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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테마여행에 참여한 분들의 기념사진
ⓒ 조창완
이번 여행의 안내자는 '옛 시와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해토 간)를 펴낸 한시연구가 강원대 김풍기 교수(국어교육학과)다. 김 교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년 전 시작한 테마여행에서 였다.

'고미숙과 떠나는 열하기행'에 수유연구실의 일원으로 동행한 김 교수는 술을 하지 못했지만 주연(酒宴)에 익숙했다. 특히, 한문은 물론이고 중국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언젠가 다시 중국 한시의 고향들을 방문하리라는 계획을 세운 가운데 근 2년 만에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창지앙의 중간 우한(武漢)에 위치한 웅장한 기세의 황허로우(黃鶴樓), 관우가 지키던 전략 요충지 징저우(荊州),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하는 풍경 명승 장자지에(張家界) 등을 둘러보는 여정이었다.

문화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 마왕뚜이 한묘에서 발굴한 의복. 형이상학적 문양이 신비롭다
ⓒ 호남성박물관
한국에서 출발한 일행과 달리 기자는 베이징에서 창사로 향했다. 그런데 활주로를 향하던 항공기가 갑자기 수리를 해야 한다며 두 시간을 지체했다. 현지에 전화해 날 두고 원래의 일정대로 추진하라는 말을 해뒀다. 창지앙의 아래인 창사는 4월 말로 접어들었음에도 25도를 웃도는 날씨다. 공항버스로 시내에 나왔다가 여행자들의 다음 기착지인 위에루슈위앤(岳麓書院)을 향했다.

그 시간에 참가자들은 후난성 박물관에 있는 마왕투이 한묘를 보고 있다. 서한(西漢 BC206~AD9)시대 장사국(長沙國) 재상의 묘군으로 확인된 마왕투이 한묘는 2200년 전의 유물이지만 그 예술적 수준과 과학적 수준은 현재에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음계를 갖춘 악기와 너무나 자연스러운 색감과 문양의 의복, 생동적이지는 않지만 독특한 인상의 목우(木偶), 정교한 칠기는 물론이고 의료요법이나 노덕경 등 문헌은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는 판단을 무색하게 한다. 여행 참가자 중에는 관련 분야를 전공한 이들도 있는데 역시 묘에 있는 부장품들을 보고 놀랐다는 말을 했다.

특히 그들의 생활용품이나 문양에는 우주나 주역의 괘사 등이 있는 것들이 적지 않다. 당시 귀족층들은 삶 속에서 천문의 위치나 세계의 흐름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기계가 만든 조악한 조형물을 갖고 사는 현대인이야 말로 더 미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도 그렇다. 주역의 괘사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에 있어서 인류가 진보했다할 근거는 무엇일까.

내가 탄 차는 상(湘)강을 지난다. 후난성의 중심도시인 창사를 지나는 상강은 후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외자로 성을 표시할 때 상(湘)자를 쓴다. 후난은 중국에서 특수한 느낌을 가진 동네다. 우선 주자, 동중서, 왕양명, 왕부지, 증국번 등은 물론이고 중국 교육의 선구자 양창제, 마오쩌둥, 류샤오치, 펑더화이, 리삐시, 주룽지 등 주요인물이 이곳 출신이다. 물론 장쩌민 시대 이후 후난성 인물의 퇴조가 눈에 띄지만 중국 철학과 군사에 있어서 최고의 인재들이 배출된 후난의 힘은 무엇일까.

그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우선 중국 철학의 근간을 만든 위에루슈위앤과 매운 맛을 좋아하는 후난 사람들의 강한 기질에 있을 것이다.

중국 지성의 고향 위에루슈위앤

▲ 위에루슈위앤의 정문. 양옆에 초나라의 자제들이 번성한다는 문귀가 걸려있다
ⓒ 조창완
위에루슈위앤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전화를 하니 참가자들이 곧 도착할 거라고 말한다. 99년 겨울에 첫 번째로 이곳에 찾은 뒤 네번째 방문이다. 개인적으로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이곳을 휠씬 좋아했던 인물이 있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될 '행자무강'(行者無疆)의 저자 위치우위(余秋雨)다. 한국에는 '천년의 정원'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산거필기'(山居筆記)에서 그는 위에루슈위앤과의 인연을 적는다.

'천년의 정원'(千年庭園)이라는 제목의 이 글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마오의 고향인 창사에서 내렸다가 우연히 이곳에 들르면서 이곳의 향취에 빠진 개인의 역사로 시작한다. 그저 서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곳에서 중국 철학의 근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지나는 이들에게 흥분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후 그는 2001년 다시금 이곳에서 진행된 지식 포럼에 첫 화자로 나간다. 후에 '지자의 목소리'(智者的聲音 湖南大學出版社 간)로도 출간된 강연에서 자신의 이름처럼 가을(秋) 비(雨) 속에 첫 소리를 내게 됨을 진정으로 감사한다며 강연을 시작한다.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에 차가 오고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이번 테마여행의 참가자는 기자를 빼고 7명으로 단촐하다. 서원의 대문을 들어서면서 강사인 김풍기 교수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중국 문학이나 철학을 공부한 이들이 이곳을 찾았을 때 감동받지 않은 이가 얼마나 될까. 이곳의 역사가 중국철학사라 할 만큼 수많은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강의하고, 토론하고, 저술을 했다.

전문(前門)과 혁희대(赫曦臺)를 지나자 김 교수가 서원의 현판에 있는 '초나라에 인재가 있어 이곳에서 강성하라'(惟楚有材,于斯为盛)라는 영련(楹聯)을 설명한다. '역발산기개세'의 항우가 한때 군사를 일으켰지만 비극적 최후를 맞았던 초나라 사람들에게 송명청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문(文)이 더욱 중요해졌다.

덕분에 주희, 왕양명, 왕부지 같은 중국 철학사의 명사들이 이곳에서 지식을 나눌 수 있었다. 대문을 지나 조금 걸으면 강당(講堂)이 나온다. 양 옆에는 주희가 쓴 '충효염절'(忠孝廉節 충효 청렴 절개)이 고고한 모습으로 학당을 지키고 있다. 위에는 '학달성천'(學達性天 배움으로 하늘의 성품에 이르다)는 강희제의 편액이 있다.

▲ 강학당 옆에 있는 정원으로 가는 단아한 길
ⓒ 조창완
강당의 왼편은 공부하던 이들이 쉬는 정원과 비각(碑閣)이, 뒤쪽은 황제들이 내린 책을 보관하던 어서루(御書樓)가, 오른쪽에는 과거 숙사로 쓰였으나 지금은 악록서원 역사 전시관이 된 곳이 있다. 전시관은 북송(北宋) 개보(開寶) 9년(976)에 담주태수(潭州太守) 주동(朱洞)이 만들었다.

김풍기 교수는 이곳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철학계를 흔든 이학(理學)과 심학(心學)의 세계를 풀어낸다. 이학은 정이(程頤1033~1107)의 학문을 이어받아 주희가 완성한 정주학으로 조선조 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이다. 주희는 당시 위에루슈위앤에서 장식(張栻)과 사상교류를 했는데 당시에 그 토론을 들으러 온 많은 이들로 인해 연못의 물이 마를 정도라는 과장이 있을 정도였다. 장식은 젊은 나이에 죽고 나중에 주희가 호남의 안무사(按撫使)가 되어 부임하면서 서원을 대대적으로 진흥시켰다.

심학은 왕양명을 통해 완성된 학문 체계이다. 왕양명 역시 이 서원에서 강학과 연구를 통해서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김풍기 교수는 강화학파 등을 통해서 연구되다가 억압받고, 나중에 정인보 선생에 의해서 정리된 우리 심학(일명 양명학파)의 불운을 정리해 준다.

사회주의 정신적 기초도 다진 곳

▲ 서원 전시관에서 역사를 설명하는 김풍기 교수.
ⓒ 조창완
전시관을 보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가이드에게서 전화가 온다. 뭔 구경을 그렇게 오래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일반 여행객이 30분이면 충분한 곳을 2시간 넘게 다니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

사회주의 철학의 선도자로 추앙받는 왕부지(王夫之 1619.10.7~1692.2.18)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강학했는데 그의 사상 체계는 유교를 근간으로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교의 인식론을 비판적으로 섭취했다. 특히 그리스도교와 유럽의 근대과학까지 접근한 사상가로 이탁오와 더불어 가장 개혁적인 사상가다.

후에 풍우란에 필적한 중국철학사를 쓴 임계유는 왕부지를 중국 유물주의 철학의 선도자로 평가했다. 마오 역시 독특한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과정에서 위에루슈위앤의 경험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특히 마오는 이곳에서 그의 초반기 정신적 스승이자 장인인 양창제도 이곳에서 만났다.

마오를 시작으로 류샤오치, 펑더화이, 린삐시 같은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선도자들이 나왔다.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제오강정'題烏江亭)에서 항우(項羽)의 자살을 애석히 생각해 "승패는 병가도 기약하지 못한다. 부끄러움을 안고 치욕을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다. 강동의 자제 중에는 뛰어난 인물도 많은데, 다시 힘을 얻어 쳐들어왔으면 결과를 알 수 없었을 것을"(勝敗兵家事不期 包羞忍恥是男兒 江東子弟多才俊 捲土重來未可知)라고 노래한지 1100년 만에 강동의 자제들이 힘을 낸 것이다.

그밖에도 양수달(楊樹達), 정잠(程潛), 도주(陶澍), 양수인(楊守仁), 좌종당(左宗棠), 증국번(曾國藩), 증국전(曾國荃), 이원도(李元度), 피석단(皮錫瑞) 등 수 많은 인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공자를 모신 대성전을 보고 가운데 통로를 통해서 밖으로 나왔다. 전문에서 가장 뒷 건물인 어서루까지는 길게 잡아야 100미터 남짓인 것 같다. 하지만 그 길을 통해 송나라 이후 중국 유교 철학의 대부분이 지나갔다.

거기에 위에루슈위앤을 안은 위에루산(岳麓山)은 원래 중국 유학의 고향이지만 원래는 도사(道士)들이 도관을 세우고, 도학을 펼치던 곳이니 중국 사상의 전시장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다시 상강의 줄기를 따라 숙소로 향했다. 참가자들이 모두 모여 간단한 음식에 바이주(白酒) 잔을 돌렸다. 문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까지 어울려서 담박한 대화를 나눈다. 정치적 색채가 같지 않지만 그걸 고집하기 보다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럽다. 내일부터는 창사를 떠나 먼 길을 가야 하기에 좀 일찍 자리를 파했다. 테마여행 첫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서원 내부의 단아한 모습. 과거 숙소로 쓰이다가 이제는 전시관과 연구소 등으로 쓰인다.
ⓒ 조창완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알자여행(www.aljatour.com) 4월 테마여행의 기록으로 5회로 연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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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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