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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들 녀석이 교복을 입은 채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매일 밤 11시가 다 되어야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오늘은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일찍 학교를 나섰다며 신나 합니다. 전날까지 중간고사를 치열하게(?) 치른 끝인지 얼굴도 다소 편안해 보입니다. 쑥스럽게 내미는 종이가방에는 장미꽃 두 송이가 따로따로 들어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들녀석이 사온 장미를 들고 디카를 찍는다고 수선을 떨며 딸 아이를 기다립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1시가 돼야 학원에서 돌아오는 딸은 지금 재수를 합니다. 작년에 대학입학에 실패한 후 잠깐 실망했을 뿐, 짧은 방황을 끝으로 씩씩하게 다시 도전을 하고 있는 딸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럽습니다. 화사한 봄은 스무살 처녀의 가슴에도 여지없이 꽃망울을 터뜨릴 테고, 학원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애써 외면해야 하는 봄의 향기는 확실히 딸아이에게는 잔인한 고문이 될 테니까요.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이윽고 딸아이가 가게문을 들어섭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귀가를 했을 뿐인데도 어제 저녁보다 덜 피곤해 보이고 즐거워 보입니다. 소녀에서 처녀로 커가는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 딸아이 눈치를 보는 게 습관이 되어서인지 밝은 얼굴을 보자 덩달아 웃음이 나옵니다. 하기야 행복한 딸의 얼굴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기쁨이겠지요.

가방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더니 선물이라며 쑥 내밉니다. A4 용지보다 조금 큰 종이에는 뭔가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아내와 난 잠깐 어리둥절하다가 축하편지쯤 되나 보다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었는데 얼핏 보니 딸아이 혼자 쓴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쓴 것이었습니다. 저녁시간이 늦어 일단 받아놓기만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몇 년 만에 가 본 서양식 가족식당에서 맛이 있느니 없느니 느끼하니 뭐니 하며 수다와 함께 저녁을 먹고 행복한 하루를 끝냈지요. 작년 추석 이후 어려워진 가게 사정 때문에 여태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휴일도 없이 가게를 열었던 까닭에, 아내에게 미안해서 다음 주쯤에 하루 가게문을 닫고 바다를 보러 가자는 말로 조촐한 결혼 20주년을 마무리했습니다.

다음날 가게에서 조용한 시간에 어제 딸아이가 준 종이를 꺼내 읽었습니다. 그곳에는 담임선생님부터 친한 친구 열 명의 진심 어린 축하 메시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우리 나이쯤 되면 가슴은 더 넓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느낌의 촉수는 발달하게 마련입니다.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와 딸아이와의 우정이 느껴져서 가슴이 따뜻해 왔습니다.

▲ 딸아이의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이 보내준 축하 메시지
ⓒ 유원진
… 결혼 20주년 정말 축하드리고요, 좋은 친구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K 올림

… 앞으로도 언제나 행복한 잉꼬부부 되세요...J 올림

… 밝고 건강한 예니의 애교로 더 즐거운 기념일이 되시길...(담임 선생님)

… 힘들고 외로운 재수기간 동안 힘이 될 수 있는 친구를 만나 기뻐요. 결혼 20주년 축하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S 올림

…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를 낳아서 저희에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J 올림


다 읽고 보니 그곳에는 우리 부부의 결혼 20주년이 왜 축하를 받아야 하는 일인지가 모두 써 있었습니다. 딸아이의 친구들은 우리 부부의 결혼 20주년을 단순히 우리 부부의 일로만 여기지 않고 그들의 친구문제로까지 연결해, 같이 축하를 받아야 하는 진정한 가족의 문제로 승격시켜 놓은 것이지요. 좋은 친구를 낳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감격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화창한 봄날에 화창하지 않은 학원에 앉아 피곤과 싸워가며 공부를 하다가, 한번 본적도 없는 우리 부부를 위해 자신들의 시간을 희생해가며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들은 마음을 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그 학원에서 재수 공부를 해서 딸아이나 그 친구들이나 모두 학원 후배들인 셈이니 축하받은 기쁨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순수하고 따뜻한 글들을 읽으며 그들의 진심 어린 축하에 감동하다가, 문득 그 이벤트를 만들려고 종이 한 장을 들고 공부하는 친구들 사이를 애교 어린 표정으로, 혹은 협박성(?)의 표정으로 돌아다녔을 딸 아이와 기꺼이 정성을 들여 준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모두 자신 하나를 추스르기도 많이 힘들 텐데….

소중한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이 우리 부부가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 알아주셨으면…. 앞으로는 부부싸움도 하기 어렵겠네요. 저 선물을 액자로 만들어 방에 걸어놓을 생각입니다. 그 밑에서 어떻게 부부싸움을 하겠습니까. 딸아이의 말마따나 티격태격하면서도 닭살인 커플인데, 싸움은 없고 닭살만 남을 테니 그것도 행복한 고민입니다.

사흘 후면 어버이날입니다. 덤덤한 부부로, 가끔은 덜 행복하게 사셨던 것만 같은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웠었는데, 그것이 당신들만의 탓이 아니라 아주 많이 제 탓이었음을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낍니다. 만약에 제가 제 딸아이와 같이 부모님께 애정을 보내드렸다면, 그리하여 당신들이 저로 인해 행복해 하셨다면, 훨씬 더 나은 부부애로 사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후회는 소용없고 홀로 되신 어머님께 드릴 선물이나마 고민해야겠습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받은 기쁨을 어떻게 돌려 드릴 수 있을지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지면을 빌어 우리 평범한 부부의 결혼 20주년을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 준 열한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고백컨대 20년 동안 받아본 선물중 가장 감동적인 결혼기념일 선물이었습니다.


태그:#결혼기념일,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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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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