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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궁 터에는 어인 일로 갔더냐?"
"나당 연합군에 무참히 죽어가던 궁녀들의 혼이 부르면 가끔 찾아가는 곳입니다."

양녕은 가슴이 뜨끔했다. 한낱 무지렁이로만 여겨지던 백성들의 가슴에 고구려의 혼이 살아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도 양반이랍시고 '애햄' 헛기침하며 팔자걸음을 걷고 다니는 선비나 사대부가 아니라 아녀자의 가슴에 고구려가 살아 있다니 충격적인 일이었다.

"남녀는 유별한데 아녀자의 몸으로 이 야심한 밤에 남정네의 방은 어인일로 들어왔는고? 그래, 무슨 사연이라도 있느냐?"
"나으리께서 양의 기운이 쇠한 낙조를 등에 지고 아낙을 뒤쫓아 온 것이나 아낙이 자시를 넘겨 양의 기를 찾아 나으리 방에 들러온 것은 모두가 음양의 조화라 생각하옵니다."

음은 양을 쫓고 양은 음을 쫓는 것이 만물의 이치

당돌하지만 침착한 어조다. 이제야 양녕은 머리를 끄덕였다. 풀리지 않은 의문이 풀린 것이다. 붉게 물든 노을에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앞서가던 여인이 바로 이 여인이라니. 한양에 있는 아우와 굳은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파기하고 취해도 아깝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래 올해 몇이냐?"
"네, 열아홉입니다. 하룻밤 풋사랑도 인연이라는데 나으리와 가연 맺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 다듬이 돌과 다듬이 방망이(민속발물관 소장)
ⓒ 이정근
가연(佳緣).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게 남녀 연분이라지만 그 만남을 정분으로 승화시켜 오랜 만남을 지속시키고 싶다는 염원이 배어있는 말이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눈망울이 촉촉이 젖어 있다.

"그래, 탁자위에 책이 여러 권 있던데 주역에서 무었을 배웠느냐?"

양녕이 방안에 들어올 때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교방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이었다. 거기에는 논어는 물론 중용, 시전, 주역 등 여러 권의 책이 있었다.

"천지만물은 멈추어 있는 듯 하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는 듯하지만 멈춰있다고 배웠습니다. 달은 차면 기울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사람도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그와 같은 이치라 생각하옵니다."
"오호라! 많이 배웠구나. 그래 주역 64괘중 곤괘가 상(上)에 있는 것은 무슨 연유인고?"
"우주만물은 음양의 이치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하는 바 하늘은 음의 기운을 받아 하늘이 되고 땅은 양의 기를 받아 땅이 된다는 변화의 상징으로 배웠습니다."

천지만물은 멈추어 있는 듯 하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양녕은 놀랬다. 농땡이 치느라고 비록 공부는 안했지만 11세 때 세자에 책봉되어 14년간 왕세자 교육을 받았던 몸이 아니던가. 여염집 아낙의 입에서 이러한 주역의 해석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주역을 깊이 공부했구나. 그래, 주역에서 제일 의미 깊은 대목은 어디로 보느냐?
"당돌한 말씀이오나 저 개인적으로는 위(位)라 생각하옵니다. 어떤 효의 길흉을 따지기 전에 그 효의 자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도 차면 기울고 물도 차면 넘치듯이 자신의 위보다 조금 모자란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고 생각 합니다"

양녕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했다. 어쩌면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부왕의 적장자로 태어나 왕위는 당연한 듯 하였으나 자신과 인연이 없는 왕좌(王座). 그렇다면 아우 세종이 앉아있는 왕의 자리가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조금 모자란 듯 한 현재의 이 자리가 바로 내 자리란 말인가? 양녕은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 등잔(국립중앙박물과 소장)
ⓒ 이정근
밤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빛이 쏟아져 내리고 달빛은 교교한 밤. 이 야심한 밤에 여인이 스스로 찾아들어와 겨드랑이가 깊이 파인 도련의 연분홍 항라 저고리를 벗고 모란 무늬가 은은한 갑사 치마끈을 풀며 품속으로 파고들어오니 아무리 선비의 체통이 군자의 뜻을 좇는다 해도 갈등을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지게문 사이로 새 들어오는 달빛에 여인의 우유빛 속살이 눈부시다. 귀밑머리에서 흘러내린 어깨선이 상아를 깎아 내린 듯 유난히 아름답다. 아직은 다 벗어 내리지 않았지만 치마 말기 속에 반쯤 드러난 젖가슴이 터질 듯이 솟아 있다. 호리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술을 따를 때에는 봉긋한 젖무덤이 양녕의 팔꿈치를 스친다.

"아서라, 군자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나으리 너무 하시옵니다. 흑~흑~흑~."

봉긋한 젖망울까지 풀어헤쳤던 여인이 저고리 옷고름을 여미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지게문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이 여인의 어깨 위에 푸르게 부서지며 흘러내린다. 향나무 스치던 밤바람이 일렁이며 툭 하고 밤송이 구르는 소리가 들리건만 여인의 어깨 위에 일렁이던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양녕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 연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주안상을 물리고 지필묵을 들여라."

다 마시지 못한 주안상을 치우고 붓과 벼루와 청자 빛이 영롱한 연적을 받쳐 들고 들어온 여인은 화선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의아한 눈길로 양녕이 바라보자 갑사 치마끈을 풀어 양녕대군 앞에 펼쳐놓는다.

벼루에 먹을 갈던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만 벼루에 떨어진다. 흐느낌을 감추려는 듯 여인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양녕이 붓을 들어 먹물을 찍자 속곳차림에 양녕의 방을 나서는 여인의 뒷모습이 처연하기까지 했다.

一別音容兩莫逅(일별음용양막후)
楚臺何處覓佳期(초대하처멱가기)
粧成斗屋人誰見(장성두옥인수견)
眉감深愁鏡獨知(미감심수경독지
夜月不須窺繡枕(야월불수규수침)
曉風何事捲羅유(효풍하사권라유)
庭前幸有丁香樹(정전행유정향수)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려니 대처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연지곤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만 눈 섶에 낀 수심은 거울만 알리라
달빛은 어이하여 비단 이불 엿보며 새벽바람 웬일로 휘장을 흔드는고


절창이다. 풍류남아 양녕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륜이다. 왕자로 태어나 세자의 위에 오르고 급전직하 유배의 몸이 되었던 양녕. 세자의 굴레를 벗어 던지기 위하여 대궐 하수구를 기고 미친척했던 양녕. 한마디로 산전 수전 공중전을 치른 자만이 읊을 수 있는 삶을 관조하는 노래다.

▲ 소동파의 명작 ‘후적부’를 초서체로 쓴 양녕대군의 구곡병풍. 자유분방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지덕사 소장)
ⓒ 이정근
'그대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으려니' 그렇다. 임금의 자리도 한번 이별하면 만날 길 없다. 스쳐 지나간 왕좌(王座)를 어디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고운 얼굴 누가 보리오 수심은 거울만 알리라' 왕의 형으로 팔도유람길에 나선 자신을 세상이 부러워 하지만 가슴에 맺힌 깊은 응어리는 오로지 자신만 안다는 양녕의 노래다. 흥에 겨운 양녕은 붓끝을 이어갔다.

別路香雲散(별로향운산)
離亭片月鉤(이정편월구)
可憐輾轉夜(가련전전야)
誰復慰香愁(수부위향수)

이별 길에 향기는 구름이 흩어지고
떠나는 정자 위엔 조각달만 걸렸어라
가련타 잠 못 이뤄 뒹구는 밤에
뉘 다시 그대 수심 위로해 주리


바람이 분다. 향탁에선 연향(戀香)이 타오르고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온 바람에 지촉등불이 살랑거린다. 흔들리는 불빛에 드러난 여인의 얼굴은 불그스레 물들어 있고 숨소리는 거칠어진다.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온다.

촉촉이 젖어 있는 여인의 두 눈이 스르르 감기더니만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분꽃씨 같은 여인의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떠있는 한 조각 편주(片舟)처럼 흰자위에 두둥실 떠 있다.

멍! 멍! 멍!

구름에 달 가듯이 달에 구름 가듯이 밤하늘에 흐르는 달그림자를 보고 놀랐는가? 동구 밖 물방앗간에 몰래 숨어 들어가는 아랫마을 돌쇠와 과부댁을 보고 컹컹대는가?

이때 아랫마을 개 짖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들려온다. 아궁이에 군불 지피다 남은 솔가지가 타닥거린다. 여인이 나비 등잔불을 끈다. 밤하늘엔 별이 쏟아지고 또 다시 적막이 흐른다.

▲ 구난가
ⓒ 이정근
이튿날.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내려간 휘호를 치마에 남겨두고 동창이 밝을 무렵 주막집을 나서려는데 여인이 화선지를 들이댔다. '나으리의 시상이 아직 남아 있으니' 더 써달라는 것이다. 양녕은 주저 없이 붓을 잡았다.

어렵고 어려워라/ 너도 어렵고 나도 어려워라/ 나는 머무르기 어렵고 너는 보내기가 어려워라/ 너는 남으로 내려오기 어렵고 나는 북으로 다시 찾기 어려워라/ 산적적 깊은 밤에 꿈에 보기 어렵고 노중중 세상 밖에 글 띄우기가 어려워/ 언제나 그리움에 한번 잊기가 어려웁고 이제 서로 나누이면 두 번 만남 어려우리

내일 아침 떠나려니 이 밤 새기 어렵고/ 잔 들어 이별할 제 새 이슬 먹기 어려워라/ 내 심정 안타까워 눈물 참기가 더 어렵고/ 네 노래 서글퍼서 목 아니매기 참 어려워라/ 뉘라서 말했는가 촉나라길 오르기 하늘보다 어렵다고/ 어림없는 말 이로니 오늘 이 시간의 애끓임만 못 하리

難難/ 爾難 我難/ 我留難 爾送難/ 爾南來難 我北去難 / 空山夢尋難 塞外書奇難/長相思一忘難 今相分再會難/ 明朝將別此夜難 一盃永訣此酒難/ 我能禁泣眼無淚難 爾能堪歌聲不咽難/ 誰云蜀道難於乘天難 不如今日一時難又難


이것이 그 유명한 양녕의 구난가(九難歌)다. 주막을 나선 양녕은 하염없이 걸었다. 꿈속을 거니는 것 같기도 하고 고구려에서 보내온 사자를 만난 듯하기도 했다. 대성산에 솟아오른 새아침의 햇살이 눈부시다.

초초하게 기다리던 평안감사에게 반가운 선물

이 시간. 평양감영 별체에 딸려있는 후원을 거닐던 평안감사는 초초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다. '일이 잘돼야 할 텐데…. 대군 나으리께서 눈치 채지 않아야 할 텐데…'일은 벌려놓고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안학궁 터에서 되돌아 온 견마잡이가 대군께서 주막에 하룻밤 유숙한 것까지는 보고를 들어 알 수 있으나 나이 어린 정향(丁香)이가 역할을 제대로 했을지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때였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한 필의 말이 감영으로 달려들어 왔다. 잠 못 이루며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감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 오라고 새벽에 보낸 별장이었다. 말에서 내린 그는 하얀 비단 보자기에 싼 물건을 감사에게 건네주었다. 만져보니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보자기를 풀었다. 갑사 치마였다. 얼굴을 찡그리며 치마를 펼쳐본 감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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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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