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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는 기업들의 줄도산을 낳게 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제는 아물었다고 생각하는 상처를 들춰내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것은 내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내 여린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게 했던 것은 가난이 아니라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핏줄들의 '차가운 말'들 때문이다. 물질적인 궁핍은 견딜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가난이 깃든 마음은 어지간히 참아내기 힘든 것들이었다.

1993년 결혼한 우리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매일 아침 수평선 너머로 불쑥 솟아오르는 아침 태양을 맞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철없던 나는 전망 좋은 직장을 선뜻 그만두었다.

빚으로 신혼집을 마련할 만큼 우린 가난했지만 꿈이 있어 행복했다. 꿈같은 3년이 지나자 남편은 상사의 추천을 받아 해외공사 책임자로 발령이 났다. 특유의 성실함과 명민함으로 회사에서 촉망받던 남편은 관리자로서 그 자질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했다. 게다가 해외근무 수당과 가족수당을 덤으로 받으니 바특한 살림에 숨구멍이 틔는 것은 물론이었다.

남편이 해외근무 하는 동안 겪어야 했던 불화와 고통

아무 연고 없던 그 곳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어머니와 함께 살 집을 알아보니 지방에서 살던 돈으로는 전세 얻기가 힘들었다. 2년 후 남편이 귀국해 함께 살 요량으로 방 두 칸 짜리는 얻어야겠기에 시누이의 동의를 얻어 목돈이 모일 1년 동안 잠시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나와 아이들은 친정 부모님 신세를 지기로 했다.

업계에서 우수한 기술력으로 인정받던 남편 회사가 IMF가 터지기 바로 직전에 이미 자금난으로 경영악화 일로에 들어섰다. 지급 받기로 했던 가족수당도 항목에서 사라졌다. 머나먼 타지에서 홀로 고생할 남편을 생각하니 매일 밤 눈물이 터졌다.

그런데다 본디 화목하지 못했던 시집 식구들이 악성을 드러냈다. 남편이란 바람막이가 없어지자 경우 없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시누이는 걸핏하면 술 마신 날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와 내 마음을 할퀴곤 했다. 연락 끊고 지내던 시숙까지 가세해 대학 보내준 자식이 어찌 부모를 누이 집에 버릴 수 있느냐는 등 터무니없는 말로 친정아버지에게 전화로 따지고 들었다.

그들은 거침없고 모질고 당돌했다. 결국 한 달을 못 견디고 단칸 셋방을 얻어 어머니를 모셔와야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친정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그도 부족해 시누이와 시숙은 해외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닦달했다. 견디다 못해 공사기간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고단한 심신으로 일 년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집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형제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 놓였다.

남편 회사는 곧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니 구조조정 과정 없이 바로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퇴직금 한 푼 받지 못하고 남편은 집에 들어앉았다. 입에 풀칠 할 정도면 아이들 곁을 지키겠다던 나의 결심에 차질이 생겼다. 단칸방 한 쪽에 남편의 책상이 따로 놓였고, 우리의 대화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남편 대신 밥벌이에 나서는 건 결코 슬픈 일이 아니었다. 반장이 부재중이면, 부반장이 그 의무를 대신해야 하는 건 마땅한 일이니까. 다만 어린 시절 나를 우울하게 했던 '엄마의 부재'를 내 아이들에게 반복하는 게 서글펐을 뿐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배달을 했고,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바로 광고 회사로 출근하는 고달픈 나날을 계속했다.

타고난 성격이 소심해서 남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있는 척을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싫어 친정 모임에 되도록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실직자인 남편이 무시당할까봐 스스로 자라목이 되었다.

명절날 부모님을 뵙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인 자리에서 까르르 웃어젖히는 형제들의 웃음소리는 내 가슴에 쩍쩍 금을 내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모두 가시였고, 상처였다. 조카애들 방방마다 즐비한 책장을 보면 텅 빈 내 아이들 책장이 생각나 한없이 쓸쓸한 마음이 되었다.

남편은 2년 반 동안 두문불출했다. 몸이 고달픈 나보다 가장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해 마음이 고달플 그가 더 안쓰러웠다. 자주 술상을 차려 말벗이 되어 주었지만 그는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어려운 상황일수록 불안해 하지 않고 차분한 모습이 남편의 매력이다. 그는 지루해 보이는 싸움을 계속했고, 나 역시 부반장으로서 고군분투했다. 궁핍했지만, 건강한 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그러나 남편의 실직기간이 조금 길어지자, 잘 견디던 내 몸이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굳게 믿던 남편이 불안해 보였다. 잔소리하지 않던 내가 술기운을 빌려 은근하게 압력을 넣는 횟수가 잦아졌다.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몇 군데 이력서를 넣는 척 집을 나서는 남편의 등이 왜 그리 시리던지. 거의 치매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던 시어머니마저 견디기 힘들었던지 친척들 사는 고향으로 훌쩍 내려가 버렸다.

오늘을 살기에 벅차지만 가족이 있어 행복

▲ 눈물로 만들어진 우리집 가훈
ⓒ 박명순
나는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시리다. 다행히 그는 지루했던 자기와의 싸움을 끝내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해서 잘 다니고 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나는 끝까지 믿어주지 못한 '불신의 눈빛'을 미안해 하고, 남편은 못 다한 '가장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미안해 하며 산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 하는 일, 이 얼마나 값진 행복의 재산인가. 불행을 겪게 한 대신 내어주는 하느님의 '고귀한 선물'이 아닐까. 그래서일까. 우리는 서로 불평할 줄 모른다. 불평을 해도 곧 뒤돌아 서서 후회하곤 한다.

남편은 그 일을 계기로 늘 위기의식을 가지고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남편 가슴에 아로새겨진 좌우명인, '우리 가족은 하나'가 가훈이 되어 우리 집 거실에 걸렸다.

우리는 가난했고, 노후 계획은 여전히 꿈도 못꾸고 오늘을 살기도 벅차지만, 우리에겐 이렇게 하나인 가족이 있어서 행복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훨씬 따뜻해지고 온순해졌다.

아픔이 묽어지고 기억도 희미해져, 오래된 사진을 들여다보듯, 지나온 날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고 내가 내게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IMF 긴 터널 끝에 서 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

작성해 놓은 초안을 본 남편이 버럭했다. 나누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 가려야 할 '치부'는 있다고 했다. 잠시 고민했다. 나보다 더 아픈 기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작지만 내놓고 함께 하고 싶었다. 털어냄으로서 자유롭고 싶은 내 마음이 아마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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