아름답게 불타는 한 그루 나무가 될까. 단풍의 아름다움에 취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 교훈을 생각하며 월정사 경내로 들어간다.
 
 
 

덧붙이는 글 | 17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오대산 , #상원사 , #적멸보궁, #가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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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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