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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가 만년을 보내던 곳이며 파주 임진강변에 있다.
▲ 반구정 황희가 만년을 보내던 곳이며 파주 임진강변에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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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로를 집으로 돌려보낸 태종은 찬성(贊成) 이원을 불렀다.

“내가 변계량의 마음가짐이 바르다고 생각하여 세자빈사(世子賓師)의 자리에 거(居)하게 하였다. 아비가 자식을 가르칠 수 없으니 스승이 어찌 가르치겠느냐마는 세자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책임이 없을 수 없다.”

세자 스승 변계량에게 불똥이 튀었다. 태종은 변계량을 들라 일렀다.

“세자를 가르치는데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경(卿)으로 하여금 세자빈객(世子賓客)으로 삼아 선(善)하게 인도하도록 하였다. 이제 이처럼 불선(不善)하니 이것이 비록 경이 알지 못하는 바이라 하나 빈사(賓師)가 된 자로서 부끄럽지 아니한가?”

세자사 변계량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변계량을 내보낸 태종은 찬성(贊成) 이원을 다시 불렀다.

응견(鷹犬)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황희에게 불똥이 튀다

“옛날 이무를 결죄(決罪)할 때 구종수가 의금부도사가 되어 공사(公事)를 누설하고 그 후, 궁의 담장을 뛰어넘어 세자전에 출입하였다. 일이 발각되자 내가 이를 싫어하여 경과 황희에게 물으니 경은 그 죄를 묻자고 청하였으나 황희는 말하기를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고 다시 죄를 청하지 아니하였다. 경은 그 일을 잊었는가?”

“신(臣)은 잊지 않았습니다.”

이원은 긴장했다. 임금의 노기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다. 우선 몸을 낮춰야 한다.

“내가 세자에게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종사만세를 위한 계책이다. 세자의 동모제(同母弟)가 세 사람이었는데 이제 한 아들은 죽었다. 장자와 장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은 고금의 상전(常典)이니 다른 마음이 없으며 여기에 의심이 있다면 천감(天鑑)에 합(合)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이 말을 의정부에 고(告)하라.”

“전하의 하문(下問)에 황희가 대답할 때,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고 하였으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그 까닭을 국문하소서.”

밖으로 나온 이원이 좌의정 박은과 함께 다시 편전으로 들어가 청했다.

횡희의 자리다.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품계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 품계석 횡희의 자리다.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품계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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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승선(承宣) 출신인 자를 우대하기를 공신 대접하는 것과 같이 하기 때문에 황희로 하여금 지위가 2품에 이르게 하여 후하게 대접하는 은의(恩誼)를 온 나라가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이 말은 심히 간사하고 왜곡되었으므로 평안도 관찰사로 내쳤다가 지금 판한성부사로 삼아 좌천하였는데 어찌 다시 그 죄를 추문(推問)하겠느냐?” - <태종실록>

승선은 지신사를 이르는 말이고 지신사는 오늘날 비서실장이다. 황희는 태종 등극 초, 박석명에 이어 2대 지신사로 안등과 교체될 때까지 4년간을 국왕의 지근거리에서 임금을 보필했다.

“황희가 주상의 은혜를 받고도 올바르게 대답하지 않고, 그 간사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주상이 자비하여 죄를 주지 않는다면 그 밖의 간신을 어찌 징계하겠습니까?”

박은이 다시 청했다.

“마땅히 불러 물어보겠다. 그러나 항쇄(項鏁) 따위의 일은 없애라.”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상녕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황희를 잡아 오도록 했다. 임금의 명에 따라 목에 칼을 씌우는 항쇄는 없었다. 훗날 세종 조에서 명 제상으로 이름을 남긴 황희도 비켜갈 수 없었다.

“여색(女色)을 전내(殿內)에 출입시킨 죄를 물으소서”

개성을 떠난 김한로가 한양에서 죄를 대기하고 있는 동안 형조와 대간(臺諫)에서 상소가 올라왔다. 병조판서 김한로의 죄를 청하는 것이었다.

“우리 세자는 천성이 총명하고 기개와 도량이 영위(英偉)한데 지난번 간사한 무리의 유혹으로 인하여 전하에게 책망을 받고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종묘에 맹세하여 고(告)하고 전하에게 상서하였으니 그 천선(遷善)하고 스스로 새사람이 되려는 마음이 가히 지극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이것은 종사(宗社) 만세의 복이요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기쁨입니다.

김한로가 적빈(嫡嬪)의 아비로서 전하의 뜻을 몸 받지 않고 여색(女色)을 전내(殿內)에 출입시키고 아뢰지 않았으니 불충입니다. 또 전하께서 친히 물으시는 대도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으니 그 행동이 주상에 대하여 충성을 다하는 마음이 어디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불충한 마음을 품은 것이 명백하니 유사(攸司)에 내려 국문(鞫問)하고 그 죄를 올바르게 바로잡으소서.”

“이미 물어서 모두 알았으니 비록 유사(攸司)에 내려서 묻더라도 더 이상 캐낼 정상이 없을 것이다.”

상소를 물리치자 형조와 대간에서 또다시 김한로의 죄를 청하는 주청이 올라왔다.

“김한로가 주상의 뜻을 몸 받지 아니하고 여색(女色)을 동궁(東宮)에 들이었고 또 하문(下問)할 때에 바른 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

“내가 장차 그 죄를 헤아려 시행하겠으니 다시 청하지 말고 김경재를 잡아들이도록 하라.”

변죽을 울리는 자는 놔두고 바쁠수록 돌아가라

김경재는 김한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어 쭉쭉 뻗어나가는 젊은이다. 사헌부 감찰(監察)로 재직 중에 있는 관리다. 김한로가 딱 부러지게 자복하지 않자 그의 아들 김경재에게서 증언을 확보하려는 우회 전략이다. 역시 태종다운 발상이다.

“너의 아비 김한로를 임용한 지가 오래 되고 또 세자의 처부(妻父)이기 때문에 내가 중한 형벌을 쓰지 않으려고 한다. 어리에 대하여 아는 대로 계문(啓聞)하라. 너의 아비가 이미 아뢰었으니 숨기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하라.”

뜬금없이 붙잡혀온 김경재는 임금의 호통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내가 연화동댁(蓮花洞宅)으로 나갔을 때 판서(判書)가 나와 말하기를 ‘새 여자이면 불가(不可)하나 어리는 새 여자가 아니니 전(殿)에 들어가도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전(殿)에 들어가는 일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출입할 때 도모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아버지가 말하기를 ‘지난해 생일에 전(殿)에 들어갔다가 종전에 못 보던 한 여자가 장지(障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시종 가이(加伊)에게 물으니 가이가 답하기를 ’이 여자 그 여자입니다‘고 한 뒤에야 나도 또한 이를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증언이다. 김한로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것은 어리가 세자전에 들어간 것을 출입 당시부터 알았느냐? 사건이 터진 뒤에야 알았느냐? 가 관건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들의 입을 통하여 나온 것이다.


태그:#감한로, #어리, #세자, #응견, #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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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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