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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10대의 음주문화를 꼬집는 포스터.
ⓒ www.thesource.me.uk
'맥주 무한대 제공, 2만원', '오후 5시 입장, 한 잔에 2500원.'

술꾼들의 천국인 영국 런던의 뒷골목 술집에서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는 술값 할인 선전문구들이다. 영국의 술집 문화를 상징하는 펍(pub) 주인들은 흔히 초저녁 시간대 술값 할인을 내세운 '해피 아워'(happy hour) 같은 각종 이벤트 등을 통해 주당들을 불러 모은다.

런던 시민들도 거리에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일찌감치 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스카이TV 같은 스포츠 채널을 통해 중계되는 축구 프리미어 리그 응원에 빠져든다.

하지만 주머니가 헐렁한 술꾼들을 펍으로 끌어들이던 이런 파격세일은 머지않아 영국에서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영국 정부가 주류업계와 술집들의 가격 파괴 경쟁에 제동을 걸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40대 남성, 만취한 10대들에 폭행당해 사망... 음주난동 규제론 봇물

최근 영국 사회를 달구고 있는 주류업계 규제 논란은 지난 8월초 체셔 지역에서 발생한 한 살인사건에서 비롯됐다. 3남매의 아버지였던 47세의 평범한 가장이 술에 취해 집밖에서 소란을 피우던 10대들과 시비가 붙은 끝에 집단폭행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그동안 영국 사회의 고질병으로 지적돼왔던 10대들의 음주 난동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피해자가 뇌사 상태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아빠를 잃은 12살짜리 딸의 편지가 타블로이드 신문들을 통해 대서특필되면서 영국의 불량배 문화를 상징하는 이른바 '욥(yob) 컬처'(boy를 거꾸로 철자화해 불량 청소년들을 가리키는 신조어)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다. 시중의 여론 역시 영국 10대들의 고약한 술버릇에 대해 뭔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첫 번째 반응은 이 살인사건을 직접 맡아 수사했던 경찰 쪽에서 나왔다. 수사를 맡았던 체셔 지역의 경찰 총수는 사건 직후 연일 매스컴에 나와 "주류 구입 허용 연령을 현행 18세에서 21세로 올리고 공공장소 흡연금지 조치와 유사한 공공장소 음주규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영국 정부가 리버풀 존 무어 대학 연구진에 의뢰해 작성한 '청소년 음주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10대들의 술버릇을 고치는 데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연구팀의 조사 결과 우리나라로 치면 고작 중학생에 불과한 15세의 영국 청소년들이 1주일에 평균 와인 한 병 정도와 맞먹는 알코올을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이렇게 심각한 청소년 음주 현상이 유럽 국가 중 10대 범죄율과 10대 임신율에서 최고라는 오명을 영국에 안겨준 주범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영국에서는 주류 구입이 금지된 16~17세 청소년들이 중소형 슈퍼마켓 등에서 쉽사리 술을 구해 뒷골목이나 공원에서 맥주병을 들고 활개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매일같이 밤거리에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10대 청소년들과 경찰의 실랑이를 담은 TV 프로그램은 이미 영국에서 가장 시청률이 높은 볼거리 중의 하나가 돼버렸다.

"술값 할인한 주류업계가 책임해야" vs. "우리가 내는 세금이 얼만데"

수사 일선의 경찰 간부가 직접 나서 음주 규제대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매스컴이 이를 집중 보도하는 '영국적' 현상은 이렇게 혀 꼬부라진 10대들과 매일 밤 드잡이를 해야 하는 '영국적' 음주 문화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다.

경찰 내부에서는 '술 먹고 난리 피우는 녀석들을 뒤치다꺼리하는 데 드는 경찰 인력과 비용이 얼만지 아느냐'며 아예 음주와 관련한 사회적 비용을 주류업계에 부담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류업계는 최근 몇 년 동안 계속돼온 주세 인상을 거론하면서 '우리가 내는 세금이 얼만지 아느냐'며 여차하면 맞대응에 나설 태세다.

물론 아직까지 영국 정부에서 10대 음주율을 낮추기 위해 구체적인 제도 개선에 나선 것은 아니다. 내무부는 청소년들의 술버릇을 고치는 것은 가정교육에 맡길 일이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이래라저래라 할 일은 아니라는 태도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불똥이 튄 곳은 경쟁적으로 가격할인을 부추겨온 주류업계다.

최근 영국의 대형 할인점이나 슈퍼마켓의 주류 코너에서는 '반값 세일'이나, 맥주 한 박스 값에 두 박스를 주는 이른바 '바이 원 겟 원 프리(Buy One Get One Free)' 행사가 끊이질 않고 있다. 그만큼 주류업계의 가격 할인을 통한 마케팅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 영국 슈퍼마켓에 즐비한 할인맥주들.
ⓒ www.thejohnnyjet.com

가격할인 규제 움직임에 긴장하는 주류업계

그러나 버릇없는 10대들의 음주 난동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영국 내무부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대책의 하나로 주류업계의 지나친 가격 할인 경쟁이 청소년 음주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내무부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긴급 정책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주류업계는 이 보고서의 결론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현재의 가격할인 정책에 정부가 어떤 규제 방안을 들고 나올지 숨죽이면서 지켜보고 있다. 내무부는 '결론을 예단할 수는 없다'고 연막을 치면서도 정부가 주류업계와 가격 할인 정책을 놓고 대화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숨기지 않고 있다.

알코올음료에 붙는 세금이 워낙 높기 때문에 주류업계가 정부나 세무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은 영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 스코틀랜드에서는 동네 슈퍼마켓에서 맥주 60병에 20파운드(약 3만8000원)이라는 파격적 할인판매를 실시하면서 '생수보다 싸다'는 광고를 내걸자, 정부 당국이 나서 가격할인을 규제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주류업계를 긴장시킬만한 대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의사협회 등 일부 전문가들은 알코올 도수에 비례하는 주세 차별화나 주류 판매에 엄격한 면허제를 도입할 것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주류 판매 허용 연령을 21세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절반 이상이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 주류업계에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슈퍼 카지노' 백지화한 브라운, 음주난동 방지 고강도 대책 내놓을까

고든 브라운 정부는 이미 알코올음료에 대해 징벌적 성격을 지닌 주세 인상은 추진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10년 넘게 재무장관을 지낸 신임 총리답게 소비 위축을 초래할지 모를 세금 인상 방안은 최대한 자제한다는 것이 브라운 내각의 방침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학적' 접근법이 청소년 음주 증가라는 '사회적' 현상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게다가 고든 브라운 총리는 잘 알려진 대로 보수적인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의 아들이다. 유머감각과 자유분방한 스타일을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웠던 전임 토니 블레어 총리와는 달리 다소 어눌해 보이지만 엄격해 보이는 이미지가 그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미 취임 직후 맨체스터에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를 본뜬 '슈퍼 카지노'를 세운다는 블레어 정부의 계획을 백지화한 바 있다. 청소년 음주 문제에 대해 브라운 내각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에 대한 단서를 브라운 총리의 이러한 개인적 성향에서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영국 사회의 고질병으로 지적돼 온 무절제한 음주 문화에 대해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자라온 브라운 총리가 보수적 접근법을 택할 경우, 결국 영국 정부는 주류업계의 팔을 비틀든 설득하든 가격 파괴 경쟁에 개입하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국 주당들에게 수십 년 동안 사랑받던 '해피 아워' 같은 술집들의 판촉행사 등이 도마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대책이 얼마나 약효를 낼 것인지에 달려 있다. 지난 2005년 영국 정부가 술집들의 심야 영업시간 제한조치를 해제할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규제 방안이 발표된 바 있다. 당시에도 블레어 정부는 '해피 아워'를 금지하겠다는 구상을 밝히고 음주 관련 범죄로 3회 이상 적발된 사람들의 술집 출입을 금지하는 '3진아웃제' 같은 규제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이 영국 10대들의 음주 관행을 바꿔놓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정부의 직접 개입보다는 업계의 자발적 이행에 초점을 맞춘 대책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술 취한 10대들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영국 정부에서 과거와는 다른 고강도 대책을 마련 중인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전형적인 영국 맥줏집(펍)의 바 모습.
ⓒ 김성수

태그:#영국, #10대 음주, #주류 판매 규제, #펍, #고든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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