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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의 그림 <정원>과 그의 모델이 된 파리의 클리니 박물관의 모습.
ⓒ 한경미

나혜석과 이응노 선생 미망인의 특별한 관계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 難爲水)"
바다를 본 사람은 물에 대하여 말하기 어렵다.


나혜석이 계속 나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난 번 나혜석이 머물렀던 파리 근교의 집을 방문한 이후로 나혜석이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다시 <나혜석 전집(태학사 2000)>을 꺼내 여기저기 뒤적이다 보니 한 문장이 내 시야를 잡아당긴다.

"1947년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시절의 화가 박인경이 안양의 경성보육원에서 나혜석을 만났고 나혜석이 자서전 같은 것을 쓰고 있는 것을 청서해주기도 했다."

한국 동양화가의 대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미망인이신 박인경 화백은 지금 몇 십년째 파리 근교에서 살고 계신다. 내게는 지척에 있는 거리이다. 이런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현재 생존해 계신 분 중에 나혜석을 직접 만나본 마지막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을 찾아가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피할 수 없는 사명이다.

파리 교외에 사시는 박인경 화백을 만나러 간 날은 바람이 무척이나 불었다. 1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날씨는 봄처럼 따듯했다. 셍라자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북서쪽으로 1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이 보 쉬 센느. 세느강이 저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 돌고 있는게 무척 운치 있는 마을이었다.

파리 교외에 우아하게 서있는 한옥집

전화로 알려주신 대로 역에서 나와 육교를 건넌 후 대로를 따라 쭉 올라갔다. 마치 시골에 소풍 온 아이처럼 시선을 여기저기 정신없이 뿌리며 주위구경을 하며 가고 있는데 오른쪽 경사 위로 정갈한 한옥집이 우아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서양집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는 아릿다운 한국여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미리 열어놓으신 문을 열고 정원을 올라가 경사를 돌자마자 한국식 작은 정자가 갑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환영하는데 마치 잊어버리고 있었던 오랜 친구를 만나는 듯 반가왔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 하나 없이 아직도 소녀의 모습을 간직하고 계신 박인경 화백이 소녀처럼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주신다. 그 뒤로 두 마리의 조그만 개가 캉캉 짖으며 따라 나온다.

바람이 심한 탓으로 창의 커튼을 닫은 거실에 앉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저 커튼 뒤에서는 바람의 강한 애무를 받아 세느강이 마구 몸을 뒤틀고 있을 것 같았지만 불행히 나의 시야는 차단되고 말았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오히려 우리가 찾아가서 만나고자 하는 여인의 모습이 더 선명히 떠오를 수도 있다. 점점 심해지는 거센 바람의 속도가 마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아가게 하는 듯 하더니 갑자기 60년 전에 가서 딱 멎는다.

▲ 현재 박인경 화백이 사는 한옥. 부군이었던 고암 이응노 화백과 함께 살던 집이다.
ⓒ 한경미
양로원에서 만난 나혜석

1947년, 해방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다. 박인경에게는 안양에서 보육원을 운영하는 외사촌 오빠가 하나 있었다. 이름하여 안양 경성보육원. 처음에는 고아원이었으나 해방 후 양로원도 겸하게 된 곳이었다. 일제 시대하에서 식민지 교육을 받았던 박인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정신대로 잡혀가지 않기 위해 이 곳에서 얼마간 일한 경험이 있다.

해방과 함께 박인경은 서울로 올라와 이대 미대에 들어간다. 미대 2학년생이라고 기억되는 어느 봄날, 1947년의 일이다. 외사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양로원에 여류화가가 한 명 들어왔으니 같이 미술하는 학생으로서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으니 언제 한번 다녀가라는 전갈이었다. 한참 미술세계에 빠져있었던 미대생 박인경은 며칠 후 안양으로 내려갔다.

박인경이 안양 보육원에 도착했을 때는 따스한 햇볕이 운동장 하나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태양은 스산하고 추웠던 겨울의 기나긴 터널을 막 벗어나 사지를 맘껏 늘이며 기지개라도 펴는 듯 싶었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볕을 즐기기 위해 마침 보육원에 있던 노인들이 모두 운동장에 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다들 늙고 병들고 허술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띄는 여자 한 분이 있었다. 그 분도 남들처럼 때가 낀 누렇게 바랜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고운 분이라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순간적으로 아마도 저 분이 화가이신가 보다 생각하고 일행 앞을 스쳐 가는데 아마도 자기의 방문을 알고 있었던 듯 그 분이 자기를 보더니 슬그머니 일어서 뒤로 사라지신다. 아마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자태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어쩜 저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비록 초봄이긴 해도 날씨가 변덕스러워 무명옷이라도 입고 있어야 할 시기에 뻣뻣한 베옷 같은 옷에 여기저기 색이 다른 천으로 기운 허술한 옷을 입고 있었어도 예사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돌아서는 자태에서 흘러나오는 옷의 아름다운 선과 우아한 모습이 마치 일본의 '우키요에'의 세련된 모습을 연상시켰다고나 할까.

원장실에 가서 외사촌 오빠를 만나고 오빠와 같이 화가가 묵는 방에 들어가 소개를 받았다. 여류화가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자유학생으로 1913년 18세의 나이로 일본에 유학가 유화를 전공하고 돌아와 1921년 26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었던 선구자.

1920년대 말에는 외교관이었던 남편과 같이 1년 6개월간의 구미여행을 하고 와서 왕성한 화가생활을 하다가 결국 파리에서 알게 된 최린과의 연인관계가 남편에게 발각되어 이혼을 당하게 된다. 구미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채 안된 1930년의 일이고 그 때 나혜석은 35세의 젊은 나이였다.

▲ 박인경 화백의 정원에 있는 정자.
ⓒ 한경미
'이혼고백장'을 쓰다

이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혜석은 4년이 지난 후 결국 '이혼고백장'을 발표하게 된다. 이 이혼고백장에서 나혜석은 당시 자신의 이혼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함으로써 사회에 파문을 일으킨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이혼고백장', 삼천리 1934, 8-9)

"남자는 칼자루를 쥔 셈이요, 여자는 칼날을 쥔 셈이니 남자 하는데 따라 여자에게만 상처를 줄 뿐이지. 고약한 제도야." ('모델', 조선일보 1933.2)


이혼 후 나혜석은 갈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갈까.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자식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 홀로 된 몸,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이혼고백장'에서)

비록 유부남이긴 했어도 최린이 파리에서 나혜석에게 한 약속이 있다. 만약에 이들의 관계가 나중에 들어나 나혜석이 이혼을 당하게 되더라도 자기가 거두어 들일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약속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서울에 와서 나혜석이 이혼을 당한 후 심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거두어 들이기는 커녕 어렵게 요청한 나혜석의 구원마저도 차갑게 거절해버린다.

자신을 버린 연인에게 소송을 걸다

가만히 있을 나혜석이 아니었다. 나혜석은 자기를 버린 연인 최린에게도 공식적으로 소송을 청구하는, 당시로서는 아무도 생각 못할 용감한 행동을 한다.

'1. 그런데 그 후 피고는 언제든지 원고의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약속하고 수년간 말을 좌우로 청탁하고 한 푼의 원조도 없는 고로 원고는 경제적 비상한 고통을 받아 현재는 전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1. 금년 4월 경에 원고는 부득이 자기의 전도를 개척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하기로 하여 피고에게 여행권과 보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여 여비고 1천원의 지급을 청구하였던 바 피고는 의외에도 냉혹하게 이를 거절하였다.

1. 피고는 원래 자기의 일시적 xx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유혹 수단을 써가지고 원고로 하여금 xx의 희생이 되게 하였는데 원고는 남편에게서 이혼되고 사회로부터 배척되어 생활상 비상한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받아 이것이 원인으로 현재 극도의 신경쇠약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피고는 전혀 고의로 원고의 전부(이전 남편) 김우영에 대한 처권을 침해하여 원고로 하여금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받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위자료 1만 2천 원을 상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청구한다." ('여류화가 나혜석 씨 최린 씨 상대 제소', 1934년 9월 20일 조선일보에 인용)


이 글은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는데 최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삭제되었다. 궁지에 몰린 최린은 나혜석에게 소송취하를 권유하였고 나혜석은 최린으로부터 수천원을 받는 조건으로 결국 소송을 취소하게 된다.

떠돌이로 보육원까지

▲ 나혜석의 생전 모습
최린에게 받은 돈으로 나혜석은 파리로 다시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그럴 경우 몇 년간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되겠기에 포기하고 대신 서울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사립미술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지탱하지 못하였다. 이후 빈 손으로 여기저기 갈 곳 없이 떠다니다가 결국 안양 경성보육원에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당시 여대생이었던 박인경은 이런 사실을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나혜석이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두 여자를 소개시키고 오빠는 방을 나갔다. 마치 형무소의 감옥방처럼 자그마한 방에는 가구라고는 하나도 없이 이부자리 하나만이 덩그라니 깔려있을 뿐이었다.

방에 남아 서로 얼굴을 마주한 두 여인. 한 명은 새로 시작된 서울에서의 여대생 생활에 미래가 문처럼 활짝 열려있었던, 막 피어나려는 꽃과 같은 21세의 젊은 여성이었고, 다른 한 명은 어려웠던 식민지 시대에 누구보다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내었으나 이제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 인생의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던 51세를 막 넘긴 중년의 여인이었다.

손바닥만한 방에서 가깝게 본 나혜석은 여전히 고운 모습이었다. 지난 15년동안 고생하고 방랑했던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나혜석은 다른 노인들처럼 쪽을 지고 있는게 아니라 단발 형식으로 자른 머리에 아마도 본인이 가위로 여기저기 뭉둑뭉둑 자른 듯한 모습이 마치 히피를 연상시켰다.

그럼에도 지성미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고 전혀 감정이 들어나지 않는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은 고뇌를 아마도 무심으로 극복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인경은 여류화가를 보겠다고 오긴 했어도 자신이 기자도 아니고 그다지 호기심이 많은 성격도 아니어서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쩌면 나혜석의 인물 앞에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나혜석도 말 없이 앉아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 박인경의 눈에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세워두었던 나혜석의 그림들이 몇 구 눈에 들어왔다. 남성적이고 굵직한 텃치가 들어있어 힘이 느껴지는 그림. 말은 해보지 않았어도 나혜석이 풍기는 인물상과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 깨고 내민 공책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으려니 나혜석이 침묵을 깨기 위한 것인 듯 방 한구석에 팽개쳐 두었던 소학교 공책을 집어 들더니 박인경 앞에 내놓는다. 손가락만한 뭉뚱 연필이 공책 속에서 떨어졌다.

"이건 내가 심심할 때 써 놓은 글인데 자서전 비슷하다고나 할까. 학생이 한 번 읽어보고 교정해서 새로 정서해 주면 좋겠는데"라고 물어온다. 얼떨결에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일단 공책을 들고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읽어보니 우선 글씨체가 구형식의 글이어서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고 내용면에서도 본인의 화려했던 과거만을 그려놓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대한 반감이 심할 때였는데 왜 나혜석은 자신의 과거만을 회상하고 있는지, 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는지, 한창 젊은 나이의 박인경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의 박인경에게는 어려운 숙제처럼 여겨졌고 당장 자신도 시험준비도 해야 하는 등 해야 할 일도 많아 거절을 하였다.

노트를 나혜석에게 직접 건네주었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쩌면 오빠에게 대신 건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면서 오빠에게 왜 나혜석이 보육원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는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라고 말했던 기억도 나는 것 같다.

나중에 오빠에게 들은 얘기인데 얼마 후 나혜석은 친정오빠가 와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나혜석이 그나마 갖고 있었던 그림들과 써놓았던 글들이 모두 불태워졌다고 한다.

▲ 나혜석의 작품 <등을 보인 나부>(연대불명․왼쪽)와 <자화상>(1928).
엄동설한 서울 어딘가에서 홀로 가다

이혼당해서 집안을 망신시켰다는 이유 하나로, 젊어서는 자기를 그토록 위해주었던 오빠에게도 버림받아 다시 갈 데 없이 홀로 된 나혜석. 여기저기 친구와 친지들을 찾아 가도 차가운 냉대만 받았던 나혜석은 결국 길거리를 헤매다가 그 다음 해인 1948년 12월, 서울의 추운 길거리에서 홀로 외롭게 사망했다.

몇 년 전인가, 박인경은 나혜석의 몇 개월간의 보육원 생활을 옆에서 가까이 지켜보았던 사촌오빠에게 나혜석 얘기를 해달라고 해보았지만 별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던 오빠였다. 그 오빠도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이혼고백장)

태그:#나혜석, #박인경, #파리, #이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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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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