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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피한 정치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음악을 정치적 그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사진은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 한길사 제공

[기사 보강 : 26일 오후 4시 30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위원장 오충일·국정원 진실위)는 26일 오후 국정원 국가정보관에서 박정희 정권 시기 '동백림' 사건에 대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중앙정보부가 6.8총선 부정선거 반대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백림 사건을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피의자들에게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범죄 사실을 확대 과장했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부정선거 규탄시위 무력화에 이용"

정권의 '사전 기획조작설'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국정원진실위는 "(사전조작이 아니라) 중앙정보부가 임석진의 자수(1967년 5월 17일)에 따라 6.8선거 이전에 계획을 수립,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이어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북한 지령에 따른 국가전복 행위로 몰고 가기 위해 1960년대의 대표적인 학생조직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를 무리하게 동백림 공작단 일원으로 확대 왜곡하는 등 정치적으로 사건을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또한 "수사과정에서 심리적 위협은 물론 신체적인 가혹행위도 행사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의 경우 당시 혐의내용 중 사실인 경우가 적지 않으며 당사자들도 이를 인정한 경우가 많지만, 민비연의 경우 혐의내용 자체가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사건은 지난번 국정원 진실위가 발표했던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등과 성격이 다르다.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법원 판결문 등에서 최종 인정된 내용 중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었지만 동백림 사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 다만 당시 중앙정보부가 몇몇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게 동백림 사건의 특징이다.

국정원 진실위는 중앙정보부가 민비연으로 무리하게 수사를 확대하고 이례적으로 수사 도중에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 사건을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민비연과 관련,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훗날 회고록에서 "동백림 사건에 민비연을 포함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관련자들이 실정법을 어겼고 중앙정보부가 이를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해외거주 관련자 불법연행, 가혹행위, 간첩죄의 무리한 적용과 사건외연 및 범죄사실 확대과장, 민비연에 대한 확대적용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결과 일반국민들에게 단순 대북 접촉자까지도 간첩으로 확대 오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철저히 수사하라'... 중앙정보부 주도적 수사"

그러나 당시 수사는 "철저히 수사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가 주도적으로 했을 것이라는 게 국정원 진실위의 판단이다. 30여명을 해외에서 연행한 것과 관련해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지만 대통령에게 승인, 보고하지 않고 중앙정보부가 독자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GK-공작계획'이라는 자료에 중앙정보부가 해외연행을 위해 해당국 기관과의 협조까지 고려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해외기관과의 협력설은 사실무근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한 국정원 진실위는 "고문 여부에 대해 수사관들과 피의자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지만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한 이들 중 최소한 14명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으며, 고 천상병 시인도 이에 해당된다"고 밝혔다.

'동백림 사건'의 상징이 된 고 윤이상씨와 관련, 국정원 진실위는 "거짓말에 의해 국내로 불법연행된 뒤 일부 강압수사에 의해 소극적인 대북행적에 고전적인 간첩죄가 적용됐다"고 밝혔다. "윤이상=간첩이라는 오명을 둘러쓰게 한 것은 부당한 측면이 있다"고 해석한 것.

윤이상씨는 사건 당시부터 북한으로부터의 금품 수수, 방북 등 실정법 위반은 인정했지만 간첩 혐의는 부인해왔다. 그러나 고문 여부에 대해서는 "고문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다른 피의자와 달리 그 사실을 입증해줄 증거가 없어 판단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토대로 국정원 진실위는 "정부는 관련자에게 포괄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 천상병 시인 등 최소 14명의 고문 주장은 사실일 것"

국정원 진실위는 동백림 사건의 후과와 관련, "박정희 정권은 동백림 사건을 이용해 부정선거 규탄시위 등 학생들과 야당의 규탄운동을 침묵시킴으로써 3선개헌과 장기집권 초석을 만들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중앙정보부의 위상이 크게 강화됐지만 대외활동 인프라 훼손, 해외사회 내 반정부인사 양산 등 해외 정보력 위축을 초래했다고 풀이했다. 아울러 "유럽 거주 관련자 연행 작전 성공은 김대중 납치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등 1970년대 불법적인 해외공작을 부추기는 부작용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한 사법부를 동백림 사건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로 적시했다. 당시 대법원이 사건을 원심 파기환송 조치한 뒤 "용공판사 물러가라"의 괴벽보가 붙는 등 사법부에 대한 압력이 상당히 강했다.

그럼에도 사법부가 판결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이며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제기한 혐의를 상당 부분 무혐의 처리한 데 대해 박정희 정권이 불만을 품고 사법부 길들이기에 들어갔다는 지적이다. 이후 1970년대 판사들의 집단 사표제출 등 사법부 파동을 거치며 사법부가 독립성을 상실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게 국정원 진실위의 평가다.

특히 중앙정보부가 당시 재판 과정에서 검찰과 재판부에 금품을 제공하려고 계획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 진실위는 "대법원이 '증거없이 사실을 인정했다'는 취지로 원심을 파기환송하자 자백 이외의 물증을 제시하기 어려웠던 중앙정보부가 일정한 금품을 통해 검찰과 재판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것이 내부 문서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획의 실제 집행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정원 진실위, 김대중납치·중부지역당 사건, 3월 발표 예정

한편 '간첩단은 아닌 것으로 결론내렸다'는 언론보도와 관련해서는 "동백림 사건 관련자 34명 중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면제 3명이 최종 선고된 한편 피고인 가운데 누구도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사위원인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이와 관련, "당시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간첩'단'이라는 표현 자체가 없으며 사법부도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며 "처음부터 간첩단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 진실위는 앞으로 일정과 관련, "'김대중 납치 사건'과 '중부지역당 사건'을 3월 중 발표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KAL858기 사건의 경우 4∼5월께 발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들에 대한 조사 결과가 예정대로 발표될 경우 국정원 진실위의 조사 활동은 올 상반기에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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