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주인규
스탈린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흐루시초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실정과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공산권에 큰 충격과 함께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해방 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온 소련파는 흐루시초프의 변화된 노선을 따라 모택동의 지원을 받는 연안파와 힘을 합쳐 남로당 계열의 몰락으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계획했다.

이들은 1956년 조선노동당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와, 전후 복구사업에 관련된 제반 정책에 대해 김일성의 책임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일성을 숙청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고 뒤이어 김일성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소련과 중국정부의 간섭에도 김일성은 소련파, 연안파에 대한 숙청을 2년에 걸쳐 천천히 치밀하게 진행하였다.

소련출신으로 정률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문화선전성 제1부상으로 활동하다 종파청산 당시 소련으로 망명했던 정상진은 자신의 수기 <아무르 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에서 해방 직후부터 8월 종파투쟁까지 그가 교유했던 문학, 예술인들을 회고하고 있다.

그 수기에는 1956년 9월, 초대 국립영화촬영소장이며 초대 영화인동맹 위원장이었던 주인규가 8월 종파사건으로 조사를 받던 중 그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였다고 짧게 기록하고 있다. 초기한국영화의 선각자이자 북한영화의 토대를 닦은 주인규의 최후가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한 자살이었다는 점은 씁쓸하다 못해 비극적이다.

베일에 가려진 영화배우 '주인규'의 삶

주인규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6.25전쟁 시 강홍식과 함께 서울의 영화인들을 북으로 데려간 장본인이었으므로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언급이 불가능한 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8월 종파투쟁으로 자살한 후,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북한 양쪽에서 그의 이름은 빈 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BRI@주인규는 1901년경 함흥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주경팔은 시골의 탄탄한 부자였으며, 동생은 태평양노조사건으로 함께 체포된 주선규이다. 1927년 당시 주소는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212번지였다. 1919년경 한 살 많은 이인동과 결혼했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1927년 11월 17일 매일신보에는 주인규의 이혼소송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혼의 원인은 부인 이인동이 시집에 들어가 살기를 거부해서 생긴 것이었다. 이인동은 1922년 5월 만병수(萬病水)라는 약을 다량 복용하여 자살을 기도하여 놀란 시아버지가 6개월 뒤 사망하였고 몇 해 뒤에는 친정에서 첫째 아이를 낳은 후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해산 5개월 뒤 아이만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주인규가 영화와 관련을 맺게 된 것은 1922년 함흥에서 발족한 극단 예림회에 가입해 문예부장 안종화를 만난 것이 기회가 되었다. 예림회는 지두한, 서정익, 박정걸 등 동경유학 출신들이 함흥에 세운 연극단체였다. 예림회에는 훗날 한국영화의 선각자로 손꼽히는 인물들인 안종화, 주인규, 김태진, 그리고 나운규가 있었다.

1924년 예림회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서울이 고향인 안종화는 함흥을 떠나 무대예술연구회의 공연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안종화를 배웅하기 위해 세 명의 친구들이 방석만한 엿을 들고 함흥역에 모였다. 그 친구들이 바로 주인규, 김태진, 나운규였다.

부산으로 떠난 안종화는 함흥의 친구들에게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연락했다. 안종화의 연락을 받고 김태진이 제일 먼저 내려왔고 얼마 안 있어 주인규가 내려왔다. 안종화가 있던 무대예술연구회원 전부가 일본인이 세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안종화가 함흥의 친구들을 잊지 않고 불렀던 것이었다.

<개척자>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맡다

 <아리랑> 제작 기념 사진. 앞줄 중절모 쓴 이가 주인규 그 왼편이 나운규, 오른편이 김태진

주인규는 함흥의 친구들과 함께 월 11원의 적은 돈을 받는 연구생으로 월 10원의 식비를 물며 감독으로 있던 윤백남의 집에 기거했다. 얼마 안 있어 서울에 있던 나운규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주인규는 그곳에서 일본인 왕필렬이 연출한 <해의 비곡>(海의 悲曲)과 윤백남이 연출한 <운영전>(雲英傳)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운영전>이 흥행에 실패하자 윤백남은 자신의 집에 기거하던 연구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백남프로덕션을 설립한다. 주인규도 따라 올라왔다. 영화제작비가 없는 백남프로덕션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때 주인규가 1000원을 내어 놓았고 주인규의 동향 친구 K도 1000원을 내놓았다.

주인규가 가지고 온 돈으로 영화제작이 시작되었다. 흥행을 고려하여 <심청전>을 고른 윤백남은 연출을 이경손에게 맡겼다. 심봉사로 나온 나운규의 연기가 좋았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윤백남은 일본에서 흥행을 해보고자 <심청전>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나며 이광수 원작 <개척자>를 다음 작품으로 정했다.

<개척자>는 이경손이 연출을 맡았고 처음으로 주인규가 비중 있는 역을 맡았다. 주인규가 맡은 역은 젊은 화학자 김성재역으로 화가 민은식을 사랑하는 동생 성순을 자신의 연구비를 후원하는 변철학에게 시집보내려다가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역이었다.

이른 봄에 일본으로 떠난 윤백남은 여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개척자>는 혹서로 네거필름이 손상되었다. 채무자들의 빚 독촉이 심해지자 주인규를 비롯하여 백남프로덕션에 남은 사람들은 <개척자>를 상영하여 빚을 청산하기로 하고 손상된 필름이나마 상영하기로 결정하였다.

<개척자>는 1925년 7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개봉 첫날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여 서울 시내가 온통 물에 잠겼다. 극장에 관객은 십수 명에 불과했다. 얼마 뒤, 단성사 뒤 여인숙에서 백남프로덕션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개척자>에 이어 <아리랑>서도 '악역' 맡은 주인규

백남프로덕션 해체 후, 이경손, 나운규, 김태진, 이규설 등은 조일제가 만든 계림영화협회에 합류했으나 주인규만은 두문불출 하고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일 년의 공백기를 거쳐 그가 스크린에 얼굴을 내민 것은 그 유명한 <아리랑>에서였다.

1926년 2월, 경성 본정에서 모자점을 하던 요도라는 노인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세웠다. <장한몽>이후 지리멸렬한 상태에 있던 계림영화협회의 일부 영화인들이 조선키네마프로덕션으로 옮겨와 영화를 만들었다. 협회의 첫 번째 작품은 이규설이 만든 <농중조>였고 다음 작품은 나운규가 만든 <아리랑>이었다.

주인규는 <개척자>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리랑>에서도 악역을 맡았다. 주인규가 맡은 역은 여주인공 최영희를 겁탈하려는 청지기 오기호역이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악역 전문배우로 명성을 얻는다.

<아리랑>에서 배우들은 최적이라고 평가받는 자신의 캐릭터를 구현해 내었다. 장난기 가득한 외모의 주인규는 지주에게 아부하고 농민들을 괴롭히는 얄미운 청지기역을, 지금의 유오성과 같이 선 굵고 폭발적인 에너지를 갖은 나운규는 살인을 저지르는 광인의 역을, 곱상한 외모의 귀공자 타입인 김태진은 여주인공의 애인 역을, 어수룩한 외모의 이규설은 가장 그럴듯한 조선 노인의 모습을, 지금의 문근영과 같이 귀엽고 고운 외모의 신일선은 여주인공 역을 맡아 훌륭히 소화해 내었다.

나운규 아리랑 주인규 김태진 이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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