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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햇볕, 공기, 그도 아니면 물? 물론 다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밥을 빼놓을 수 없다. 몇 년 전 <한겨레> 신문에서 '거리의 기자'로 있던 시절, 소설가 김훈이 쓴 칼럼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 <한겨레> 신문, 김훈의 '거리의 칼럼'(2002.03.21치)

내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칼럼의 몇 구절을 갈무리해 두고 가끔씩 들여다 보는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김훈 글에 대한 마니아냐고? 천만에. 난 그가 구사하는 현란한 수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문장가'라는 이가 밥을 너무 피상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밥이 가진 의미를 두고 두고 곱씹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 문장 속에서 졸가리만 추려낸다면 아마도 그것은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라는 한 구절일 것이다. 노동자에겐 밥 그 자체가 치열한 이념이다. 정직이 전제된 노동이라는 이념을 배제한 채 밥을 '배고픔'이라는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는 물질로만 파악하는 게 온당한 일일까.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솔직한 것은 없다

책 표지.
 책 표지.
ⓒ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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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식이야기나 밥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책을 좋아한다. 그런 글을 읽노라면 맛과 더불어 음식에 얽힌 추억도 함께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고도의 이념을 찾아내는 숨은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밥이나 음식에 관한 책 목록 중에는 김학민이 쓴 <맛에 끌리고 사람에 취하다>나 황석영이 쓴 <황석영의 맛과 추억> 등이 있다.                                   

며칠 전 인터넷으로 책 몇 권을 주문하면서 오랫동안 구입 리스트에만 올려둔 채 사지 않고 있던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이란 책을 주문했다. 이오덕 선생님이나 소설가 박완서 등 13인이 쓴 음식 이야기가 실린 책이다.

책을 열자 가장 먼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솔직한 것은 없다"라는 쇼송이라는 프랑스의 작곡가가 쓴 아포리즘이다. 본격적인 글 읽기는 소설가 박완서의 '비 오는 날의 메밀칼싹두기'라는 음식에 얽힌 추억에 대한 글부터다. 칼싹두기는 칼국수보다는 면발이 넓고 두툼하고 짧은, 수제비에 가까운 음식이다.

땀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나면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뜻해지면서 이렇게 화목한 집안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 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18쪽

이렇게 서두를 끄집어낸 선생의 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생일날의 수수팥떡과 참게장 호박잎쌈으로 이어진다. 이에 뒤질세라 소설가 신경숙이 이야기의 바통을 이어간다. 고구마꽝에 저장한 고구마 이야기, 보리밥을 깡된장에 비벼먹던 이야기, 겨울날에 팥죽 속의 새알심을 깨물어 먹는 맛에 대한 이야기다.

"내 생각에 맛이란 가장 원초적인 맛이 최고인 것 같다"라고 말한다. 텃밭에서 푸성귀를 뜯어다 바로 싸먹거나 생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원초적인 맛을 왜 모르겠는가.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성석제는 원조 묵집에서 묵밥을 먹으며 식도를 깨달았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맛에 관한 한 신경숙보다 몇 수 아래인 게 분명하다.

내가 가장 감명깊게 읽은 것은 공선옥이 쓴 '밥으로 가는 먼길'이라는 글이다. 논이 없어 개간한 밭에다 산두쌀을 심을 수 밖에 없었으니 그의 가난을 짐작할 만하다. 그의 글 속에선 산두쌀을 훑던 날의 풍경이 사실적으로 아프게 묘사된다.

산두쌀 훑던 날 , 내가 먹은 것은 소금물에 담가 떫은 맛 우려낸 감 몇 알. 그래도 쌀이 생긴다는 생각에 배고프지 않았다. 쌀독아지에 쌀 그득할 것만 생각해도 배가 불렀다.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91쪽

고인이 되신 이오덕 선생은 1943년 대동아전쟁 당시 군청 사무원으로 계시면서 출장나갔다가 허기져 길에 쓰러질 지경이 되었을 때 얻어먹은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선생이 쓰신 글의 제목이 그대로 책 제목이 되었다.

이밖에도 책 속에는 최일남의 '전주 해장국과 비빔밥', 만화가 홍승우의 '음식에 관한 열 가지 공상', 화가 정은미의 '초콜릿 모녀', 시사만화가 고경일의 나베(냄비)요리 이야기, 건축가 김진애의 '미국 푸드' 이야기, MBC 프로듀서였던 주철환의 바나나 이야기, 시인 김갑수의 에스프레소 이야기, 장용규 교수의 옥수수 가루로 쑨 된 죽인 '푸투' 이야기 등이 수록돼 있다.

배는 고팠지만 가난하지 않았던 시절

13인이 늘어놓는 음식 이야기를 읽는 시간은 매우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니, 읽었다기보다는 빙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는 그들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듣고 있던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들이 음식에 얽힌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마다 나도 함께 그 음식을 먹는 듯 배가 불렀고, 그 이야기에 몰입되어 볼이 바알갛게 상기되었다.

나 어렸을 적엔 분명히 궁핍의 시대였다. 내가 먹은 밥의 종류만 보더라도 미루어 알 수 있을 정도다. 꽁보리밥은 그래도 먹기 괜찮은 편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한 밥은 '무밥'이었다. 쌀이라곤 몇 톨 들어가지 않고 온통 채 썬 무만 담겨 있는 밥. 밥에 든 물컹물컹하고 심심한 무맛이 얼마나 싫었던가.

그렇더라도 궁핍은 불행이라는 말과 결코 동의어가 아니었다. 그 시절, 내가 맛봤던 음식  속엔 언제나 어머니나 할머니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소설가 공선옥이 회상하는 어린 시절 역시 내가 품은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밥은 늘 공포였다. 아니다. 밥이 공포가 아니라 밥때가 공포였다. 가난이 공포가 아니라 배고픔이 공포였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는 그 시절이 하나도 불행하지 않았다고 느낀 것은 왜일까. 나는 지금도 말할 수 있다. 그때 나, 배는 고팠지만 가난하지 않았다고. 배는 고프지 않지만 가난한 지금에 비하면.
- 공선옥의 '밥으로 가는 먼길' 90쪽

인류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이자 물리지 않는 사랑이 밥. 오늘같이 비가 내리는 날엔 어김없이 어머니가 끓여주던 칼국수나 수제비 한 그릇이 절로 생각난다. 살아 계신다면 직접 찾아가서 "엄마, 칼국수 한 그릇 끓여달라"고 어리광을 피워도 좋으리라.

그러나 왜 맛이 그때와 다르냐고 투덜대지는 말기 바란다. 단언하건대 그건 어머니의 손맛이 변한 것이 아니다. 음식을 최고의 것으로 만드는 두 가지 요소, 즉 궁핍과 모자람이 사라진 시대이니 그 누구에게 맛의 책임을 전가하겠는가. 어머니가 벌써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이 책 한 권을 읽으면서 옛 추억을 더듬어도 좋겠다.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수증기처럼 스멀스멀 올라오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 박완서외 12인/ 한길사/ 10,000원



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박완서 외 12명 지음, 한길사(2004)


태그:#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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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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