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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기차, 추억은 물방울처럼 솟아오르고

새벽 한 시가 되자 퍼뜩 눈이 떠진다. 곧 내려야 할 시간이 된 것을 몸이 먼저 깨달은 때문일까?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 진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은 멍한 상태다. 눈만 멀뚱하게 뜬 채로 열차 침대에 누워 사방을 휘휘 둘러본다. 아주 낯선 공간에 혼자 내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다.

▲ 우루무치에서 카슈카르 까지 가는 기차. 2층 열차다. 타클라마칸의 밤을 시간을 거슬러가듯 열차는 달려간다.
ⓒ 최성수
어제 낮 열두 시 오십 분에 우루무치를 출발한 카슈카르 행 열차는 내내 사막을 지친 낙타처럼 헉헉거리며 달려왔다. 그리고 새벽 두 시 사십 분에 내가 내려야 할 쿠처에 도착할 예정이다. 열 네 시간에 가까운 기차 여행, 그러나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단조로운 사막의 풍경에도 지칠만 할 때쯤이면 늘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온통 흑백인 것 같은 사막 풍경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색깔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검은 흙이 모여 있는 곳도 있고, 붉은 색에 가까운 흙들이 이어지는 곳도 있다. 풀 한 포기 없이 삐쭉 솟은 산도 있고, 하얗게 소금이 제 몸 말리며 물의 흔적을 증명하는 마른 개울도 있다. 낙타풀이 소똥처럼 누워있는 평원이 한없이 이어지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온통 흙빛 황무지 위로 햇살만 어찔어찔하게 내려 쪼이는 곳도 있다.

▲ 쿠처 가는 길의 막막한 사막 풍경.
ⓒ 최성수
그런 풍경조차 지칠 만하면, 거짓말처럼 백양나무 숲이 이열 종대로 뻗어 푸르름을 자랑하는 작은 오아시스 마을이 나타난다. 갑자기 흑백의 풍경들이 총천연색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이면 가슴 저 아득한 곳에서 절로 기쁨이 솟아오른다.

마치 조울증 환자처럼 순간마다 감정의 변화가 심한 것은, 이곳이 사막이기 때문이고, 내 마음이 그만큼 가라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문득 어제 우루무치 역에서의 출발 장면을 아득한 옛 일처럼 아련하게 기억해 낸다. 송곳 세울 틈조차 없이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뚫고 간신히 오른 기차는 상층과 하층이 나뉜 이층이었다. 우리 일행이 자리 잡은 곳은 일층의 4인 1실, 2층으로 가 보니 그곳은 2인 1실이었다. 여러 차례 중국 여행을 했지만, 2층으로 된 기차는 처음이다.

함께 여행을 떠난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새벽 비행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바람에 잠이 부족할텐데도, 2층 기차를 보더니 환호성이다. 어린 아이에게는 낯선 것이 두려움보다는 신비로움을 먼저 느끼게 하나보다.

자리를 잡고, 나는 창가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사막의 풍경을 그저 막막하게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막막함을 위해 이번 여행을 떠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 우루무치에서 트루판 가는 길의 염호. 숱한 세월 전, 바다의 길이었고, 오랜 세월 전, 사막의 길이었음을 저 호수는 알고 있을까?
ⓒ 최성수
우루무치를 출발한 기차는 트루판으로 들어가는 역인 대하연(大河沿)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돌아든다. 그냥 똑바로 내려가면 하미를 거쳐 돈황, 시안에 이르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돌면 쿠처를 지나 카슈카르까지 이어진다. 대하연까지 오는 사이, 염호를 지났다. 사해 다음으로 염분 농도가 높다는 염호에는 한화그룹에서 운영하는 소금 공장이 있다.

바닷물의 일곱 배나 되는 염분을 간직한 큰 호수 염호를 지나자, 그 유명한 풍력 발전소가 나타난다. 끝 간 데를 모르게 늘어선 발전기들이 느릿느릿 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을 절대 그냥 두고 보지 않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보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짠해 지기도 한다.

▲ 우루무치와 트루판 사이에 있는 풍력 발전도. 느릿느릿 돌아가는 발전기의 날개가 무섭기까지 하다.
ⓒ 최성수
그리곤 다시 한없는 모래사막과 모래 산과 황무지 벌판이 이어진다. 그리고 군데군데 작은 오아시스다. 반복되는 풍경이 그래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내가 이런 풍경들을 찾아볼 수 없는 이방에서 온 나그네이기 때문일 것이다.

▲ 쿠처 가는 길의 사막. 사막에도 산은 있다. 비록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어도...
ⓒ 최성수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거기 퀭한 눈의 지친 사내가 낯선 얼굴로 나를 건너다본다. 그 낯선 사내는 이제 막 실크로드 여행을 떠난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퍼뜩 잠결에 내내 파닥거리던 소리가 들렸던 것을 기억해 낸다. 내 위에 매달린 2층 침대의 고정 쇠가 아마도 헐거워졌는지, 기차가 흔들릴 때마다 파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런데 나는 잠결에 그 소리를 나방의 날갯짓으로 착각을 했다. 아마 잠결에 ‘저 옥색 긴 꼬리 누에나방 좀 치워’라고 위층의 아내에게 소리를 질렀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나방은 내 보리소골 집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참새만큼 큰 나방이다. 나방 치고는 모양도 고운데, 생물 전공인 우리 학교 선생 한 분이 놀러 왔다가, 아주 귀한 나방이라고, 청정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나방이라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나방은 해로운 곤충이라는 선입견을 그 말을 들으며 지우게 되었는데, 그 인상이 강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나 보다, 이렇게 아득한 사막의 길에서 그 나방을 생각한 것을 보니.

어둠 속으로 옥색 긴 꼬리 누에나방의 파닥이는 소리도 밀려가고, 어둠도 함께 밀려가고, 생의 아득한 벼랑 끝에 매달린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밀려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밀려나가는 모든 것들 너머, 아득하게 사막을 지나는 자동차의 불빛과, 어린 날의 기억처럼 오아시스 마을에 매달린 등불들이 깜박인다. 저렇게 잠 못 드는 누군가의 밤을 향해 기차는 달려가고 있는 것이리라.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늘 누군가를 향해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확한 시간에 쿠처 역에 도착한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들고 내려서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새벽 세 시가 가까운 시간, 졸듯이 흐리게 켜진 철길 가의 가로등에는, 내가 꿈결에 본 옥색 긴 꼬리 누에나방은커녕, 날벌레 한 마리조차 없다. 그제야 비로소 이곳이 사막이라는 실감이 든다.

숙소인 쿠처반점에 여장을 풀고, 여명 속에 깊은 잠에 든다. 꿈도 없이 사막의 모래처럼 팍팍한 잠이 나를 옥죄는 쿠처에서의 첫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지난 7월 말에서 8월 초 약 2주간 실크로드의 일부인 서역 북로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여행지는 우루무치-쿠처-카슈카르-우루무치-트루판-돈황입니다. 약 10여회에 걸쳐 연재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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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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