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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울 토박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스물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한 번도 서울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올 2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3년차가 되었고, 주말과 평일에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민주주의와 합리적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자본주의가 갖는 효율성의 이면에 있는 몰인간성에 대해 아이들과 이야기하기도 했고, 전쟁의 의미와 해악에 대해서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나누는 일을 통해 돈을 벌고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올 초부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평택의 미군기지확장저지 투쟁'은 하나의 화두였다. 아이들에게 말하는 민주주의나 평화의 개념 그리고 합리적인 여론 수렴과정에 있어 현실은 너무도 배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농민들이 쌀을 생산하던 땅을 미군기지 확장을 위해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 한두 번도 아니고 기지건설 때문에 주민들이 세 번째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 미군기지확장 사업을 강행하는 정부의 비인간적인 행정, 독재적이고 강압적인 국방부의 태도….

이런 것들을 보고도 나는 아이들과 함께 민주주의와 여론의 힘, 합리적 이성에 따른 판단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고 이론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서 그 보통 사람들의 소식을 보았다. 대추 초등학교 정문으로 전경과 국방부 직원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두 여성이 쇠사슬을 끊으려던 절단기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저항했다는 기사였다.

낯익은 사람들. 지난 2월에 내가 만났던 평화로움을 소망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틈이 나면 대추리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며칠씩 학원 일이 끝나면 대추리로 내려오고, 학원에 가야 하는 날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고. 그런 날들이 두어 달간 계속 되었다.

나누어서 행복한 마을, 대추리

▲ 2006년 5월 2일. 대추리 주민들은 황새울 들녁에서 마지막 건답직파(모내기를 하지않고 볍씨를 직접 마른 논에 파종하는 것)를 하였다.
ⓒ 김디온
그러면서 사람들과 논일을 나갔다. 국방부에 의해 강제로 점유된 땅이지만, 농사꾼의 땅인 그 논에 가서 나는 많은 지킴이와 농부들과 함께 볍씨와 비료를 뿌려주었다. 일은 고되었다. 그러나 직파기에 볍씨와 비료를 담아주고 잠시 쉬는 때, 그 너른 들판에 서 있을 수 있다는 일이 감사했다.

하늘도 들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왁자지껄하며 떠들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말없이 생각에 잠기었고, 어느 순간에는 영롱하고 오롯하게 밀려오는 들녘의 기운에 모두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단순한 감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그 어떤 기운.

일하는 중간 중간 막걸리 한 사발, 소주 한 잔 나누어 마실 때, 마을 어머님들께서 노인회관에서 함께 지어주신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사람의 짐을 서로 대신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볼 때, 여기 사람들은 돈이나 명예나 이후의 안락한 삶에 매달려 있는 서울 사람들과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싸움을 하는 공간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땅을 일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하는 일이며, 그 자체로 매우 영적인 활동이라고 느꼈다. 그야말로 평화를 위해 기쁘게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피곤함을 씻어주는 삶의 활력이 되었다.

그리고 종종 땅 한 뼘 한 뼘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갯벌을 메워 만들었던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일하는 사람들을 감시라도 하듯이 굉음을 내며 쫓아오고, 마을에는 국방부직원들이 주민들에게 협의매수를 종용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동안에는 아무도 우리의 삶을 방해할 수 없었다. 적어도 나의 대추리, 도두2리에 대한 사랑은 날마다 진해지고 깊어졌음을 시인한다.

잔인한 5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진실

▲ 5월 5일 이후, 철조망 안에 있는 논에 들어가지 못하는 주민들이 군인들에게 항의하고 있다.
ⓒ 김디온
그렇게 행복했던 논농사의 시간은 5월 3일 오전 작업으로 끝이 났다. 국방부는 5월 4일 새벽, 엄청난 공권력을 동원하여 대추분교를 무너뜨렸다. 아, 그때의 충격은 너무나 강력하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처참하게 찢겨나갔다.

대추리와 같은 시골마을이야 수도 없이 많을 것이고, 또한 대추분교처럼 그 마을의 역사와 시간이 묻어있는 공간도 한두 군데는 아닐 것이지만, 이토록 강압적이고 무식하고 파괴적인 순간은 내 생애에 처음이었다. 그리고 주민분들에게는 세 번째였다.

대대로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를 위로할 것도 없이, 나는 나에게 닥친 충격과 공포, 참혹한 심경과 투쟁에 대한 회의를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5월 5일에는 논에도 들어갈 수 없게 철조망이 쳐졌고, 날마다 굴착기가 논을 파헤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낮이나 밤이나 저들은 쉬지 않고 수로를 파고 철조망을 둘렀으며, 2중, 3중, 10중의 나선형 철조망이 곧 내 숨통을 조여 올 것 같았다.

어제 들어갔던 논에, 내가 씨 뿌린 논에 가볼 수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고통이었다. 수십 년간 그 땅을 직접 만들고, 날마다 논에 가서 모들과 대화하던 농부들에게는 그 자체로 형벌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곳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보고 기록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현실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생명과 평화의 땅 그리고 허브

▲ 2006년 6월, 얻어 심은 배추 모종이 이렇게 잘 자랐다.
ⓒ 김디온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은 여기서 얻어서 가꾸던 조그만 밭이었다. 밭농사 짓는 것도 몰라 물어물어, 할머니들 호미든 손길 훔쳐보며 지었던 것이었다.

서울 토박이로서, 처음엔 뭘 심어서 망치면 어쩌나 싶어 도시 생활하면서 그나마 잘 길렀던 허브들을 사와 심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쌈 거리와 배추 모종을 얻어다 심었다. 고추도 심었다. 4월에 심었던 감자도 캐 보았다. 주민분들과 함께, 철조망이 쳐지지 않은 논에 다시 씨를 뿌리고 피도 뽑았다.

그렇게 6월, 7월을 났다. 나는 요리솜씨가 늘었고, 청소하는 습관이 들었으며, 밭을 갈고 작물을 심는 시기에 관심이 많아졌다. 나이가 많으신 노인분들의 말씀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같이 고추 꼭지를 따드렸던 가게 아줌마와 친해졌다. 한 마디로 몸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8월, 나는 그동안 길러온 허브들을 수확하여, 얼마 전 개장한 대추리 역사관에서 허브차를 팔고 있다. 물론 커피랑 쌍화차도 판다. 곧 다가올 강제철거를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날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대추리에 대해 민주주의와 합리적 이성이 민중의 편을 들어준 좋은 사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을 꿈꾸며. 그렇게 폭풍의 눈처럼 고요하고 한가로운 이곳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 지킴이 김디온의 더 많은 글을 보시려면, http://blog.jinbo.net/smfla 으로 오십시오.

가옥 강제철거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대추리 도두리에는 애타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습니다. 온 생애를 들녘에 바쳐 온 늙은 농부들의 삶이 이대로 파괴된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할 것입니다.

아직 '양심의 명령'을 지킬 시간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오는 9월 24일에는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을, 사람 죽이는 전쟁기지로 만들지 않기 위한' 4차 평화대행진이 서울에서 열립니다. 황새울의 평화를 위해 힘과 뜻을 모아주십시오.

여러분을 9.24 평화대행진 ‘10만 준비위원’으로 모시고자 합니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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