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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책이 무척 비싼 물건이어서 집 한 채를 팔아 고작 6~7권을 살 수 있는 정도였기에 신의 축복을 받은 특권층만이 책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책은 한편으로 사치품이었으며 읽는 목적을 떠나 특정 개인의 신분과 부를 상징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특별한 목적 외에는 보관가치를 크게 두지 않으며, 이젠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이 책과 친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그야말로 책이 넘치는 시대가 되었다.

몇 년 전, 인터넷의 빠른 보급과 함께 전자북이 선보이면서 종이책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염려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책들은 얼마나 꿋꿋한가? 인터넷의 위세에 눌려 사라지기는커녕 인터넷의 무한한 정보 중에서 필요한 것만을 흡수, 고단수로 진화하고 있다.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신간으로 만나는 책들 중에는 '모 사이트에서 자료 출처'라는 각주(별도설명)가 많이 보인다. 시대에 맞게 발 빠르게 진화하는 책을 볼 수 있음이 무척 반갑다고 할까?

그렇다면 책이 언제부터 우리에게 오기 시작하였을까? 책은 어떤 역사를 걸어왔고 어떤 과정으로 진화하였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늘 궁금한 이야기였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는 지난날 책값이 턱없이 비싸서 책의 원래 목적을 벗어난 중세의 책 이야기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네모 반듯한 책의 모습의 기원이 되고 있는 코덱스(codex) 출현부터 중국에서 105년에 발명된 종이가 유럽으로 전파, 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이 대량생산(?) 되기 이전까지의 이야기다.

책의 모든 역사도, 전 세계의 책의 역사도 아닌 성경 제작이 활발하던 중세유럽의 한 시기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다.

신구약 성경 제작에 양 200마리 동원?

▲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앞표지
ⓒ 마티
고대에는 밀랍으로 칠한 목판이나 점토판 또는 나무껍질처럼 비교적 편편한 것이라면 어느 것에나 글씨를 적었다. 중국에서는 비단 피륙에,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에 무언가를 적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래 보관하기에는 부적합하였고 성경처럼 귀중한 내용은 양피지처럼 값비싼 것에 적을 수밖에 없었다. 코덱스의 출현과 함께 수도원을 중심으로 성경 제작이 활발하면서 수서본의 화려한 시대가 열린다.

양피지는 특성상 턱없이 비쌌다. 따라서 양피지를 이용하여 무엇을 적는다는 것은 사회특권층에서만 가능하였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니 대량생산도 불가능한 일, 그렇다 보니 다른 책을 보고 일일이 베껴 쓰는 필사만이 책을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몇 개월에서 몇 년간에 걸친 필사는 힘든 작업이었다. 말 그대로 밭갈이에 비유됐다.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참회의 방법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필사하였는가'로 천국으로 가는 길을 계산하기도 하였다나.

책을 제작하고자 주문을 의뢰하는 수도사나 사회 특권층도, 책에 직접적인 공력을 들이는 필경사와 채색사도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 즉 신의 뜻으로 사는 세상은 신의 손가락에 의해 쓰인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상은 오직 그야말로 신의 뜻을 대신해 만든 한 권의 책이었다.

대부분 수도사가 성경 제작에 주력, '어떤 성경을 얼마만큼 소장하고 있는가?'로 수도원의 명성을 얻은 것에 비해 귀족층에서는 성경은 물론 기사의 무용담 등을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였는데, 화려한 책을 얼마만큼 소장했나에 따라 신분의 위상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책은 지나치게 부린 기교와 화려함으로 어떤 글씨인지 분별조차 힘들었다. 심장모양이나 특정가문을 상징하는 백합 꽃잎 모양 등의 책도 제작되기 일쑤였다. 책의 본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예사였다.

중세, 그 당시에 책을 소유하는 것은 대단한 부자나 특권층만이 가능했다. 내용을 막론하고 책이 턱없이 비싼 물건이다 보니 도둑도 자연스레 생겨났다. 심지어는 책에 쇠사슬과 자물쇠까지 설치하게 된다. 그럼 이렇게 비싼 책들이 어떻게 대중에게 가까이 걸어오기 시작하였을까?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는 이런 과정과 화려한 '수서본'을 둘러싼 일화들을 풍성한 사진과 함께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서양의 문화와 책의 역사는 성경과 함께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책에 해당하는 대부분 이야기가 성경 이야기다. 당시 책의 주종을 이루는 것이 성경이었기 때문이고 수도원과 수도사를 중심으로 대부분 책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만들어 내는데 어느 정도의 양피지가 들었을까?

고대에는 비교적 구하기 쉽고 값싼 파피루스로 두루마리 책을 만들었지만, 중세의 책이란 대부분 양피지로 만든 장정본이었다. 양피지는 만드는 공정도 까다로운 데다가 양 한 마리에서 고작 넉 장이 나올 뿐이었으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제작하려면 자그마치 200마리의 양을 잡아야 했다니 양피지 값만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 위에 금박 은박을 입히고 각색 물감으로 채색(彩飾)을 더하는가 하면 표지는 각종 보석으로 치장했으니, 그쯤 되면 책은 단순히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와 위용을 과시하는 사치품이요. "정신적인 재화보다는 경제적인 재화"(자크 르 고프)였다.

책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와야 할까?

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혁명은 '코덱스(codex)의 출현'과 '인쇄술의 발명(1460년)'이다. 코덱스의 출현은 서구 문화사에서 그야말로 혁명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코덱스(사각형의 페이지들을 묶은 형태의 책)를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84~86년경 시인 마르티알리누스였다고 한다.

코덱스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글을 쓸 수 있고 원하는 곳을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두루마리보다 훨씬 합리적이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으로부터 책의 역사는 눈부시게 진화했다. 코덱스는 오늘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네모 반듯한 책의 기원이다.

학교 다닐 때 글자나 종이, 혹은 인쇄술 발명에 대한 것들을 배웠지만 '코덱스'도 몰랐고, '양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파피루스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드는지, 짐승 가죽을 이용하여 어떻게 책을 만든다는 건지, 거위 깃이나 갈대 펜으로 과연 얼마나 글을 쓸 수 있다는 건지 등.

책을 좋아하는 내게 이런 것은 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수서본의 화려함 속에 숨어있는 많은 이야기를 보았는데 그 이야기들은 중세 서양문화를 이해하려면 참고삼아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책을 둘러싼 것들을 맘껏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책 제목만으로는, 책이 좋아 삶의 모든 것을 책으로 연결하고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려니 싶었는데 오직 책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이 가진 많은 것들과 삶의 많은 부분을 소비(?)한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그들에게 책은 모든 세상이었고 살아가는 목적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 권의 책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스며있어야 제대로 된 가치를 빛낼 수 있는지를 생각하였다. 책 한 권이 나의 모든 세상은 아니지만 책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보고 세상을 보는 나 자신이 좋다. 이 책은 누구든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책을 통하여 삶의 많은 부분을 가치 삼는 사람들에게 책의 진정한 의미와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양피지는 어떤 것?

ⓒ마티
양피지, 즉 파르슈맹(parchemin)은 소아시아의 페르가몬(pergamon)이란 도시에서 유래. 페르가몬 왕 에우메니오스 2세가 처음 사용했다고. 기원후 3~4세에 걸쳐 기술적 발전과 함께 널리 전파, 13세기에 종이가 나타나기까지 글을 쓰기 위한 주된 재료로 쓰였다.

양피지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는 여러 가지 동물의 가죽이 사용되었다. 염소나 양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인 바잔(basane)이 가장 흔했고,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벨랭(velin)이 가장 고급이었다. 중세에는 양피지를 만드는 공방이 따로 있었다는데 주로 도시 한복판이나 수도원 근처에 자리 잡았다고. 당시 양피지를 이용한 대부분의 수서본들은 성경내용이었으며 수도원을 중심으로 수서본이 제작되었다.

가죽을 손질하려면 여러 주씩 걸리는 아주 꼼꼼한 손질이 필요했다고 한다. 가죽은 24장, 또는 36장씩 묶어 다발로 팔았다. 한 장의 가죽을 둘로 접느냐 넷으로 접느냐에 따라 양피지 크기가 달라졌고 가장 큰 것이 4절(콰르도), 가장 작은 것이 8절(옥토)였는데, 이것을 공책처럼 묶었다.

화려한 수서본을 만들려면 양피지를 검정이나 자주색으로 물들여 금색이나 은색으로 글씨를 쓰기도 했는데 가죽은 파피루스나 종이보다 견고하고 불에도 잘 타지 않는 장점으로 이미 썼던 글씨를 긁어내고 다시 쓰기도 새 글씨를 쓸 수도 있어서 자외선에 비추면 글씨가 겹쳐 보이는 것도 종종 발견된다고. 그럼 어떻게 양피지를 만드는 걸까?

1. 짐승의 가죽을 벗겨 하루쯤 개울물에 담가 털이나 지저분한 것들을 제거한 다음 물기를 빼고 살이 붙어 있던 안쪽이 위로 향하게 하여 차곡차곡 쌓아둔다. 그런 다음 가죽의 안쪽에 석회를 발라 안쪽끼리 맞닿도록 반으로 접는다.

2. 1~2주일 경과 후, 다시 한번 물에 넣어 나머지 털을 제거, 강도를 달리한 석회액에 여러 차 례 담갔다가 헹구기를 반복, 둥글거나 네모진 나무틀에 팽팽하게 펼쳐 놓는다.

3. 둥글거나 네모진 나무틀인 에르스에 팽팽하게 펼친 상태에서 가죽을 살을 걷어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작업이 끝난 가죽에 백묵가루를 뿌린다.

4. 마지막 작업으로 백묵이 뿌려진 가죽을 속돌로 긁고 양가죽으로 문질러 매끈하고 부드럽게 다듬는다.( 책의 내용을 토대로 요약) / 김현자

덧붙이는 글 |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 브루케지음/최애리 옮김/마티 2006.3.1/1만8000원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마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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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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