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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수십 년간 수구 매국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이익을 대변해온 <동아일보>(9월 22일 동아광장)가 강규형 명지대 교수의 입을 빌어 한국 좌파의 장래를 걱정하는 시론을 실은 것은 참으로 이례적이다.

 

강 교수는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뉴레프트'라는 생뚱맞은 이름까지 붙여주었지만 그의 주장은 오히려 그가 '레프트'라고 명명한 부분을 '라이트'로 바꿔 표현했다면 극우주의자들에게 훨씬 더 유익했을 내용들이다.

 

좋은 정책포럼과 뉴레프트

 

강 교수는 기고문에서 지난 1월 6일 출범한 '좋은 정책포럼' 창립선언문을 인용하여 "이 포럼은 기존 진보의 파산을 인정하고 대안으로서 '지속 가능한 진보' 노선을 정립한다는 희망을 피력했다"며 '진보의 파산'을 기정사실화 하며 득의했지만 이것은 '포럼'의 창립선언문을 작위적으로 해석한 '인용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정책포럼'은 지난 1월 6일 김형기, 임혁백 교수 등 지식인들이 '지속 가능한 진보'를 표방하며 출범한 포럼이다. 그들은 창립 선언문을 통해 20세기 지속 가능한 진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포럼의 선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20세기 진보의 실패'라고 지적한 부분은 전체 진보 세력의 파산을 선고한 것이 아니라, 포럼이 추구하는 노선을 제시하기 위한 진보 노선에 대한 성찰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이 포럼에서 새로운 노선이라고 주장하는 "기존의 사회민주주의와 현재의 신자유주의 모두를 넘어서는 대안적 발전 모델" 역시 아직은 방향만 존재하고 실체가 정립되지 않은 미완성의 개념이라 할 수 있고 '좋은 정책포럼'이 21세기 한국 진보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강 교수는 일개 포럼의 창립 선언문에 표현된 '진보의 실패'라는 단 두 단어를 근거로 '대한민국 전체 진보세력의 파산'으로 논리를 비약시켰다. 또한 강 교수가 비록 '편의상'이란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기존 진보세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세력을 '뉴레프트'라고 표현한 것 또한 적절하지 않다.

 

엄밀하게 말해서 '뉴레프트(new left movement, 신좌익 운동)'는 1960년대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 멕시코 등 에서 펼쳐진 학생과 지식인의 사회 변혁운동의 개념이다.

 

뉴레프트는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적 배경과 각국에서 냉전을 빌미로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다는 시대적 특성이 어우러져 과격하고 물리적인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냉전체제가 종식되면서 과격한 물리력에 의존한 사회변혁 운동은 더 이상 대중에게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워짐에 따라 소멸되어 가고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강 교수가 한국사회의 개혁을 원하는 진보세력을 뉴 레프트와 동일시하려 하는 것은 표현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혁적 진보 세력'을 '폭력적 사회 변혁운동과 동일시(identity)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개혁 세력에 반감을 느끼게 하여 대중과 진보세력을 대립시키려는 이간질로 보여진다.

 

뉴라이트 일탈에 대한 강 교수의 비겁한 침묵

 

'뉴라이트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맡고 있는 김진홍 목사는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자신들을 '뉴 라이트'라고 하고, 기존 보수를 '올드 라이트(old right)'라고 하여 뉴와 올드가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김진홍 목사는 올드라이트가 "첫째, 자신들이 지난 50년간 기득권에 길들여져 자기 혁신을 게을리 하였다. 둘째,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들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 해 내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뉴 라이트 출범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가치관 운동·문화운동·애국운동·공동체 운동 등을 요체로 지적했다.

 

김 목사의 주장에 모두 동의 할 수는 없지만 만약 뉴라이트가 김 목사의 주장 대로 부당한 기득권으로부터 탈피하여 혁신운동을 펼쳤다거나 부정부패한 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을 차별화 했다면 진보 세력에 대한 '강 교수의 충고'는 좀 더 그럴 듯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뉴라이트 출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올드 라이트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혹시 뉴라이트를 보고 올드 라이트가 개과천선을 해서?'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뉴라이트 출범은 뉴라이트의 차별화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라이트가 뉴라이트의 깃발 아래 해쳐 모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번 국회에서 통과된 사학법개정안은 사학재단의 부정과 전횡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입법이었다.

 

따라서 개정된 사학법은 교사와 학생·학부모 등 거의 모든 교육 관련자 절대 다수의 지지를 받았지만, '부정·부패한 무리들로부터의 차별화와 기득권에 대한 혁신'을 주장해 온 뉴라이트는 누구보다 앞장서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강 교수는 부당한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국정을 농단하는 이들에 대해 단 한 마디 쓴 소리를 하지 못했다.

 

어디 그뿐 인가? "지난 8·15 축전 때 행사 주최 측의 연세대 무단 진입과 관련하여 왜 진보세력이 쓴소리를 하지 못 하는가?"라고 비판하면서도 민생 법안을 볼모로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한나라당의 무책임한 행위에 대해 쓴소리 한 마디 하지 못했다.

 

또 통일부 장관을 '세작'이라거나, 태국의 군부 쿠데타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며 국민이 투표로 선택한 정권을 공공연히 부정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라이트들의 반민주 반국가적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다.

 

386 컴퓨터와 주판

 

그가 마지막으로 비교한 386급 컴퓨터와 펜티엄 급 컴퓨터의 비교론은 더욱 황당하다. 지난 80년대 이후 세계에서 종식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한국 사회에서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책임한 색깔논쟁에 근본이 있다.

 

우리 사회가 색깔 논쟁 시비로 끝없는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뒤켠에는 우리 사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빨갱이나 좌파 논리로 매도하여 물 타기 해온 군사 독재 정권의 수혜자들과 부정한 기득권 집단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강 교수가 진보세력을 386에 비교한 것은 시사적이지만 그의 표현대로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는데 80년대 후반에서 의식의 진화를 멈춘 모든 라이트(total right)의 현 주소는 전자계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판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지방화, 분권화, 세계화, 정보화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에 386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지 못 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진정한 비극은 286에도 이르지 못하는 주판세대들이 386을 구시대라고 비웃을 수 있는 무모하도록 용감한 무지(無知)에 있다.

 

한국의 모든 라이트와 때로는 아주 비겁한 강 교수에게 성서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전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남의 눈에 티끌을 탓하기 전에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보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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