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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질 천불동 앞 오아시스 마을의 백양나무 가로수. 이열 종대의 눈부신 푸르름이 오히려 슬픈 것은 왜일까?
ⓒ 최성수
키질 천불동 가는 길은 온통 모래 먼지 천지다. 포장 된 사막 공로를 잘 달리던 버스가 갑자기 길을 두고 사막으로 들어선다. 이제 큰 길을 버리고 갈림길로 들어서나보다, 생각하는데 옆에 놓인 아스팔트길과 나란히 달린다. 갈림길이라면 벗어난 길에서 멀어져야 하는데, 버스는 그럴 낌새조차 없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옆에 따라오는 아스팔트길을 바라보니, 길이 군데군데 무너지고 있다. 사막의 조금 높은 둔덕에 길을 만들었는데, 지반이 약한 사막이라 둔덕에 금이 가면서 길이 무너진 것이다. 조금 지나니, 아스팔트길에서 공사를 하는 차들과 사람들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사막으로 들어선 버스는 정신없이 흔들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평한 사막이지만, 들어서면 울퉁불퉁하기 그지없다. 사막의 길 없는 곳을 달리니,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버스 옆과 뒤로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모래 먼지가 일어난다. 앞에도 차가 한 대 지나가는데, 그 차의 먼지가 휘날려 천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사방이 온통 먼지다. 인공적인 회오리바람인 셈이다. 나는 문득, 옛날 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던 대상들은 이런 모래 먼지를 만나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강원도에서 물난리를 겪은 내게 가장 무서운 것은 물이었다. 그런데 사막에 와 보니, 물은 귀하고 먼지는 무섭다. 그러니 무서움이란 어느 특정한 것이 아니라 도가 지나친 것이리라. 나는 마치 열하의 물을 하룻밤에 아홉 번 건너며 깨달음을 얻던 박지원처럼, 사막의 먼지 속에서 온갖 생각에 사로잡힌다. 역시 사막은 존재를 고민하게 하는 곳이다.

키질 천불동에서 구마라즙(鳩摩羅什)이 산다

▲ 천불동 가는 길의 소금 강 줄기. 물은 없고, 소금은 몸 뒤채며 제 몸을 햇볕에 말리고 있다.
ⓒ 최성수
그런 내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버스는 더욱 심하게 흔들린다. 그저 달리면 길이 되는 사막길을 벗어나더니, 다시 포장길을 한동안 달린다. 포장길이지만 차의 흔들림은 역시 만만치 않다. 길의 곳곳이 움푹 들어가 있다. 도로 위로도 모래 먼지가 켜켜이 내려앉아 있다.

길가의 풍경은 여전하다. 낙타풀만 듬성듬성 나 있는 황무지를 지나자, 길 가로 칼날처럼 흙이 솟아있다. 분명 색깔이나 모양은 흙인데, 오랜 세월에 닳고 닳아 날카롭게 각이 져 있는 산을 지나자, 다시 풀 한 포기 없는 산이 이어진다. 길 아래 골짜기로 마른 물길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그곳이 물길이었다는 증거는 마치 뱀이 지나간 모래처럼 물줄기의 자국이 남아있다는 것과, 하얗게 말라있는 소금뿐이다.

그런 풍경들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모래인 듯, 흙인 듯, 바위인 듯한 것들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모두는 건조하고 막막하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어디 아득하고 아득하여 세상에 다시없는 곳으로 찾아들어가는 느낌이 한참, 마침내 천불동에 도착한다. 무채색의 건조한 풍경과 극한의 대조를 이루는 키질 천불동은 작은 오아시스 마을이다.

▲ 천불동 아래 오아시스 마을. 숲과 물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서 꿈도 없는 긴 잠을 자고 싶었다.
ⓒ 최성수
모래 산 위로 천불동의 동굴들이 빛바랜 사진 속 풍경처럼 흑백으로 앉아있는데, 산 아래에는 눈부시게 푸른 백양나무가 시린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그 백양나무를 울타리로 제법 많은 양의 물이 솟아나는 호수가 있다. 호수에는 구름 몇 점 떠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시린 하늘이 들어앉아 있다. 가지 끝에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홍류와 온갖 꽃들도 군데군데 피어있다.

사막과 오아시스, 그 처연한 대조는 기쁨보다는 슬픔에 가깝다. 사막의 막막함이 오아시스의 푸르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아득하고 덧없게 만든다. 극단적 대조는 희(喜)나 락(樂)이 아니라 애(哀)나 비(悲)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인가 보다.

백양나무 숲을 배경으로, 마치 수도를 하고 있는 요기 모양의 동상이 하나 놓여 있다. 구마라즙이다.

<법화경> 비롯 많은 불경을 번역한 '구라마즙'

▲ 천불동 가는 길의 홍류 나무. 가지 끝에 피어난 붉은 꽃잎은 사막을 걸어간 옛 사람의 마음일까?
ⓒ 최성수
구마라즙은 서기 344년, 이곳 구자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의 어느 나라 재상이었는데, 나라가 망하게 되자 파미르 고원을 넘어 구자국으로 왔다. 구자국에 뿌리를 내린 그는 구자국 왕의 여동생과 결혼을 하여 구마라즙을 낳았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출가를 한 구마라즙은 아홉 살에 인도로 유학을 떠났고, 12살에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온다. 그 뒤 소륵국(지금의 카슈카르)에 가 불교를 포교하기도 하고,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와 왕의 법사가 되기도 한다.

그의 명성을 들은 전진의 왕 부견은 장군 여광(呂光)에게 명령하여 서역의 30여 나라를 정복하면서 구자국에도 쳐들어가 구마라즙을 데려오게 한다. 서기 382년, 여광은 구마라즙과 낙타 만 여 마리를 끌고 개선을 한다. 그런데 일행이 양주(凉州)에 이르렀을 때, 부견이 비수(淝水)의 싸움에서 패한 뒤 부하 요장(姚萇)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여광은 귀국을 포기하고, 양주에서 후양국(後凉國)을 세우게 되는데, 구마라즙은 이 후양국에 억류된다.

부견을 죽인 요장이 세운 나라는 후진(後秦)이었다. 요장은 여러 차례 후양국에 구마라즙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지만, 여광은 계속 거절을 한다. 393년, 요장이 죽고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왕위를 이어받는다. 그 뒤에도 후진은 계속 구마라즙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지만, 후양국은 듣지 않는다. 결국 401년에 요흥은 후양국을 쳐 항복을 받고, 구마라즙을 장안으로 모셔온다.

요흥은 자주 구마라즙의 설법을 들으며, 더욱 불심을 키워갔다. 구마라즙은 오랫동안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한문에도 통달해 있었다. 그래서 불경 번역 사업에 가장 적임자였다. 요흥은 구마라즙을 위해 초당사(草堂寺)에 불경 번역소를 설치하고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마라즙은 이 역경원에서 <법화경>을 비롯한 많은 불경 번역을 하였다.

죽기 직전, 구마라즙은 "내가 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나를 화장해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화장한 뒤에도 과연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서기 409년, 70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며, 무위(武威) 북대가(北大街) 서쪽에 구마라즙의 탑이 남아있다.

키질 천불동과 우리를 이어준 조선족 출신 화가 '한락연'

▲ 구마라즙 동상이 백양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인도, 장안까지 남아있을 그의 삶의 흔적도 사막의 바람 같은 것이었을까?
ⓒ 최성수
서역의 땅 이곳 쿠처에서 태어나 인도와 중국 내륙까지 삶의 자취를 옮겨 다녔던, 삼장법사 현장과 함께 불경 번역의 핵심의 역할을 담당했던 구마라즙의 동상은 그러나 그의 명성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수해 보인다. 그의 뒤로 하늘이 낮다 하고 솟아오른 백양나무와, 그가 토대를 닦은 구자국 이래의 불교 미술의 흔적이 남아있는 천불동만이 전설처럼 남아 그를 기억하게 한다.

키질 천불동에 들어가 본 벽화들은 대개 뜯겨지고 훼손돼 흔적만 살펴볼 수 있을 뿐이었다. 고고학자를 가장한 유럽의 약탈자들이 숱한 유물을 도굴해 갔고, 심지어 벽화는 테이프를 붙여 떼어가기까지 했으니, 남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일본의 승려 출신 오타니를 중심으로 한 탐험대도 이 키질 석굴의 유물 상당수를 도굴해 식민지 시절 우리나라에 보관했다고 한다. 패전 후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한 유물의 일부가 지금도 우리 국립박물관에 남아있다고 하니, 이 키질 천불동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키질 천불동과 우리를 이어주는 끈은 한락연이라는 조선족 출신의 화가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던 그는 지하 활동을 하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유럽의 인상주의적 화풍을 익힌 그는 귀국 후 국민당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등, 젊은 시절을 항일 운동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그 뒤 키질 천불동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돼 실크로드 미술에 대한 연구와 키질 천불동 벽화 모사, 발굴 작업 등에 선구적 업적을 보였다. 그가 없었다면 키질 천불동에 대한 예술적 연구는 한참 더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1947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생을 마친 그의 자취는 키질 천불동의 한 석굴에 글과 사진으로 남아있다.

▲ 키질 천불동의 유물은 다 약탈되고, 남은 것은 슬픈 역사의 상처들, 그리고 한락연의 안타까운 꿈 뿐이다.
ⓒ 최성수
▲ 홍류와 백양이 어울려 사막의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는 키질 천불동
ⓒ 최성수
스러져가는 사막의 동굴에 남아있는 한락연의 숨결이 아득한 거리를 거쳐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해 마음 한 편이 아릿해 진다.

견딜 수 없는 더위 속에서 땀범벅으로 돌아보는 키질 천불동 유람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천불동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다. 키질 천불동 입구 계단에 앉아 저 아래 펼쳐진 오아시스의 싱그러운 풍경을 바로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마치 아득한 별세계의 어느 땅에 내던져진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든다.

그것은 풀 한 포기 없는 시야 저 끝의 산과, 아래에 이어진 작은 오아시스의 넉넉한 푸르름의 대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아무 일도 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챙 넓은 모자 하나 쓰고 뙤약볕 아래에서 한나절쯤 앉아 나무와 풀과 물이 이룬 오아시스와 그 너머의 마른 사막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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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교사이며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사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