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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정 입구
ⓒ 서성.
올해 삼짇날은 4월 19일이다. 삼짇날은 음력 3월 3일이기 때문에 매년 날짜가 다르다. 지난해에는 양력 3월 31일이었으므로 보통 3월 말에서 4월 중순 사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4월 5일 혹은 6일에 떨어지는 한식이나 청명과 같은 시기이다. 조선시대 편찬된 세시기(歲時記)를 보면 삼짇날은 한식과 청명 앞에 놓는데, 중국의 세시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탓에 삼짇날의 풍속은 한식이나 청명과 같은 경우가 많다. 예컨대 삼짇날 본 나비가 노란색이면 풍년이 들고 하얀색이면 흉년이 든다는 '나비점' 풍속은 청명에도 있으며, 화전놀이와 답청(踏靑) 역시 청명절에도 있다.

그러나 매년 날짜의 폭이 크므로 이날을 기준으로 세시를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저명한 조류학자의 관찰에 의하면 제비는 매년 4월 7일 어김없이 날아온다고 하니, 삼짇날에 제비가 온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 난정 입구에 세워진 대형 기념물. 왕희지의 <난정집 서문>을 형상화하였다.
ⓒ 서성.
우리나라 풍속에는 이날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중국에서도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와 연관되어 얼른 생각나는 것으로 <논어> '선진'(先進)의 기록이 있다. 하루는 공구(孔丘)가 4명의 제자에게 만약 등용이 되면 어떻게 다스리겠느냐는 말에 증석(曾晳)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늦봄이면 봄옷으로 갈아입고 젊은이 대여섯과 동자 예닐곱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겠습니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 말과 정치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지만 공구의 찬동을 얻었던 말이다. 늦봄은 음력 3월로 지금의 4월에 해당한다. 고대에는 5월은 여름으로 쳤다. 내가 의문이 드는 것은 당시 4월에 목욕을 한다면 춥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목욕한다는 말에 대해 주희(朱熹)는 "지금의 상사(上巳)일의 불제(祓除)이다"고 주석을 달았다.

▲ '아지' 글씨. '아'자와 '지'자가 활달하게 어울려 있다. 왕희지 부자가 한 자씩 썼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 서성.
삼짇날을 중국에서 상사(上巳)일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에 강가에 나가 때를 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3월 3일로 정해졌다. 위의 말로부터 그 당시 사람들은 겨울에는 목욕을 잘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봄이 되고 날이 따뜻해지자 때를 벗기면서 삿됨도 소멸한다는 주술의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초등학교 때 읍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봄이 오면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강가로 갔다. 그곳에서 양말을 벗으면 대부분의 학생들 발이 시커맸는데 2~3시간 발의 때를 불리다가 조약돌로 벗기고는 학교로 돌아왔다. 상사일에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는다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사기>에도 한 고조(漢高祖)의 부인 여후(呂后)가 삼짇날에 서안 남쪽 패수(覇水)에서 관리와 백성이 함께 동으로 흐르는 물에 온종일 때를 벗기고 묵은 병을 씻었다고 하는데 곧 이러한 의식으로 보인다. 중국의 대부분의 하천은 동으로 흐르므로 동류수(東流水)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 과정에서 액막이 제사도 지냈으리라.

▲ 거위를 바라보는 왕희지. 왕희지는 거위를 아주 좋아했는데 거위의 휘돌아간 목에서 힘찬 필력을 배웠다고 한다.
ⓒ 원대 전선(錢選) 그림.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일에 주술적 의미를 덧댄 삼짇날이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물가에서 잔을 돌리고 시를 짓는 곡수유상(曲水流觴)으로 변했고, 당대에는 다시 봄놀이로 발전하였다. 두보(杜甫)가 지은 <여인행>(麗人行)은 곧 삼짇날 양귀비 언니들의 봄놀이를 묘사하였다. 그 첫머리는 "삼월 삼일 날씨도 산뜻하여, 장안의 곡강(曲江) 물가엔 미인도 많아라"(三月三日天氣新, 長安水邊多麗人)고 시작하고 있다.

▲ <괵국부인유춘도> 괵국부인은 양귀비의 언니이다. 이들이 삼짇날 곡강에 놀이가는 모습을 그렸다.
ⓒ 당대 장훤(張萱) 그림.
그러나 중국문학 속에서 삼짇날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장면은 난정(蘭亭)의 곡수유상이다. 중국에 가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난정(蘭亭)이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난정은 상해에서 남쪽으로 멀지 않은 절강성 소흥(紹興)시에 있었다.

소흥은 몇 가지 점에서 잘 알려진 도시이다. 춘추시대 월왕 구천(句踐)이 쓸개를 맛보았던(臥薪嘗膽) 월(越)나라의 수도였고, 당대 시인 하지장(賀知章), 근대 지식인 채원배(蔡元培), 현대문학의 거장 노신(魯迅)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3-361)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활동하였다.

처음 소흥에 갔을 때는 일정에 쫓겼지만, 두 번째 소흥에 갔을 때는 일주일간 도시를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인구 30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중국의 어느 곳보다 문화적 색채가 강하였고 운치가 있었다.

점심이 되면 모든 노선버스의 중심에 있는 함형주점(咸亨酒店)에 가서 중국 8대 명주(名酒)의 하나인 소흥주(紹興酒)를 한 사발씩 들이키곤 했다. 나는 본디 술은 잘 못하지만 이상하게도 소흥주만은 입에 맞았다.

▲ 소난정. 글씨는 청대 강희제가 난정에 왔을 때 썼다.
ⓒ 서성.
소흥에 가면 꼭 찾아보고 싶은 곳이 또 있었는데 곧 '산음도'(山陰道)였다. '산음 가는 길'로 <세설신어>에 짤막한 기록이 있다. 산음은 곧 산음현(山陰縣)으로 지금의 난정이었다.

왕헌지(王獻之, 344~388)가 말하였다.

"산음도(山陰道)를 따라 걸어가면 산과 강이 서로를 비치고 어울려 사람이 차마 다 볼 겨를이 없을 지경이외다. 만일 늦가을에 간다면 그 풍경은 특히나 잊기 어려우리라."(王子敬曰: "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 若秋冬之際, 尤難爲懷.")

한 번 보면 가슴이 미어질 듯 잊기 어려운 풍경이란 어떤 것일까. "산과 강이 서로를 비치고 어울려 사람이 차마 다 볼 겨를이 없을 지경"이라는 말은 역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며 강남 산수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구가 되었다. 나는 인구에 회자된 현장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나 역시 한가하게 산과 강 사이를 거닐고 싶었다. 더구나 왕헌지는 왕희지의 아들이지 않는가.

▲ 유상정 현판.
ⓒ 서성.
소흥에 내려 여러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산음도'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도시의 서남에 감호(鑑湖)를 끼고 있는 사당에 들렀는데 그곳에 '산음도'라는 현판이 있었다. 산음도는 꼭 정해진 길이 있는 게 아니라 소흥시에서 산음현까지 10여km의 길을 산음도라고 함을 알았다.

난정(蘭亭)에 가려면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서남으로 30분 정도 가면 된다. 그러나 난정 가는 '산음도'는 그리 특별한 풍경이 없었다. 하긴 벌써 1600년 전의 일이지 않는가. 강산이 변해도 한참 변한 모양이다.

난정이 잘 알려진 것은 물론 왕희지의 <난정집 서문>(蘭亭序)이라는 글씨 때문이다. 왕희지는 동진(東晉)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명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랐다. 특히 친척이자 유명한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으로부터 서예를 공부하였다. 나중에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섭취하여 아름답고 유장한 자신의 필법을 완성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필체를 "하늘에 흐르는 구름 같고, 놀라 뛰어오르는 용 같다"고 찬탄하였다.

▲ 유수곡상이 벌어졌던 장소를 복원한 모습.
ⓒ 서성.
때는 353년(永和 9년) 음력 3월 3일 날씨가 화창한 봄날에 난정에서 왕휘지를 비롯하여 친구인 손통(孫統),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 41인과 연회를 벌이고 각기 시를 지었으며, 왕희지가 서(序)를 짓고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인 <난정집 서문>이다. 이후 난정은 명성이 더욱 배가되어 서예의 성지이자 강남의 유명한 정원이 되었다.

지금의 건축과 정원은 명대 말기(1548)에 중건했다. 안에는 아지(鵝池), 소난정(小蘭亭), 유상곡수(流觴曲水), 유상정(流觴亭), 어비정(御碑亭), 왕우군사(王右軍祠) 등의 건물이 있었다. 아지(鵝池) 못가의 석비에는 '아지'(鵝池)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왕희지는 거위를 좋아했기에 사람들은 이를 기념하여 난정에 아지(鵝池)를 만들었다. 왕희지가 소흥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어느 날 감흥이 일어 '아지'(鵝池)란 글자를 쓰고 있었다. 이때 마침 황제의 성지가 도착하였으므로 왕희지는 어쩔 수 없이 붓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아야 했다. 그때 들어온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그것도 모르고 이어서 '지'(池)자를 썼다. '아'자(鵝)는 말랐지만 '지'(池)자는 살찐 것으로 좋은 대비가 이루어진 이 비석을 사람들은 '부자비'(父子碑)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소난정'(小蘭亭)이 나오는데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에 왔을 때 쓴 '난정'이란 글씨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깨뜨린 것을 나중에 다시 맞춘지라 지금도 글씨가 깨어진 흔적이 뚜렷하다.

▲ <난정의 모임>
ⓒ 명대 문징명(文徵明) 그림.
조금 더 걸어가면 유상곡수(流觴曲水)가 나오는데 왕희지가 여러 사람들과 수계(修禊) 때 잔을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던 곳이다. 수계란 주희가 말한 불제(祓除)를 말한다. 이때 사람들은 화창한 봄날을 즐겼다. 당시 문벌 사족의 명사인 왕희지(王羲之)를 좌장으로 하여 모두 41명의 청류(淸流)들이 참가하였다.

<세설신어>에는 당시 26명이 물가에서 시를 지었지만, 시를 짓지 못한 15명은 벌주를 3잔씩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는 두 편 쓴 사람도 많아 현재 모두 36수가 전해진다. 왕희지와 손작이 각각 서문을 썼는데, 특히 왕희지의 <난정집 서문>(蘭亭集序)은 널리 알려졌다. 글씨도 글씨지만 글의 내용도 인상적이다. 특히 산수 자연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잘 표현해내 명문의 반열에 오른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9년(373년), 계축년 음력 삼월 초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였으니, 곧 계제를 지내기 위해서이라. 명사들이 모두 오고 노소(老少)가 함께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과 솟은 봉우리,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가 있고, 또 맑은 물과 빠른 여울이 있어, 자연이 서로 어우러진 곳이다.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곡수(曲水)를 만들고 사람들이 그 물가에 늘어앉았으니, 비록 성대한 음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으니, 마음속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기 실로 족했다. 이날은 날씨가 화창하고 기운이 맑으며, 바람이 온화하고 시원하였다. 고개를 들어 우주의 거대함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만물의 번성함을 살피며 눈과 마음이 가는대로 보고 들어, 그 즐거움이 곡진하였으니 진실로 기쁘기 한이 없었다.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우리는 왜 기뻐하는가. 그리고 왜 우주와 만물을 한꺼번에 바라보게 되는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전체를 삽시간에 조망하게 되는가. 아름다움이 단순히 눈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식을 활짝 깨워 인생과 우주를 한꺼번에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곧잘 통찰과 함께 온다.

▲ 당대 풍승소 사본. <난정집 서문>은 당태종이 부장품으로 무덤에 가져갔기에 현재 모본만 전한다. 그중 풍승소 사본을 가장 정확한 임모본으로 친다.
ⓒ 서성.
당시 난정의 모임에 참가한 유온(庾蘊)의 시에도 그러한 인식이 있다.

仰想虛舟說, 고개 들어 빈 배로 처신해야 함을 생각하고
俯歎世上賓. 고개 숙여 세상에 손님으로 왔음을 탄식하네
朝榮雖云樂, 아침에 꽃이 피어 즐겁게 지내다가
夕斃理自因. 저녁에 죽는다 해도 자연의 이치에 따른 것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희열과 친화는 물론, 유한한 개체가 물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며 영원을 갈구하는 바람이 깃들어 있다. 유한과 무한에 대한 갈등은 대자연을 만나 비로소 위로받으며 자신을 직관하는 힘을 얻는다. 개인의 감정과 기질은 자연 속에 침투되고 승화되며, 영원을 추구하나 얻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으로부터 위로받는 듯하다.

이로부터 500년 후 중당의 문인 류종원(柳宗元)은 "아름다움은 스스로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탓에 사람을 통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난정이 왕희지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맑은 여울과 긴 대나무가 한갓 빈산의 잡초 속에 묻혔을 것이다!"(夫美不自美, 因人而彰. 蘭亭也, 不遭右軍, 則淸湍修竹, 蕪沒空山矣!)라고 하였다.

자연에 쏟아진 사람의 마음과 정신은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산수는 이제 정감을 가진 객체로 나타나게 된다. 산수가 하나의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대상으로, 사람과 산수는 마음이 통하는 노래를 함께 부르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어비정(御碑亭) 안에 건륭제가 모사(摹寫)한 <난정집 서문>(蘭亭集序)을 읽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은 왕우군사(王右軍祠)에서 역대 명필들이 모사한 글씨들을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자연을 향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감성적으로 표현한 그의 문장에 자꾸 마음이 갔다. 유상곡수의 흘러가는 물에 천 년의 시간이 걸려 있었고, 봄이 되어 커가는 연잎들 위로 화창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MBC미술센터<황금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서성 기자는 열린사이버대학교(www.ocu.ac.kr) 중국어전공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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