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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최초의 여류화가 나혜석의 생전 모습
1920년대 말, 일본이 내지르는 거친 호흡 속에서 조선이 서서히 무너져갈 무렵, 서양이라는 대륙은 멀고 먼 꿈속의 단어로만 들릴 때, 한국 최초의 여류화가였던 나혜석은 당시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1년6개월이란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일주를 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는다.

당시 이미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셋을 둔 젊은 엄마였던 나혜석은 자식들을 나이 드신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용감하게 남편을 따라 나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남편이 독일에서 근무할 동안 그는 혼자 파리에서 3개월간(자료에 따라 6개월로 기록되기도 했다) 머물게 된다. 당시 파리의 미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나혜석이 파리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1927년 8월부터인데 파리 근교인 르베지네에 있는 한 프랑스 가정집에서 묵은 걸로 되어있다. 나혜석은 이 집에 머물면서 파리에 있는 화가 비시에르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서양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중장년층의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이 군림하고 있었다.

나혜석은 아시아문제에 정통했던 아시아 학자이며 철학과 교수임과 동시에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샬레 집에서 기거했는데 이 집에서 살면서 보고 느꼈던 프랑스 가정 이야기를 조선에 돌아온 이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이 집은 파리 상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 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하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있고 우거진 수풀, 엉켜 오르는 덩굴, 작약화, 월계화,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감자, 상추, 파, 콩이 심겨 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비둘기, 밀봉(꿀벌)을 기른다.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1936년 4월 <삼천리> 발표, 나혜석 전집 중, 태학사 2002)

나혜석이 머물렀던 집을 찾고 싶어졌다

@BRI@이 글을 읽으니 나혜석이 머물렀던 집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마침 파리에 살고 있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듯 했다. 문제는 이 집 주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단지 동네 이름과 사람 이름만 갖고 거의 80여년 전에 살았던 집의 주소를 찾는게 가능할까?

우선 르베지네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1927년 당시에 살았던 샬레의 집 주소를 찾는게 가능한지 알아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가능하다면 자손들의 이름도 얻어내고 싶었다. 면사무소에 전화를 거니 직원 말에 의하면 26년도 선거리스트를 찾아야 주소 확인이 가능하다고 한다.

며칠이 지나서 메일로 연락이 왔다. 샬레의 아들 이름은 장, 1918년생, 주소는 11 bis rue Thiers라 되어있었다. 당시 7세였던 막내아들의 나이를 따져보니 올해로 88세. 아직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많은 나이였다.

우선 이 아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곧장 인터넷에 들어가 알려준 거리 지도를 뽑아보니, 단독주택가가 아니었다. 책에 나와있는 대로라면 샬레 가족은 커다란 정원 딸린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프랑스가 한국과는 달라서 80년 전 주택가를 다 헐어버렸을 리는 없을텐데….' 하며 우선 이 거리에 사는 사람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마침 사무실이 하나 있기에 전화를 걸어 그 거리에 주택은 하나도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뭔가 이상했다. 다시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알려준 주소는 주택가가 아니라고 했더니 한참을 생각한 뒤 그 거리 이름이 1930년대에 Henri-Cloppet로 바뀐 걸 깜빡 잊었다고 알려준다.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알려준 거리지도를 뽑았다. 면사무소에서 알려준대로 11 bis에 누가 사는지 두드렸더니 다행히 한 이름과 전화번호가 나왔다.

기다림의 연속... 여기가 프랑스 맞구나!

▲ 나혜석의 자화상
즉시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자가 받기에 지금 사는 집에 언제부터 살고 있느냐고 물으니 5년 전부터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전에 살았던 사람이 혹시 샬레라는 이름의 사람이었냐고 물으니 그런 이름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 이름과 연락처를 알 수 없겠냐고 물으니 "글쎄 어딘가에 있을텐데 찾아봐야 한다"며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를 했더니 아직 못 찾았다며 자기 기억이 정확하다면 파리 근교 랑부이에 근처인 알렝빌로 이사 간 걸로 알고 있다고 한다. 전화번호 적어놓은 쪽지가 어딘가에 있을 터인데 남편이 워낙 바쁜 사람이라 아직 찾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분이 한 30년 이상을 살다가 이들에게 집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나혜석이 머물렀던 가족 중의 한 사람일 가능성이 많았다.

"이 집 가족은 50여세 된 샬레씨, 40여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 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다정하고 실질적인 프랑스 부인' 중에서, 1934년 3월 <중앙> 발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의 연속, 내가 프랑스라는 나라에 살고 있음이 다시 한 번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에 들어가 알렝빌에 살고 있을 샬레라는 이름을 두들겨보았으나 아무 성과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렝빌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만 갈 뿐 아무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을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드디어 통화가 이루어졌다. 워낙 작은 동네라 면사무소가 일주일에 두세번 오후에만 문을 열어서 통화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면사무소장이 전화를 받았는데 샬레라는 사람이 사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동네 사는 사람들 이름을 다 아시느냐고 했더니 주민이 300명밖에 안되고 지금 몇십년째 소장일을 돌보고 있어 다 안다는 것이다. 할 수 없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수밖에.

▲ 나혜석이 머물었던 샬레씨 집의 가족사진(1920년대).
드디어 걸려온 전화... 외손자를 만나다

며칠이 지났다. 결국 이렇게 아무 성과도 없이 일이 끝나려나 막심하고 있는데 르베지네 집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편이 드디어 전화번호를 찾았다는 것이다. 거의 탄성이 터져나올 뻔 했다.

그런데 전화번호와 함께 알려준 이름은 샬레가 아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바로 전화를 돌렸더니 응답기에서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장황하게 전화 건 이유를 설명하기도 힘들 것 같아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일단 전화번호를 알았으니 이제 당사자와 통화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10분이 지났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그토록 통화를 하고 싶어했던 당사자였다. 자기집 전화번호에 내 전화번호가 찍힌 걸 보고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내가 사연을 죽 이야기하고 가족중 누구냐고 물으니 샬레가 자기 할아버지라고 한다. 샬레 막내딸의 아들인 것이다.

불행히도 샬레 직손들은 막내아들을 포함하여 모두 사망하고 없었다. 20년대 당시에 한국화가가 그 집에서 3개월간 하숙하고 있었던 사실을 아느냐고 물으니 안다고 했다. 우선 그것만도 다행이었다.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열흘 후에 파리에 전람회 보러 갈 일이 있으니 그 때 만나자고 한다. 드디어 만날 날짜와 시간, 장소가 정해졌다.

만나자고 한 날은 마침 공휴일이었다. 오전 9시 30분, 몽파르나스 지하상가 앞에서 만난 샬레씨 손자는 나이 60대를 넘긴 정년 퇴직자였다.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인터뷰가 이루어졌다. 1920년대 가족사진을 모아놓은 낡은 사진첩을 들고 와 내게 보여주었다. 혹시라도 가족 사진 중에서 나혜석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열심히 찾아보았으나 불행히도 찾을 수 없었다.

그토록 사이가 좋아 나혜석의 부러움을 샀던 샬레부부는 사실 재혼한 커플이었고 당시 같이 살던 딸 둘은 마담 샬레가 전결혼에서 얻은 자식이고 막내아들인 장 만이 두 커플 사이의 자식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결국 샬레씨가 이 분의 의붓할아버지가 되는 셈이었다.

본인의 이름이 공개되기를 꺼리므로 그냥 샬레 손자로 부르기로 하자. 이 손자분이 어렸을 때 할머니 집에서 나혜석씨가 그려주고 갔다는 작은 그림을 본 기억이 나는데 그게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는 중요한 말을 하신다. 막내아들이 샬레부부 재산의 대부분을 물려받아 분명히 그 그림도 유산으로 받았을텐데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 5년전에 운명을 달리할 때 남아있던 재산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안타까웠다. 이 그림을 찾는 일이 새로운 숙제로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샬레 손자분과의 인터뷰는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어도 일단 가족의 일원을 찾아냈다는데 의미를 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 무슨 우연일까? 이 손자분의 아들이 한국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인생은 재미있다.

샬레 손자분과의 인터뷰가 이루어진 것은 올 봄이었다. 이후 나혜석에 관한 글을 쓴다는 계획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다 그래도 올해는 넘기지 말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며칠 전에 다시 르베지네 집에 전화를 넣었다. 집의 사진을 찍으러 가도 되겠냐고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전화번호는 더 이상 사용되는 번호가 아니라는 녹음이 흘러나온다.

이상했다.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주소를 두드려 보니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전화번호가 나온다. 그리로 전화를 했더니 그 사이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와서 살고 있었다. 주인여자에게 다시 사정 설명을 하고 사진 찍으러 가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하게 승낙을 해준다.

▲ 나혜석이 파리 체류기간중 묵었던 파리 근교 르베지네 주택. 나혜석은 3개월간 이 집의 2층에서 3개월간 가량 살며 미술공부를 했다.
ⓒ 한경미
나혜석은 80년후 이집을 찾는 사람을 상상이나 했을까

약속한 날이 되어 샤틀레에서 RER 고속지하철을 탔다. 20여분 만에 샤투역에 도착했다. 넉넉히 여유있게 간다고 하고 떠났는데도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잘못 들어 30분이나 걸어 헤맨 끝에 결국 30분 늦게 도착했다. 주인여자는 아들과 마침 점심을 먹고 있다가 친절하게 내게 집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비록 집안 내부장식은 바뀌었을지언정 80여년 전 나혜석이 드나들었을 거실과 그림작업을 했을 2층 방을 바라보는 나의 심정이 묘했다. 나혜석은 먼 훗날에 자신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누군가가 이 집을 방문할 것이라는 것을 단 한 순간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

1870년경에 지어진 이 집은 앞쪽으로 1750㎡ 정도 되는 넓은 정원이 놓여있고 집 바로 뒤로는 지금은 파리의 고속전철인 RER선이 나있었다. 나혜석이 묵었을 당시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녔던 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혜석의 글에 의하면 2층에 샬레 부부방과 딸의 방 그리고 본인의 방 3개가 있었다고 되어있는데 현재 2층에는 방이 2개뿐이었다. 집안 내부 수리를 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돌아오는 길에는 시간이 있었다면 나혜석이 이용했던 셍 라자르행 기차를 타보고 싶었다. 아직도 그 기차는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나혜석의 눈 안에 잡혔을 경치를 보고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페라에서 다음 약속이 기다리고 있어서 할 수 없이 다시 고속전철을 타고 나왔다.

유럽일주를 마치고 다시 조선에 돌아온 나혜석에게 모든 것은 낯설었다. 머리도 다시 길러야 했고 긴 한복으로 다시 갈아입어야 했으며 시집살이는 다시 시작되었다.

"생활 정도를 낮추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상을 품고 그것을 실현 못하는 것처럼 비애스러운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의사를 죽여 남의 의사를 좆는 것처럼 무의미한 것이 없는 것 같다…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 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를 시작하였다…아아,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 파리가 그리워…"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구미 만유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1932년 1월 발표)

나혜석은 파리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확실한 것은 파리에서 인연이 되었던 남자 최린과의 관계가 조선에서 잘못 받아들여져 이혼을 당하게 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의 나락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그 불행했던 시절, 나혜석은 항상 파리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파리에 돌아갔다면 그녀의 운명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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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자유기고가, 시네아스트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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