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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몽(드라마 제작발표회 때 모습)
ⓒ 신광재
드라마 <주몽> 35회(19일 방영)에서 신녀 벼리하가 여미을에게 "사라졌던 삼족오(三足烏, 세발 까마귀)가 다시 보인다"며 죽은 줄로만 알았던 주몽이 살아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주몽을 삼족오와 동일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까마귀보다 강한 매와 독수리도 있는데, 하필 까마귀를 주몽과 연관시키는 이유를 잠시 살펴보자.

회화사 연구에 따르면, 중국 한(漢)나라 이후 회화(繪畵)에 월상(月像)과 일상(日像)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와 달을 모두 둥그렇게 그리다 보니, 이 둘을 다른 방식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달은 동그라미 속에 토끼나 두꺼비를 그려 넣었고, 해를 나타내는 동그라미에는 까마귀를 그렸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까마귀는 한나라 이후 태양을 상징하는 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주몽> 제작진이 주몽을 태양으로 상징하는 삼족오로 나타낸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인 것 같다.

최근 방영된 <주몽>에서 금와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이 대소가 권력을 장악했다. 앞으로 금와와 대소 세력 간에 권력을 둘러싼 암투와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주몽도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졸본으로 내려가 비류수가에 고구려를 세우고 대소나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다.

주몽과 대소의 전쟁은 없었다

이러한 드라마 분위기처럼 역사에서도 주몽과 대소는 전쟁을 벌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왕 주몽과 부여왕 대소의 전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지난 번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명성왕(주몽) 14년(B.C. 24년) 8월까지 부여왕은 여전히 금와였다. 따라서 고구려 건국 후에도 이 시기까지는 고구려와 부여는 적대적이기보다는 우호적인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동명성왕 14년,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부인(고구려 건국 후에도 부여에 남아있었다)이 세상을 떠났을 때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 제사지내자 동명성왕이 사신을 파견해 감사의 뜻을 전한 것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부여왕' 대소가 사서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 14년(B.C. 6년). 금와가 대소에게 부여왕 자리를 넘겨준 시기는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서에 금와의 정확한 사망 시기나 양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동명성왕 19년(B.C. 19년) 4월에 "유리가 그 어머니(예씨부인)와 함께 부여에서 도망해 오니 왕은 기뻐하며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이 시점을 전후해 금와가 죽고 주몽에게 적대적이던 대소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이처럼 금와가 건재했던 때와 대소가 부여왕으로 등장한 때 사이엔 18년의 공백이 있다. 동명성왕은 유리가 부여에서 고구려로 온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향년 40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편에 따르면, 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신생국가였지만 군사력을 증대해 정복전쟁에 나선다. 동명성왕은 19년의 재위 기간 동안 정복 전쟁을 두 차례 치렀다.

동명성왕 6년(B.C. 32년) 8월, 오이와 부분노는 동명성왕의 명을 받고 태백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을 정벌했다. 드라마 <주몽>에서 나온 바로 그 행인국이다. 동명성왕 10년(B.C. 28년) 11월, 고구려는 북옥저를 정벌했다.

그러나 동명성왕은 부여와 단 한 차례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전통의 강국' 부여의 군사력이 더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금와가 부여왕으로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주몽이 대소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지라도 주몽은 대소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주몽의 손자, 대소에게 복수하다

▲ 대소(드라마 제작발표회 때 모습)
ⓒ 신광재
대소는 부여왕이 된 뒤 고구려를 침범하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유리왕 14년(B.C. 6년),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볼모 교환을 요청했다. 유리왕은 부여의 강성한 국력을 감안, 태자 도절을 보내려 했으나 도절은 두려워하며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범했다. 고구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폭설이 내려 부여군은 성과 없이 되돌아갔다.

대소는 그 후 사신 편에 붉은 까마귀를 보내고 유리왕을 꾸짖는가 하면, 호시탐탐 고구려를 노리며 군사를 보내 정벌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고구려를 압박하던 부여왕 대소를 격퇴한 인물은 주몽의 손자인 무휼(대무신왕). 22년(대무신왕 5년), 무휼은 부여를 먼저 공격했다. 이때 무휼의 휘하 장수 괴유가 부여왕 대소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주몽이 죽은 지 41년 만이다.

여기서 대소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주몽과 동갑이라 해도 80세가 넘는 나이다. 그러나 대소는 주몽보다 몇 살 위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80대 중후반의 나이로 전장에서 진두지휘했다는 이야기다. 지금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다.

대소가 죽자 금와의 막내아들(대소의 아우)이 부여 백성 백여 명을 데리고 갈사수가로 이동해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했다. 이렇게 되자, 부여는 큰 혼란에 빠졌다.

대소가 죽은 그해 7월, 대소의 사촌 동생은 부여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뒤, 만여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우리 선왕께서 돌아가시고 나라는 멸망해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어졌다. 왕의 아우는 달아나 갈사에 도읍했다. 나 또한 어질지 못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봉해 연나부(椽那部)에 두고, 낙(絡)씨 성을 내려줬다.

이처럼 대소가 전사하면서 부여는 풍비박산이 났다. 대소의 죽음은 강성한 부여의 몰락과 직결되었다. 주몽이 직접적으로 대소에게 복수하지는 못했지만, 대소를 죽이고 부여를 물리친 손자 무휼이 주몽의 한을 풀어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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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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