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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연개소문>이 방영되고 있다. 첫 방영에서 등장했던 장년 연개소문 유동근의 카리스마는 빛났다. 그러나 청년 연개소문 이태곤의 연기는 정말 맥이 빠진다.

▲ 칼을 든 연개소문과 활을 쏘는 설인귀의 전투장면을 당태종이 지켜보고있다.
ⓒ <당설인귀과해정료고사>삽화
역사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상상력은 동북아의 가혹한 국제질서 속에 치열하게 생존했던 인물들의 고뇌와 삶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 픽션소설이 될 수는 없다. 좋은 드라마라면 을지문덕을 비롯한 강경파와 욕살들로 대표되는 온건파의 갈등의 본질은 무엇인지? 숙부가 왜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는지를 개개인 인물들의 인격이나 선악의 개념으로 단순화 시킬 것이 아니라 국제 정세 속에서 고구려가 왜 강경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가를 감동으로 전해줘야만 한다.

이 감동이 전해질 때, 우리는 연개소문이 왕과 수많은 귀족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폭악한 반란자라는 중국 사료의 허구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고구려 사람으로 무릇 장군이 되려면 천문과 지리, 기상을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문(文)은 ‘삼략법’에 정통하고, 무(武)에서는 ‘육도서’에 통달했다. 현재 해동 16 개 국가가 모두 당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신하라 칭하나 오로지 나의 고구려국만이 당 조정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 글은 <막리지 비도대전(摩利支飛刀對箭)> 이라는 원나라 시기의 잡극에 나오는 대사의 한 부분이다. 연개소문은 스스로를 문무를 겸비한 대고구려의 장군으로 당당히 내세운다.

중원의 오랜 분열과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국가를 이룩한 수나라는 동북아의 지배권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군사력을 키워나가면서 요서지방까지 출정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려하자 수나라는 이를 참을 수 없었다. 국운을 건 수차례에 걸친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고구려를 정벌하지 못하고 건국 38년 만에 망하고 만다.

이어서 건국된 당나라 역시 고구려의 패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화려했던 시기로 꼽히는 당태종은 주변 군소 국가들을 정복하며 영토를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이 가혹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고구려만이 요동의 패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로 뻗어나가려는 고구려를 제거하지 않으면 동북아의 절대 패권은 없었다. 동북아의 패권을 건 한판 승부는 피해갈 수 없는 두 나라의 운명이었다.

고구려의 기상과 만주 벌판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 연개소문은 뜨거운 설렘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인물이다. 그러나 그 설렘만큼 남아있는 사료는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너무도 빈약한 자료들뿐이다. 그나마 <삼국사기>를 비롯한 몇몇 사료들이 전하는 연개소문은 상당히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중국 역사 속에 상당한 충격으로 각인되어 전설적 영웅으로 신비화되고 또 한편으로 왜곡되면서 전해져 내려왔다. 시대가 변하면서 그 내용을 담아내는 형식과 틀은 바뀌었지만 당나라 이후 원, 송, 명, 청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근래까지도 연개소문을 주제로 한 여러 형식의 희극과 경극들이 공연되었다. 소설과 잡극, 평화, 사화, 연의, 경극 등 여러 장르로 발전하면서 연개소문은 당태종과 설인귀의 맞수로 등장한다.

이러한 민간 설화들은 정식 역사는 아니지만, 어떤 때는 정사(正史)보다도 더욱 진실성을 내포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보태지고 변형되지만, 기본 줄거리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연개소문에 관한 부족한 사료들을 보완해주는 측면도 있다.

영원한 맞수들의 전설 - 연개소문과 당태종 그리고 설인귀

▲ 당태종이 배를 타고 요동으로 향하고 있다.
ⓒ <당설인귀과해정료고사>삽화
중국인들에게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기억되어온 것은 바로 ‘위대한 당태종’ 을 철저히 패배시킨 장군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당태종과 연개소문과의 이 전쟁은 역사가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설가들이 즐겨 쓰는 주제가 되었다.

당나라 유속(劉餗)의 소설 <수당가화(隋唐嘉話)>를 비롯하여 당태종의 고구려 정벌을 담은 많은 전설들이 전해졌다. 이 전쟁이 얼마나 두 나라의 운명과 두 영웅의 자존심을 건 전쟁이었나를 말해주는 것이다.

당태종의 요동 정벌 실패는 그 상처를 달래기 위해 설인귀라는 장군을 영웅으로 만들게 된다. 설인귀(613-683)는 원래 산시성 평민출신으로 32살에 출전한 고구려 전에서 패배했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난 2년 뒤인 668년 평양성을 함락시킨 인물이다. 민간설화에서는 궁지에 몰린 당 태종을 극적으로 구출하는 영웅으로 연개소문의 적수로 항상 등장한다. 설화는 주로 당 태종의 치욕스런 패배에 대한 보상심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중국 설화 속 연개소문은 위대한 인물로서의 이미지가 그 기조를 이루며, 결코 혐오스럽거나 추악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당태종에 감히 반기를 든 역적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또한 두려움 없는 용맹성이 그려지면서 이는 태종의 초라하고 무능한 모습과 대조된다. 민중의 압박자에 대한 풍자와 함께 용감한 반항자에 대한 동정과 경외심을 반영한다.

송과 원나라 시기 유행한 평화(平話, 노래와 이야기가 어울린 민간문학) <설인귀 정료사략(薛仁貴征遼事略)> 에서 연개소문은 백제 사신인 창흑비 앞에서 태종을 풍자하는 시를 읊는다.

앞 궁전에서 형제를 죽이고, 후궁에는 아비를 가두었구나,
장수는 늙고 병사는 자만하니, 감히 무슨 일을 하겠는가?
殺兄前殿, 囚父后宮. 將老兵驕, 不堪成事?


당태종 개인의 치부인 궁중의 비밀을 폭로하면서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명나라 장편희곡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는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내 앞에 투항한다면 내 친히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네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호령한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장면은 이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인데, 당태종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궁에 처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흙을 잡아 향으로 삼아 기도드리니 용의 신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내 당의 강산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너를 황제를 시켜주고 내가 신하가 되겠노라.”

여기에 나타난 당태종은 ‘천자’의 이미지는 간데없고 무능하고 겁에 질린 황제의 모습이다. 이는 민간문학을 통하여 통치계급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당나라군이 퇴각한 경로는 요하 하구 쪽인데, 이곳은 늪지대가 많아서 이동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요하 하류는 지금도 비만 오면 물이 넘치는 늪지대이다. 이 험난한 길을 돌아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완전한 패배를 당하여 도망갈 길 조차도 마련하기가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지난 1967년 상하이 자딩현 선성 명왕조(1471-1478) 묘에서 발굴된 설창사화 <당설인귀과해정료고사(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에는 이러한 전투장면을 그린 삽화들이 있다. 그리고 남송 말기에 작성돼 현재 영국 옥스퍼드대학에 소장중인 <설인귀정료사략>에는 연개소문이 설인귀에게 생포돼 참수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 경극에 사용된 연개소문 가면
ⓒ 김성남
민간 설화 속에서 두 영웅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은 칼(飛刀)과 화살(神箭), 그리고 붉은 옷(紅袍)과 흰옷(白袍)이다. 연개소문은 칼과 붉은 도포로, 설인귀는 활과 백색 도포로 형상화되어있다.

설인귀의 백색은 용감하고 선량한 평민 영웅을 상징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이미지인 붉은 색은 피와 살기를 의미하며 재난과 혈전을 상징한다. 전쟁을 일으킨 쪽은 선량한 영웅이요, 방어전쟁을 한 자는 피와 살기를 덮어썼다.

또 다른 이미지는 청룡과 백호이다. 연개소문은 청룡, 설인귀는 백호의 형상을 갖는다. 청룡과 백호는 중국에서 동쪽과 서쪽의 방위를 대표하는 형상이다. 청룡의 이미지로 동방의 영웅 연개소문에게 천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지만, 결코 요동의 패권을 인정할 수는 없기에 연개소문을 당에 반기를 든 역적의 이미지로 덧칠한다.

이렇게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이야기는 130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평화, 잡극, 희곡, 경극 등 모든 장르에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중국의 희극과 경극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악비(岳飛) 이야기와 버금가는 수준이다.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나라를 압박했을 때 전쟁을 주장한 인물이 악비이다. 그와 함께 설인귀가 오랜 세월 영웅으로 추대된 것은 그만큼 요동지방 지배세력에 대한 한족(漢族)의 두려움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악비는 구국의 영웅으로, 여진족과의 전쟁을 반대한 인물 진회(秦檜)는 천하의 역적으로 미움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수민족 역사를 모두 중국사로 끌어안기 위해 진회의 명예회복을 진행하고 있으니, 이제 연개소문도 중국인이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가?

644년 당 태종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긴 연개소문이란 존재는 이렇게 1949년 이전까지 중국 문화 속에 살아 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건국이후 북한 정부에서 이 경극들에 대해 조선민족의 영웅인 연개소문을 패자로 만들어 비하시키고 국가 간의 단결을 저해한다는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이에 중국 문화부에서 ‘상연금지문건’을 발표하여 ‘우호 국가를 자극하는 공연’ 등에 대한 금지조처를 취하면서 연개소문을 소재로 한 극들이 더 이상 상연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맞으면서 전통 경극이 봉건주의 사상을 숭배하고 정치적 사상이 나쁘다하여 완전히 금지되고, 경극 배우들이 일대 수난을 당한다. 몇 년 전 한국에도 소개된 적이 있는 <패왕별희>라는 중국 영화를 본 독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경극 배우들이 당한 수난에 대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혁명 기간에는 정치선전극 만을 제작 공연하게 하여 중국의 전통 문화의 맥이 거의 끊기었다. 최근 들어 중국정부가 정책적으로 경극을 다시 부활시키려 많은 지원을 하고 있지만 대중들과 거리는 이미 멀어져 있다.

지금 TV 방송에서는 고구려 바람이 불고 있다. 고구려 건국의 <주몽>에서 멸망과 발해건국을 다룬 <대조영>까지. 역사 자체가 전쟁이고, 생존 자체가 전쟁이었던 나라!

666년 연개소문이 죽은 후 고구려는 2년을 버티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고, 보장왕과 귀족 포로 20여만 명과 수많은 백성들이 중국 전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고구려는 21세기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인가?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여전히 우리에게 가혹하다. 냉혹한 동북아의 국제질서 속에서 반역의 죄를 범해야만 했던 연개소문의 고뇌와 그 야망을 같이 나눌 수 있는 감동의 드라마를 보고 싶다.

태그:#연개소문, #고구려, #당태종, #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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