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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 강화를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길에 쏟아지는 미국 언론의 관심이 영 시답잖은 모양이다.

 

그러나 순전히 언론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이는 당연한 일이다. 이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는 날 훨씬 매력적인 뉴스메이커가 온통 기자들을 몰고 다녔기 때문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날의 뉴스 주인공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제치고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버거운 상대를 만난 것이다. 야구장 방문에, 백악관 생일 파티까지 호사스런 행차로 워싱턴 미디어의 관심을 독차지한 '헤비급' 교황에 비하면 이 대통령을 미국 언론들이 '라이트급' 취급한다고 해서 어찌해볼 도리는 없다. 

 

하지만 교황 소식으로 뒤덮인 미국 언론들의 호들갑에 버름해진 사람이 이명박 대통령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안을 얻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 대통령보다 하루 앞서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도 야단법석 교황 일정 때문에 미국 언론으로부터 홀대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브라운의 굴욕' 보도에 신난 영국 언론들

 

당장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일정을 보도하는 영국 신문 방송들을 보노라면 온통 '브라운의 굴욕'을 스케치하느라고 바쁜 것을 알 수 있다. 떠오르는 '헤비급' 강자는 아니지만 관록의 '슈퍼 미들급'은 된다고 믿었던 브라운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던 날 영국 신문들의 제목 몇 가지를 보면 이렇다.

 

미국은 세계적 지도자를 위한 열광적 환영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브라운 총리도 그 '옆에' 있었다. (<가디언>)

교황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가운데 혼자 남은 브라운(<인디펜던트>)

 

BBC 방송의 정치 에디터인 닉 로빈슨은 아예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미국 ABC 방송의 토크쇼 '굿모닝 아메리카'에 출연해 "미국을 사랑한다"며 외교적 립 서비스에 여념 없는 브라운 총리를 향해 "하지만 미국이 더 사랑하는 사람은 (부시의 푸들이라고 불렸던) 블레어 총리였던 것 같다"며 총리실의 심기를 박박 긁어놓았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앤드류 공군기지에서 부시 대통령 내외의 영접을 받으며 미국 땅을 디딘지 불과 몇 시간 뒤 미국에 도착했다. 실제로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일부 영국 언론들은 브라운 총리가 소리 소문 없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식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브라운 총리를 게스트로 부른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들이 시청자들에게 이 사람이 누군지 설명하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식의 과장된 조크들도 눈에 띈다. 모두 교황의 행차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일정을 꼬집는 보도들이다.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의제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후변화, 개도국 빈곤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협력 구상이다. 영국은 이러한 글로벌 의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데 형님 노릇을 해왔다. 브라운 총리는 이를 위해 유엔 등 국제기구가 제 노릇을 할 수 있도록 개혁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스턴에서 열린 외교정책 연설에서였다.

 

그러나 정작 이날 뉴욕의 유엔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브라운 총리가 아닌 교황 베네딕토 16세였다. 이러니 부시 대통령과 브라운 총리가 아무리 백악관 로즈 가든에 모인 기자들을 향해 '영미간 특수 관계'를 강조한들 적어도 이번 방미 일정만 놓고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외교적 굴욕'을 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 대선 후보들과 잇다른 회동, 그러나 잠재워지지 않는 언론들의 조롱 

 

물론 브라운 총리가 그나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던 장면도 있었다.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오바마, 힐러리, 매케인 등 민주 공화 양당의 대선 후보들과 잇달아 회동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분초를 쪼개써야 할 대선 후보들이 한 시간 간격으로 줄줄이 영국 대사관을 찾아 브라운 총리를 만나고 돌아가는 장면에서 영국인들은 그나마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애초 '사적 만남'이기 때문에 대사관 영접 장면까지만 공개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총리실 측은 대사관 벽난로 옆에서 브라운 총리가 이들 세 명과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교황 행차에 빛이 바래버린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일정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계속되자 총리실 측은 브라운 총리의 일정이 잡히고 나서야 교황 방문 일정과 겹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현지 언론에 얼굴을 얼마나 많이 비추느냐가 방미 외교의 성공 여부를 재는 유일한 잣대는 아니라는 해명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교과서적' 해명이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영국 언론들을 잠재울 리가 만무했다. 영국 신문들은 방미 외교 일정 자체가 잘못 짜였다고 비판의 칼날을 세우는가 하면 브라운 총리의 동정 보도마다 '외톨이 신세', '불운한 처지' 등 수식어를 갖다 붙이기에 바빴다. 이러다 보니 국내에서도 주택가 하락, 경제 침체 전망 등으로 지지율 하락을 겪고 있는 브라운 총리의 '방미 굴욕기'는 두고두고 영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전망이다.

 

두 친미 국가, '헤비급' 교황에 밀린 점도 닮았다 

 

하지만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일정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덩달아 영국 신문에 이름을 한 줄 걸친 사람도 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 북핵 문제를 제외하면 한국 소식에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영국 언론들이 하나같이 주요 지면에 이 대통령의 방미 사실을 보도하고 나선 것이다. '고든 브라운 총리가 (심지어) 같은 날 미국을 방문한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보다 미국 언론의 관심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다'고.

 

영국과 한국, 두 나라의 공통점에 세계적인 친미 국가라는 점 외에도 정상들의 호기로운 미국 방문길이 적어도 미국 언론에서는 동시에 외면 받는 분위기라는 점도 추가될 전망이다.


태그:#고든 브라운, #이명박, #베네딕토 16세, #방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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