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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이 개설된 뮐러 그룹 홈페이지
ⓒ 뮐러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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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어느 대학에는 '미래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Physics for future Presidents)'이라는 과목이 개설돼 있다(http://muller.lbl.gov/teaching/Physics10/PffP.html). 과연 어떤 내용들을 가르칠까 하고 봤더니 제1강이 에너지와 폭발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세계 지배의 근본 동력으로 삼고 있는 만큼 매우 적절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가 철벽처럼 구분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과학교육을 평생 받기 어려운 우리 상황에서 대한민국 대통령과 과학의 거리는 청와대와 홍릉(내 연구실이 있는 곳)보다도 더 멀어 보인다.

정치인이나 대통령이 물리학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과 대통령이 '과학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사뭇 심각해질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눈만 뜨면 정치인들과 대통령의 어이없는 주장들을 묵묵히 들어왔다.

주체적인 근대화와 계몽에 실패한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이란 일상생활과는 거의 관계없는 그 무엇이었다. 때로는 과학이 이 땅을 점령한 열강들의 무력으로 각인되었고 때로는 과학이 반도체 같은 돈벌이를 위한 도깨비 방망이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지금은 우리도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한 형편이고 늘상 과학문명의 이기 속에서 그 혜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과학이 우리 일상과 아주 가까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 우리가 아무리 반도체를 잘 만들고 우주선을 쏘아 올린다고 하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이 우리 사회에서 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야만의 수준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아마도 대한민국 정치판은 이 야만의 가장 적나라한 본보기가 아닐까.

합리적인 이성에 기초해서 계몽의 시대를 거치고 근대 및 현대과학의 혁명적 발전을 주도한 서양에서는 '이성적인(reasonable)'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치에 맞지도 않고 근거도 없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목소리만 크면 만사형통이다.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이를 문자나 텍스트 없이, 결과적으로는 '논리'없이 감성적 대화에 길든 결과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을 과학적 전통의 부재로 이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치른 값비싼 대가를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겠지만 2005년 황우석 사태나 최근의 '제로존 이론' 해프닝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과학적 논리의 취약함에 노출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과학적'이라는 개념은 대체로 방법론에 대한 것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 황우석처럼 유명한 과학자조차도 비과학적일 수 있으며 방송국 PD처럼 전혀 전문지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도 아주 과학적일 수 있다는 점이 받아들여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이름난 과학자나 학술지 같은 권위에 대한 이런 식의 복종은 사실 과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지만 이른바 '제로존 이론'을 소개한 모 월간지는 유명 학술지 편집장이 관련 논문을 13개월째 심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 이론을 대단한 무엇으로 보도했다. 그 이론이 나중에 옳다고 판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의 과학 이론이 대단한 것은 그 이론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점들 때문이지 고명한 아무개가 논문을 심사하는 기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식의 신비화야말로 문명화된 사회의 암적 존재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만 알아도 훌륭한 대통령감?

그래서 나는 '가장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을 잠시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몹시도 우울하고 암담했다. 물리에 관한 한, "고등학교 때 저는 물리가 제일 싫었어요, 호호호" 하던, 미팅에서 만났던 그 숱한 여자들보다 지금 대선후보들이 조금이라도 나을 거라는 느낌을 나는 전혀 가진 적이 없다.

마침 북한 덕분에 우리 또한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가 되었으니, 기왕에 뻔질나게 남한을 들락거렸던 미군의 무수한 핵무기까지 세트로 해서 핵물리학의 기본을 이분들에게 강의하는 것도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인들과 대통령으로부터 고통받는 이유는 이분들의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이분들의 과학적 '사고 두뇌'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사실 과학의 첨단을 달린다는 미국에서도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비과학적 사고방식은 큰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뉴욕타임스>가 2004년 대선에서 당시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며 "우리는 그가 …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안도하고 있다"고 썼을까.

확실히, 부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나 폭발물이나 핵무기에 대한 더 많은 물리학적 지식이 아니라 지금은 더 이상 십자군 시대가 아니라는 시대인식과 더불어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조작된 증거들로는 이라크 전쟁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사고방식이다.

안타깝게도 정치와 종교의 분리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는 후보에 안도해야 하는 처지는 우리나라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자기가 시장으로 있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려고 작정했던 인물이 지금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가 아닌가.

비과학적인 개념정의가 횡행하는 것 또한 우리 정치의 수준을 과학으로부터 멀찌감치 격리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정권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유행하는 이른바 '친북좌파'나 '퍼주기'는 객관적인 개념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북한과 친한 정도를 어떻게 정량적으로 측정할 것인가, 좌파와 우파를 어떤 기준으로 가를 것인가, 혹은 얼마 이상의 무상지원을 북한에 대한 퍼주기로 규정할 것인가에 있어서의 애매함 때문이 아니다.

북한과 친한 정도로 본다면야 <동아일보>가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기사를 금판으로 떠서 갖다 바친 사건이 최상급일 터인데, 국가보안법으로 다스려야 할 이 '범죄행위'를 저지른 언론사가 오히려 친북세력 척결을 운운하고 있으니, 각자가 쓰는 이 친북이라는 개념의 정의는 사람마다 달라서 합리적인 논의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퍼주기' 또한 다르지 않다. 얼마 전 한나라당이 이제는 자신들도 북한에 대한 퍼주기를 전향적으로 검토한다는 기사를 접하고서 나는 이런 사회에서 내가 과학을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회의를 느낀 적이 있다. 그 당 소속 유력 대선후보는 자신이 당선되면 북한에 도로, 항만, 철도 등 엄청난 퍼주기를 하겠다고 했다가, 최근 주한 미 대사를 만나서는 다시 '친북좌파'를 들고 나왔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 강의를 시작하며...

만약 뉴턴의 중력법칙이 태양과 지구, 태양과 금성, 태양과 목성마다 각각 달랐다면, 그리고 달이 지구 주위를 돌고 사과가 떨어지는 원인이 이와 전혀 달랐다면 그의 법칙에는 '만유(universal)'인력이라는 위대한 수식어가 붙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치인들이 위대한 법칙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자연법칙처럼 이 세상도 그렇게 원칙들이 지켜지면서 돌아가리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 기대를 버린 지 이미 오래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최소한의 원칙에 대한 미련은 아직 남아 있다. 이 기대마저 무너진다면 나는 정말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을 크게 후회할 것이다.

나는 또한 아무개가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그와 같은 비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대통령에 오른다면 나라 전체로 큰 불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합의 이혼'으로 잠깐 국민들의 눈을 속인 통합신당도 합리나 이성보다는 야만에 훨씬 가깝기는 매한가지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를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되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서의 과학에 대한 마인드를 가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근대과학의 초석을 놓으며 교회와 대립해 온 이래 과학자들은 종교와 미신과 야만으로부터 이성과 과학과 진실을 수호해 왔다. 안타깝지만 2007년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아직 척결해야 할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대통령을 위한 내 물리학 강의가 여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나는 바란다.


태그:#대통령, #과학,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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