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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10.9)가 넘어가니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점점 냉랭해옵니다. 이슬 이 얼마나 차가와졌을까 봉당을 나서니 풀벌레 소리가 더욱 가깝고 별빛이 한층 초롱초롱합니다. 벌써 산봉우리엔 가을 기운이 완연합니다.

 

며칠 새 숲 속엔 눈에 띄게 물기가 빠지고 어떤 나무들은 벌써 시름시름 잎 새 털기를 시작합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10.24)이면 앓던 잎들은 우수수 옷을 벗어버릴 것입니다.

 

그동안 꽃을 피우고 지나간 꽃자리마다 열매가 가득합니다. 농사일을 하다 힘들다 싶으면 열매들을 구경합니다. 오늘은 몇 개나 털어버리고 옷을 벗었나 하고 몸을 굽히고 허리를 낮춰 들여다봅니다. 어떤 열매들은 하도 작아 무릎을 꿇고 보기도 합니다.

 

철이 바뀌고 있습니다. 농촌에서 허구한 날 비슷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에서 탈피하기 위해 어느 스님들처럼, 나도 이 가을엔 버리는 연습을 해볼까합니다. 그동안 시골에 들어와 쌓인 먼지들을 털어버리고 삶의 찌꺼기들을 태우고 묻으려 합니다. 

 

돌아보니 참,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수백 권의 책과 잡지, 신문, 텔레비전, 오디오세트, 카메라, 컴퓨터, 시계, 화분 등등.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가까이 하자니 꽃들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버리자, 버릴 때는 미련 없이 버리라' 했는데, 애착은 무엇이고 집착은 뭐란 말인가. 다짐은 그렇게 하지만 또 머뭇거립니다. 그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 않던가.'

 

자신에게 또 물어봅니다. 현재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없어도 좋을 것은 무엇인가. 버리고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알맹일까, 영혼일까, 꽃과 나무들처럼 훨훨 벗어버리자.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버리자 다짐을 합니다.

 

마침, 고물장수가 왔나 봅니다. "고물 삽니다, 고물 파세요, 헌 시계나 라디오, 못 쓰게 된 컴퓨터, 텔레비전… 고물 삽니다. 고물 파세요" 한다. 우선 시계, 텔레비전을 고물차에 실려 줍니다. 빨래비누 두 장을 값으로 쳐줍니다. 행동이 수상타 여긴 옆 지기께서 "어, 저 양반, 가을바람에 실성을 했나"하고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설명이 길면 귀찮을 것 같아 고물장수에게 어서 돌아가라고 등을 밀어냅니다.

 

 

"고물 파세요, 헌 고물 삽니다."

 

쩌렁쩌렁한 마이크 소리를 들으며 나만의 웃음을 띠워봅니다. 홀가분한 기운이 야릇하게 마음을 쓸어내립니다. 앞으로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를 없애고 돋보기만 떼어버리면 내 글쓰기 작업도 끝이 납니다. 글쓰기를 그만둘 수 있을까. 좀 더 시간을 두고 곱씹어봐야 할 듯싶습니다. 미련과 집착, 언제쯤 묻어버릴 것인가.

 

 

시작했으니 버리는 계획을 또 세워봅니다. 책들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시골 초등학교에, 잡지나 신문 나부랭이들은 불쏘시개로, 오디오세트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첫 번째 젊은이에게, 난분이나 화분은 저 아래 노인 요양원에 기증을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서리가 내리고 나무들이 걸쳤던 옷을 다 벗어버리면 작은 들꽃들의 열매처럼 알갱이를 쏟아버리고 '텅 빈 가슴'과 '맑은 영혼'을 맛보는 연습을 해 보렵니다. 들머리를 빠져 나가는 고물장수의 목소리가 가물가물 멀어갑니다.

 

"헌, 고물 파세요, 고물 삽니다."

 

가을 햇살 한 줌이 따사로운 오후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에 오시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만나 행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고물, #범부채 열매, #방울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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