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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고향 마을로 들어서자 딩이 자랑하던 포장도로는 끝이 나고 울퉁불퉁 비포장길이다. 점심 무렵 밥도 먹지 않고 출발했는데 중간에 어디 잠깐 들르자더니 절에 가서 무려 네 시간을 기다려 여승을 만나느라고 두 시간 남짓 거리를 저녁이 어둑어둑해서야 도착했다.

베트남 사람들이 절을 가리켜 '파고다'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탑골공원을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던 게 생각나 그 어원이 궁금했다. 파고다에는 음력 새해를 맞아 갖가지 소원을 빌기 위해 온 사람들이 법당 안을 메우고 있었고 그들이 한 주먹씩 피워대는 향의 연기로 자욱했다.

▲ 파고다 전경. 기둥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보이는 한자글귀들이 가득하다.
ⓒ 유원진
딩과 그 여승은 무슨 인연인지 모르지만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만나고는 잠깐의 안부 인사와 합장으로 이별을 했다. 나는 그녀의 미모에 놀랐고 그녀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또 한 번 놀랐다.

베트남 시골 마을에 여승도 흔치 않으려니와 유학파 여승이라니….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는 부탁은 정중히 거절 당했다. '다음에 오면'이라며 묘한 여운을 남기긴 했지만.

딩의 고향 식구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차가 들어서자 동네 입구에 그의 고향 식구들이 다 나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딩을 쳐다보니 어깨를 으쓱한다. 설마 아들이자 동생이며 처남인 그가 윗사람들을 다 나와서 서 있으라고 했을 리는 없고 하여튼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아버지가 다가와 나를 안는다. 그냥 포옹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끌어 안고는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그의 누나들을 제외하고는 다 포옹하는 걸로 필요없는 말 대신의 인사를 했다. 때로 말이란 몸짓보다 얼마나 가벼운가.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부모님께 한국식으로 큰절을 했다. 나이도 돌아가신 아버지뻘이려니와 그네들의 지극한 환대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싶었다. 딩이 한국식이라고 통역을 하자 다들 박수를 친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린다는 것은 최대의 예의 표시리라.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준비가 되었다고 마당으로 나갔는데 우리네 설음식 같이 갖가지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고기와 국수 그리고 이 지방에서만 먹는다는 토속 음식이 마당에 깔린 멍석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원래 아무거나 다 잘먹기는 하지만 베트남 음식 중에서도 이 집의 음식, 그중에 담백하게 말아내는 국수가 특히 맛있다.

▲ 야채와 함께 먹는 베트남 전통음식. 발음이 어려워 이름은 기억을 못했다.
ⓒ 유원진
술을 무척이나 즐겨하는(그래서 코까지 새빨간) 그의 매형은 쉴새없이 술잔을 부딪치며 권하는데 아무리 술이 약하다고 사양해도 막무가내였다. 에라 아무려면 어떠랴. 왜 그리 술까지 달고 맛있는지 (집에서 담근 베트남 전통술인데 도수가 꽤 높다) 별빛 아래 마당에서 취기가 올랐다. 그의 조카 탕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내 주위를 돌며 연신 나와 눈을 맞추며 벙긋벙긋 웃는다. 아무리 봐도 참 귀여운 꼬마였다.

모두들 술이 얼큰해지자 그의 매형이 노래방을 가자며 나를 끌길래 이런 시골에도 노래방이 있느냐니까 차 타고 조금만 나가면 노래방이 있다며 딩의 동의를 구했다. 딩은 평소에 술도 많이 안 마시지만 노래방이고 뭐고 노는 거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그가 한국에 왔을 때는 일하는 거 말고는 도무지 해 줄 일이 없어서 난감할 지경이었다. 그런 딩도 분위기에 고무되었는지 흔쾌히 가자며 나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부모님과 누나들은 빠지고 나머지 남자들만 갈 셈인 것 같았다. 나는 부모님은 물론 누나들까지 같이 안 가면 나도 안 가겠다고 손사래를 쳤고 처음에는 안 된다던 부모님과 그의 누나들이 내가 완강하게 버티자 할 수 없다는 듯 그러나 행복하게 동의했다. 우리는 그의 차와 몇 대의 오토바이에 나누어 타고 읍내의 노래방으로 몰려갔다.

노래방에 처음 와보았다는 딩의 부모님도 즐거워했고 한사코 노래를 안 부르려고 버티다가 수줍어 하며 마이크를 잡는 누나들을 보다가 나는 문득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그러나 지금은 잃어버린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술이 취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환대에 취해서 오랜만에 필자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 화목한 딩의 가족들. 그들은 딩을 자랑스러워했다.
ⓒ 유원진
어린 시절 시골 고모님댁에 갈 때면 하루에 한 번 밖에 안 오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멀리까지 나와 기다리시던 시골 어른들과 서울내기 왔다고 사랑방으로 모여들던 친구들을 기억해내곤 기어코 가슴이 아려옴을 느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을 이들도 곧 잃어버리겠지만 자본주의의 천박함과 문명사회의(?) 삭막함이 부디 천천히 이 시골 마을을 점령하기를 빌 뿐이었다. 우리들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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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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