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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창남

난 지금 9회말 투아웃의 타석에 서 있다. 어떻게 나갈까?

사사구로 걸어갈까? 아니면 끝내기 홈런을 날리고 달려갈까? 9회말 투아웃, 타석에 선 타자와 투수만큼 절박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앞에 남은 공 하나. 어떻게 할까?

여유롭진 못해도 별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들 데리고 꽃가게를 하면서 이른 아침 새벽 꽃시장을 보러가는 행복으로 하루하루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이상하게도 실내장식 일을 하는 남편의 일이 풀리지 않았다. 공사를 하면 대금을 떼이기 일쑤이고 한번 일이 생기면 서너 달 쉬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내가 조금씩이라도 부업을 하는 중이였기에 별 걱정을 안 했다. 그러던 차에 셋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점점 어려워지는 사정에 병원에 갔는데 초음파로 들려오는 심장의 박동소리는 "나 살아있어요 엄마"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순간 잠깐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던 걸 후회했다.

남편의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그래도 인부들 일한 돈은 주어야 했기에 빚을 얻어 처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악몽의 터널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IMF라는 악몽의 터널

가져오는 돈은 없고 배는 점점 불러오고….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저녁 진통이 시작되었다. 두 아이를 자연분만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고 6살, 4살 남매를 집에 두고 "엄마 병원 가서 아기 낳고 올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라며 집을 나섰다.

시간은 흐르고 밤이 깊어가고 새벽이 오도록 배는 터질 것 같이 불러오는데 결국 동네병원 의사는 포기하고 급기야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 진작에 보내줄 것이지.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응급차에 실려 큰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았다. 겨우 마취에서 깨어났는데 집에 두고온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아이들 생각에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가려고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의사가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나고 걸으라고 하면 하루종일 병원 복도를 걸어다녔다.

수술하고서 마취에서 막 깨어날 무렵 아이들이 병원에 왔다. 둘째 녀석이 그 큰 눈망울로 "엄마 죽지마세요" 하면서 누나 손잡고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우리 막내는 태어났다.

퇴원하는 날 병원비를 어디서 구했는지 남편은 원무과 직원이 퇴근하기 직전 돈을 마련해서 왔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지금까지도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 막내 이 다음에 돈 많이 벌 거야. 태어나자마자 100만원을 썼는데 돈 많이 벌거야. 비싸게 태어나서."

퇴원 수속을 마친 남편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 남편 앞에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던 차도 넘어가고 사채업자는 갖은 협박을 해대고. 정말 살아도 산 날들이 아니었다. 결국 가진 것도 없지만 정리하고 시댁이 있는 인천으로 들어왔다. 참 예쁠 리 없는 막내며느리였다.

설상가상 잔금을 받으러 서울로 갔던 남편이 돌아올 시간인데도 오지 않아 걱정을 했다. 다 정리하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었나 보다. "오늘 저녁 오랜만에 삼겹살 구워먹자, 곧 들어갈게"라고 했던 남편이 새벽에 들어왔다. 그것도 빈손으로….

공중전화를 하면서 손가방을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몇 발짝 오다 '아차'하고 갔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이 전화할 때 뒤에 서있던 사람이 가지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 새벽에 경찰서로 신고를 하고 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그 때의 심정을 무엇으로 다 말하랴. 그 돈은 다행히 그날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가 들어있어서 3개월 후에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범인인 듯한 사람이 우리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보는 전화가 여려 차례 걸려오기도 했다.

우리집 밑천을 다 들고갔던 범인들은 그 돈으로 전국일주 여행을 하다 결국 교통사고를 당해 부인은 죽고 남편은 목에 깁스를 하고 있더라고 경찰서에 다녀온 남편이 이야기했다. 그 때처럼 세상이 공평하게 느껴진 적도 없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구나.

호되게 치른 '인천 입성' 신고식

인천에 들어온 신고식을 그렇게 호되게 치렀다.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 먹자골목에서 거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횟집, 자갈구이집, 조개구이집, 분식집, 호프집 주방일 등 수도 없었다. 젖몸살이 나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어 그만두기도 했다.

하루는 새벽 2시에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커피 한잔 마시고 빨래 해야지'라는 생각에 뜨거운 물을 따라 싱크대 위에 두었는데 잠깐 사이에 이제 막 일어서기 시작한 막내가 "엄마! 무~"이라면서 뜨거운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고 입술은 순식간에 부어올랐다. 어찌할 줄 몰라 방방 뛰며 울다가 119에 전화하고 병원으로 갔다. 입술과 한쪽 팔과 가슴 한쪽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그 어린것을 처치실에 누워놓고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문 앞에서 주저앉아 울었다. 그렇게 막내아들은 힘겨운 치료를 잘 견디어 주었다.

지금은 상처가 깨끗이 나았는데도 내 가슴 속엔 그날의 상처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 막내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하나는 업고 둘은 양손에 잡고서 아이들 데리고 종이접기 자원봉사 활동을 '청솔의 집'으로 다녔다. 착하기만 한 아이들이 예뻐서일까? 하늘이 도왔다.

그 당시 여성부에서 IMF 이후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나자 고학력 여성 일자리 창출의 하나로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 사업을 벌였다. 결혼 전에 어린이집에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취업이 됐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과 울고 웃다 보니 어언 9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난 이 분야 최고참이 되어 있다. 집에 두고 다녀야 했던 젖먹이 막내는 올해 초등학교 4학년생이 된다.

어느 날 아파서 누워있다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밥상을 차려놓고 "엄마 아픈 거 빨리 낳으세요, 엄마 깰까 봐 저 그냥 말 안하고 학교 가요 학교 다녀올게요"라고 그렇게 편지를 놓고 간 착한 큰딸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큰딸은 벌써 자신의 진로를 다 설정해 놓았다. 둘째 아들은 검도 선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라주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 가지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넉넉지 못해서 물질적으로는 못해주지만 정성만은 풍족하게 주리라고. 그래서 준비를 했다.

세 아이들 각자에게 줄 편지글과 앨범정리를 하고 있다. 그 속엔 아이들이 자라온 이야기가 담겨있다. 편지글 중간엔 취학통지서 복사본도 붙여 두었다. 아이들이 만 20세가 되는 '성년의 날' 엄마의 마음을 담은 이 선물을 줄 것이다.

또 한가지 원칙은 그때까지 아이들 빨래를 손으로 빨아 입힌다는 것. 빨래를 해서 널 때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나 주길 바라는 마음 기도로 올리면서 말이다.

삶에 힘을 주었던 아이들

바쁜 직장생활에 힘들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힘이 생긴다. 큰아이를 업고 보육교사 공부를 했고 둘째 아들을 업고 방송통신대 입학식을 치렀다. 막내를 업고 다니면서는 제과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러고 보니 세 아이마다 다 사연이 있다.

사람들이 묻는다. 힘들지 않느냐고. 그러나 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껏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후회없다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물론 아직도 IMF의 터널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 믿는다. 이 끝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터널도 언젠가는 끝이 보이고 그 너머엔 환한 희망의 내일이 있다고 믿는다.

지난 10년 힘겨운 삶 속에서도 아프지 않고 잘 자라준 아이들, 숱한 역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버티어준 남편,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최선을 다해 지켜온 나. 자랑스럽다 나 자신 스스로가.

오늘도 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특히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보기에 화려한 모습들이 반드시 행복한 삶은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가족은 끝도 없는 바닥까지 내려갔었기 때문에 이제 더 내려갈 일은 없다. 오직 올라갈 일만이 있을 뿐이다.

지난해엔 물난리도 겪었다. 그 힘겹던 곳에서 단독주택 2층으로 이사를 왔다. 재개발 지역에서 몇 번 철거를 당하고 이제 제대로 집다운 집에 살게 되었다. 계약서를 쓰면서 집주인에게 "저 이 집에서 오래 살게 해주세요, 이사 다니는 게 너무 힘들거든요"이라고 이야기했다. 집주인은 흔쾌히 "알았어, 이사가라고 안할게, 열심히 살아"라고 말했다.

아침저녁으로 쓸고 닦고 또 쓸고 닦는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신이 난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다락방도 있고 집주인도 참 좋은 분이어서 마음이 놓인다. 하루종일 거실에 햇살이 드리운다. 우리가족에게 희망을 알려주듯이. 봄이 오면 앞 베란다에 상추며 고추를 심을 것이다. 가끔은 돗자리 깔아놓고 주인어른과 우리가족 삼겹살파티도 열 계획이다.

난 오늘도 희망을 꿈꾼다. 그 희망은 나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9회말 투 아웃 타석에 서서 난 삶이란 공을 힘껏 쳐 낼 것이다. 끝도 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타구를 날릴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에 나의 희망은 저 파아란 하늘을 향해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입니다.


태그:#IMF, #10년, #응모글,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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