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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많이 들지 않았네."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대가 컸었다. 곱게 물들어 있는 적상산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곳은 전라북도에서 제일 먼저 가을이 깊어지는 곳이다. 해매다 물들어진 정경은 사랑에 바진 처녀들의 설레는 마음을 닮아 있었다. 빨갛게 물든 산을 바라보면서 잃어버린 불타는 열정을 그리워하곤 하였었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출발 전부터 아직 물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던 집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의기양양 하는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이제 물들기 시작하는 정취에 취해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즐길 줄 아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조급증으로 서두르기만 하고 있었던 내 모습하고는 대조적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바빴을까? 집사람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나를 반추해본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생각하고 행동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시나브로 바뀌어져버린 내 성급한 마음을 이제는 내 의지로는 통제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몸에 배어버려 반사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야 ! 곱다."


집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온 감탄사다. 시선을 따라가니, 바위를 가을 색으로 물들이고 있는 담장이 넝쿨이었다. 시선을 위로 향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커다란 바위였다. 그 바위에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곱게 물들인 잎으로 바위 위에 예쁜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상산.
붉은 적, 치마상이다. 붉은 치마 산이란 뜻이다. 아직 완전하게 단풍이 든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서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빨갛게 물들어버린 가을산은 그 것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초록과 어우러져 있는 가을 산도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급한 내 마음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빨리빨리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짝이는 구절초 향에 취하다보니, 어느 사이에 안국사에 도착하였다. 양수 발전소 상위 댐은 물로 그득 차 있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같은가 보다. 적상산의 아름다운 가을 풍광을 즐기기 위하여 찾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임진왜란의 난리 속에서 지켜낸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외진 산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안국사 영산회상 괘불탱(보물 제 1267호, 전북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을 모시고 있는 극락전 앞에서 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는 기도를 올렸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려 하여도 욕심으로 인해 놓아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어제에 얽매여 오늘을 충실하지 못하고 있는 잘못을 깊이 반성하면서 기원하였다.

 

미래는 어제와 오늘의 결과라고 하였던가?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으로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려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래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불확실하지도 않고 좋은 일이 생길 것이란 기대에 부응하지도 않는다.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누구의 힘으로? 바로 내 자신의 힘으로.

 

어제 쌓은 것들이 모두가 종자가 되어 내일이 되는 것이다. 오늘을 실하게 채우면 내일도 실해질 것이고 오늘을 허성하게 보내게 되면 내일 또한 허성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늘은 이렇게 힘들어도 내일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모두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일 뿐인데.

 

안국사 성보박물관 밖에 부처님들이 앉아 계신다. 찾아오는 이의 가슴에 삶이 지혜를 불어넣어주고 있었다. 미륵 반가 사유상의 온화한 미소가 그렇게 인상적일 수가 없다. 곱게 물들여져지고 있는 안국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은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성급한 성정을 버리고 여유를 가지고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곱게 물들고 있는 적상산의 우뚝한 풍광이 가슴에 각인되었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은 전북 무주 안국사에서


태그:#적상산, #안국사,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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