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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들고 온 '비밀과 거짓말'. 공부하듯 이 책을 읽은 오빠의 주석(?)이 책 여기저기에 보인다.
ⓒ 한나영

"은희경이 온다는데 가 볼래?"
"…."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유명 작가인 은희경이 온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

"얘들아, 너희들이 은희경을 잘 몰라서 그래. 그 아줌마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데…. 학교에 가서 은희경 만나고 왔다고 해 봐. 아니,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 가면 네 친구들은 뭘 모르니 반응이 없겠지만 아마 너희 선생님은 부러워할 걸?"

엄마는 신이 나서 떠들어대지만 아이들은 유명 연예인도 아닌 유명 작가라는 사실에 여전히 반응이 신통찮다.

그러니까 몇 년 전의 일이었던가. 지금은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을 때니 아마도 7∼8년 전쯤의 일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대전 유성도서관 게시판에서 눈에 띄는 안내문을 보게 되었다. '작가와의 만남'을 알리는 게시문이었다. 거기에는 당시 온갖 문학상을 휩쓸고 있던 은희경의 이름 석자가 적혀 있었다.

'은희경이라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이상문학상, 동서문학상 등 이름 있는 문학상을 다 받으며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은희경이 온다고?'

아이들에게 은희경을 보러 가자고 했다. 가서 강연도 듣고 스타 작가인 은희경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사인도 받자고 했다. 물론 은희경의 사인은 100% 보장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엄마 친구니까.

하지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엄마의 흥분과는 달리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들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전화 한 번 받은 적 없는 아줌마가 어떻게 엄마 친구가 되는지 그것도 의심하는 눈치였다. 말하자면 그 친구가 유명하다니까 엄마가 애써 '친구'라고 주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말이다.

"얘, 오래 동안 연락이 없어도 한 번 친구면 영원한 친구인 거지. (이건 뭐 해병대 버전인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엄마가 말 안 했어? 은희경이랑은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말이야."

은희경 시와 엄마 시가 나란히 실렸었다니까

지금은 그 제목도 기억이 안 나는 어설픈 시 한 편을 교지 편집부에 보낸 적이 있었다. 크게 고민하면서 썼던 작품이 아니어서 내심 기대도 안 했던 시였다. 그런데 나중에 교지를 받아보니 내가 쓴 시가 교지에 당당히(?)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같은 반이었던 은희경의 시가 실려 있었다.

사실 은희경은 등단할 때 소설가로 이름을 올렸고 지금도 소설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언젠가 본인이 고백했듯이 시도 잘 쓰는 시인이었다. 나는 그녀가 쓴 투명한 감성의 시를 읽으면서 그녀의 문학적인 감수성과 재능을 감탄하고 부러워하고 시샘을 하기도 했었다.

하여간 은희경은 나와는 중·고등학교 동창이었지만 400명이 넘는 많은 동창 가운데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 그런 동창은 아니었다. 사실은 나와 같은 날, 같은 중학교로 전학을 온 '전학 동창'이기도 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중학교 교무실의 한 장면이다.

단발머리 소녀였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을 마친 뒤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어느 날, 전학 수속을 밟기 위해 교무부장 앞에 서 있던 내 앞으로 또 다른 단발머리 여학생이 수줍게 걸어왔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전학생이었다. 이름을 보니 은희경. 그렇게 중학교 동창으로 만났던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 때에도 같은 반으로 앞뒤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은희경은 좀 조용한 성격에 새침데기 같은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깔깔거리며 거침없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재담꾼이기도 했다. 은희경을 볼 때면 수평선 너머 어디 먼 데를 동경하는, 혹은 순정만화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몽롱한 꿈을 꾸는 소녀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게 모두 내공이 깊은 작가 지망생의 독특한 상상력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여간 은희경은 유려한 말씨는 아니었지만 끊일 듯 이어지는 이야기꾼의 기질을 그 때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서로의 길이 달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친구였다. 그러니 애들 말도 틀린 건 아닐지 모른다.

"은희경이 유명하다니까 엄마 혼자서 친구라고 주장하는 거지, 정작 은희경은 우리 엄마를 모를지도…."

과연 그럴까. 은희경은 정말 나를 모를까.

그 사이에 은희경은 스타 작가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 스타와 더불어 학창시절을 보냈었노라고 스타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어쩌다 은희경의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은희경의 친구였었노라고 말했으니까) 평범한 아낙이 되었는데 은희경은 정말 나를 모를까.

은희경은 정말 나를 모를까

스타가 된 은희경의 문학 강연회에 가는 내 발걸음은 설랬다. 그리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마치 출세한 제자를 만나러 가는 옛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그리 큰 기대를 안 했다.

왜냐하면 은희경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녀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고, 문학에 대한 그녀의 사유나 기타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 역시 이미 신문이나 여성지 등을 통해 많이 접했기 때문이었다.

기대를 했던 것은 풋풋한 10대의 그 시절이 다시 생각날 수도 있고, 나도 모르는 추억의 한 장면이 어쩌면 그녀를 통해 새록새록 솟아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억지 춘향이로 엄마를 따라 온 아이들은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하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스타도 스타 나름이지 문학이라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수준 있게 들려줄 스타 작가의 이야기가 뭐 그리 감동적이겠는가 말이다.

하여간 우리 모녀는 이런 동상이몽을 가지고 강연회에 참석했다. 많은 팬들이 참석한 그 자리에서 은희경은 자신의 창작활동의 모판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았다.

그녀는 벽장 속에 감춰진 삼촌의 연애소설을 몰래 읽으며 어른들의 성을 상상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고, 초등학교 때부터 읽었던 엄청난 양의 독서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평소 엄마가 강조하던 독서의 중요성을 유명 작가의 입을 통해 다시 듣게 된 아이들에게 "거 봐라. 엄마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지?"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아이들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아뿔싸, 작은애는 고개를 떨군 채 자고 있었다. 큰 애 역시 별 흥미를 못 느낀 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지루한 강연회에 억지로 자신들을 끌고 온 엄마에 대한 원망의 눈빛이 가득했다. 나만 좋았던 강연회였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독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그냥 집에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은희경이 진짜 친구인지 확인도 시켜줘야 했고, 이미 약속했던 사인도 받게 해 줘야 했기에 아이들과 함께 은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희경, 오랜만이야. 반갑다."
"어머, 한나영. 너 여기 사니?"

지나간 세월에 대한 흔적을 잠시 더듬다 은희경이 내게 물었다.

"그래, 넌 지금 뭐하고 있니?"

대학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은희경은 잊고 있던 추억의 한 자락을 내게 끄집어냈다.

"그래, 너 영어 좋아했었지. 1학년 때 영어 선생님이 펄벅의 <대지>가 영어로 뭐냐고 물었을 때 너 혼자 대답했잖아. 'The Good Earth'라고."

케케묵은 학창 시절을 잠시 나눈 뒤 나는 갈 길 바쁜 친구를 보내야 했다. 헤어지면서 유명 작가인 은희경에게 아이들을 위해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은희경은 사인회에 이골난 스타답게 아이들의 이름을 묻더니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렇게 적었다.

주연, 찬미 만나서 반갑다.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엄마 친구 은희경.
(그 사인은 지금 아이들의 추억앨범에 보존되어 있다. 미국에 있어서 보여줄 수 없는 게 유감이다.)

'거 봐라, 얘들아. 은희경이 엄마 친구인 거 맞지?'

아이들은 이 사인을 학교에 가져가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지?

"어머, 너의 엄마가 은희경 친구였어? 부럽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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