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 그녀

지금 그녀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녀를 닮은 딸이 있을까? 있다면, 예전의 그녀처럼 고결한 모습과 맑은 눈망울의 여인이 되었을까?

우습게도 나의 독서편력은 한 여자(앞에 말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한 수레의 책마저 접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분명 그랬으리라.

내가 고1 때 그녀는 고2. 그녀는 교회의 선배였다. 내가 그녀에게 기운 데는 그녀의 차분하고 품위있는 모습뿐 아니라 예배 후에 귀가방향이 같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연상의 여인'과 사귀는 일이 흔하지 않던 때라, 나를 동생으로 여기는 그녀를 대하면서 가슴만 끙끙 앓는 신세였다.

어느 겨울날, 성가대의 성탄절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그녀가 생강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는 말에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녀의 작은 방에 앉는 순간, 나는 그녀가 저만큼 높은 곳에 있다고 느꼈다. 그녀의 작은 책꽂이에는 내가 보지 못했던 책들이 빽빽이 꽂혀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거리감, 열등감, 낭패감 이런 것들에 뒤엉켜 그날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 문학사상사
나는 그 다음 날로 미아리 고개에 있는 헌책방 가를 뒤져서 그녀의 책꽂이에서 봤던 책들을 구입했다. <흙속에 저 바람속에>(이어령) <세노야 세노야>(고은), <사랑의 기술>(에릭 프롬) 뭐 이런 책들이었는데, 아무튼 그날 나는 한 달치 용돈의 반을 아낌없이 투자해서 한 보따리의 책을 구입했다. 그 후로 한 달간은 그 책들을 읽는 데만 집중했다. 좋은 구절은 줄을 그어가면서 외우려고 했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그녀와 나눌 대화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달 후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략적 독서'를 계속했다. 물론 그녀와의 대화에서 내가 이러이러한 책은 이미 읽은 사람이라는 티를 가끔 내면서.

큰돈이 생기는 날은 미아리 고개로 가서 책을 한 보따리 사고 한 달 내내 그 책을 읽어댔으니 참으로 무지막지한 독서였다. 두어 달이 지나서 그녀의 책꽂이에 있는 책의 범위를 넘어서자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 뾰족한 대책이 없던 나는 책의 일부분을 읽어보기도 하고, 책방 주인에게 묻기도 하면서 '전략서적'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하고 청년회에 들어간 그녀는 고등학생인 나와 다른 시간표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어른'이었고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시간표는 변함이 없었다. 돈이 생기면 미아리 고개로 달려갔고, 한 달 내내 책을 읽었다.(나는 신학대를 가려고 했기 때문에 학과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책을 고르는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는 점과 그녀에게 과시하기 위한 독서에서 지식과 감성에 대한 갈증을 채우기 위한 독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물론 내 취향과 수준에 맞는 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녀가 빠져나간 자리에 김은국의 실존주의가 들어섰고, 함석헌이 들어섰다. 그녀 대신 전혜린을 사랑하게 되었고, 고은의 가공인물인 '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내 마음에서 빠져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큰 스승은 그렇게 여인의 모습을 하고 나타났었다.

2. 미아리 고개 헌책방

집이 의정부였고, 연지동(종로5가 부근)에 있는 동대부고를 다녔던 탓으로, 나는 동대문 헌책방가보다는 미아리 고개에 있는 헌책방가에 익숙해져 있었다. 당시에도 미아리 고개 삼선교 쪽은 점을 보는 집이 많았었고, 오르막에 호떡집이 한군데 있었다. 헌책방은 고개 정상을 전후로 십여 군데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새책 값에 비해 헌책 값이 비싼 편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오십원에서 칠팔십원, 잡지의 단행본 부록은 이십원 정도였으니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미군부대 주변에 살던 나는 돈을 버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김치를 얻으러 오는 카투사 형들을 포섭해서 한 달에 한번 나오는 레이션박스를 오십여개씩 받아 팔았고, 가끔은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구지띠기'라 불리는 물건도 헐값에 후려쳐서 사서는 조금씩 '나까마'(중간상인) 아줌마에게 넘겼다. 고등학생으로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굴리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무지막지하게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헌책 구입에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리의 헌책방 가에 들르는 횟수가 거듭함에 따라 책을 싸게 사는 요령이나 책방 주인과의 흥정방법도 늘었다. 두 곳은 외상 거래까지 가능했는데(헌책방에서 외상거래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어린 녀석이 설마 떼먹으랴 하는 믿음도 있었겠지만, 물 좋은 구매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문학 전집이 들어와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무들 비탈에 서다>나 <25시>는 하루 반나절이면 읽어 젖혔다. 때로는 건방을 떨어보느라 평론집을 집어들기도 했다. 홍기삼과 김현을 읽은 것이 그때였다. 소장하기 위한 구입도 있었다.

<현대문학> 창간호와 2호를, 당시로서는 거금인 칠천원에 구입했다가, 소설을 쓰는 국어선생님이 그 책을 모으는 것을 알고 졸업 때 선물로 드렸던 기억도 있다. 소설을 쓰는 남편과 시를 쓰는 부인이 시와 단편소설을 묶어 <어떤 전설>이라는 촌스런 이름으로 낸 책을 흥미롭게 봤는데, 나중에 보니 그 남편이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씨였다. 누군지 모르고 막연히 집어든 시집에서 강은교의 허무와 김지하의 운율도 받아들였다.

ⓒ 향연
하지만 나를 지배한 것은 고은이었다. 시집은 한 권도 못 본채, <세노야 세노야>, 같은 그의 수필집에 심취해 있던 나로서는 그 후 상당기간을 그의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고은은 길지 않은 승려생활에서의 환속과 그의 성장기 유랑 정서를 쏟아놓고 있었다.

고은이 쓴 <50년대>나 <이중섭평전>을 읽을 때만 해도 그것이 50년대나 이중섭을 쓴 것이 아니라 고은 자신을 쓴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그저 고은의 늪에 빠져들어 갔다. (후에 그가 전태일의 분신과 동일방직 사건을 통해 반독재 전선에 나섰을 때, 그의 변화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전혜린의 냄새를 맡겠다고 학칙과 주변의 눈총을 무시한 채 들락거렸던 학림다실에서 펴든 책도, 문리대생들이 보면 웃었을 법한 고은의 에세이였다.

고은의 늪은 나의 시 습작기를 고은의 아류로 만들었다. 어느 날, 내 방의 도배를 마치고 담담한 심정으로 시 한 편을 써놓고서는 그를 벗어난 것을 느꼈는데, 그때는 목회자의 꿈을 접고 재수를 거쳐 동국대에 들어간 지 일 년이 지난 후였다.

덧붙이는 글 | 지금 생각해봐도 삼십 삼사년 전 책에 빠질 그 때를 생각하면 놀랍기만 합니다.

<당신의 책,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