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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수국이 피어나 조금씩 색을 바꿔갑니다. 토질과 기후에 따라 파랑에서 핑크로, 다음에는 하얗게 변신을 합니다. 마치 장맛비가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듯 색깔이 변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즐겁지만, 좀 변덕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 내 인생을 바꿔놓은 파란 잉크색, 수국
ⓒ 윤희경
수국을 볼 때마다 설렘으로 다가섭니다. 연한 자주색에서 하늘색으로, 다시 홍색으로, 때로는 흰색으로 변화무쌍하게 색이 변하면서도 항상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우아한 자태로 더위를 식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 수국은 토질에 따라 흰색에서 하늘색으로, 다시 홍색에서 자주색으로 변화무쌍하게 변한다.
ⓒ 윤희경
하늘색 수국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도 서러운 추억이 되살아나 가슴을 아리게 쓸어내립니다.

시골에서 중학을 마치고 어찌어찌해 서울 D상고에 합격을 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지요. 파란색 하늘을 보며 청운의 꿈을 앉고 서울로 유학왔습니다.

상고 특성상 가방 속에는 늘 파란 잉크병과 붉은 잉크병을 갖고 다니며 부기를 배워야 했습니다. 펜으로 파란 잉크를 콕콕 찍어 아라비아 숫자를, 빨간 잉크론 계산을 끝내고 마무리할 때나 빗금을 긋거나 수정을 할 때 사용하곤 했습니다.

▲ 산수국은 습기가 많은 산 속에서 산다. 흰색이 서서히 하늘색으로 변해간다.
ⓒ 윤희경
어쩌다 잘못하여 잉크병을 건드리는 날에는 교복 상의에 잉크물이 들게 마련입니다. 하얀 교복에 선명히 묻어났던 잉크방울 추억이 수국 속에서 되살아나 마음이 시리게 저려 옵니다.

자취와 고학으로 화이트칼라의 꿈을 꾸며 2학년까지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복식부기 시간이었습니다. 1원 하나 어김없이 숫자를 맞춰 끝내야 하는 계산 놀음에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부기 시간이 되면 계산을 맞추지 못하고 파란 잉크로 동그랗게 하늘을 그리며 엉뚱한 짓을 하곤 했습니다.

▲ 북한강 산수국은 자주색이 대부분이다.
ⓒ 윤희경
내가 가야 할 길은 화이트칼라가 아니라, 잉크색을 닮은 파란 하늘임을 늦게나마 깨달았던 것이지요. 누구와도 상의 한마디 없이 덜컥 자퇴 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교문을 빠져나오며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이 꿈처럼 도화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인문고로 3학년 편입을 하여 국어 선생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강원도로 첫 발령을 받고 어느 은행을 들렀더니 내 옆자리에서 공부를 같이 했던 반 친구는 벌써 대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녀석은 어느새 화이트칼라에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의자를 돌리고 있었으나 나는 코흘리개 초임교사였습니다.

▲ 서서히 홍색으로 변해간다.
ⓒ 윤희경
오늘은 비 온 뒤끝이라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 구경을 하다 갑자기 산수국이 보고 싶어집니다. 산수국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갑니다. 장마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얼굴을 내미는 파란 하늘도 보고 잉크냄새를 맡지 않으면 몸살이 날 것만 같아서입니다.

▲ 완전히 담홍색으로 변한 모습
ⓒ 윤희경
수국을 바라보면 지금도 빨간 잉크와 파란 잉크의 시리고 서러운 추억이 반추되어 가물거립니다. 산수국 속으로 알알이 들어와 박힌 꽃받침이 나비 되어 춤을 출 것만 같고, 요술공주가 실눈을 감고 잠들어 꿈을 꾸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내 인생을 바꿔 놓은 파란 잉크색, 아직도 아스라한 꿈으로 다가서는 하늘빛, 비라도 오는 날에는 산수국 꽃잎에선 파란 잉크물이 뚝뚝 떨어져 내립니다. 그러다가 붉은 눈물 되어 흘러내리면 어린애처럼 마냥 징징거리고 싶어집니다.

▲ 지금도 산수국을 보면 어린애처럼 울고 싶어진다.
ⓒ 윤희경
수국의 꽃말은 '변덕' 또는 '차가운 사람'입니다.

잘은 몰라도 '차가운 사람'이란 투명하리만큼 파란 하늘색깔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구나 산수국은 산뜻하고 우아하며 기품 있는 아름다움으로 선뜻 다가서기가 어렵습니다. 언제 보아도 가까이하기엔 차가운 당신, 산수국.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농촌과 고향을 사랑하는 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산수국, #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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