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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일 아시아여성학센터가 주최한 '한국의 현모양처는 어디서 기원했을까' 세미나에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는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여성관'과 '메이지 일본의 현모양처론' 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 우먼타임스
(채혜원 기자) 한국의 현모양처(賢母良妻)는 어디서 기원했을까. 지난 10일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가 주최한 세미나 발표자로 나선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학 한국학 부교수) 교수는 한국의 현모양처 기원을 '빅토리아 시대의 보수적 여성관'과 '메이지 일본의 현모양처론'에서 찾았다.

영국의 귀족층이나 부유한 중산층들은 도덕을 들먹이면서도 고급매춘부의 서비스를 비싼 값으로 향유했다. 반면 하류층들은 국가기구로부터 매매춘행위를 금지당하거나 종교적 지탄을 받았다. 근대 사회의 준거 틀로 인식됐던 이 같은 빅토리안 시대의 이중적 성 담론이 근대화의 물결을 따라 근대 조선에 이식되었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일제시대에도 상류층 사람들은 기생을 부르는 일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누렸던 것에 반해 하부에 위치한 이들은 맹목적인 자제와 정숙, 정조를 강요당했다.

또 한 가지 기원은 '국민들의 좋은 부인과 어머니'가 주된 여성교육주제였던 일본의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다. 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일본 쪽 영향이 한국의 친일 부르주아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며 "동아일보 1927년 11월 11일자 신문에는 총명한 아내 아홉 가지 비결로 ▲살림을 교묘히 하고 식사 때 만족하게 할 것 ▲옛날 연애얘기하지 말 것 ▲아이만 사랑하지 말고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지 말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1945년 이후 '가정' 개념 중심의 교육을 통해 계속 재생산되어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현모양처 담론에 대한 도전과 저항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화가 나혜석(1896~1948)과 시인 김일엽(1896~1971) 같은 급진파 신여성들이 주장한 '새로운 정조론'이 대표적인 예다. 그들은 정조는 자유라며, "정조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다"라고 주장했다.

유럽 여행 때 파리에서 최린(1878~1958)과 사랑에 빠졌다가 남편에게 들켜 이혼을 당한 나혜석은 "배우자를 잊지 않은 범위 내에서 혼외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도전장을 남편과 조선사회에 내던졌다.

박노자 교수는 이러한 정조와의 투쟁에 선 한국여성에게 영감을 준 것은 '히라쓰카 라이초(1886-1971)'라며 "나혜석과 김일엽이 일본 유학 때 '세이토'라는 일본 최초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눈뜨게 됐다"고 설명했다.

라이초는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잡지 '세이토'를 만들어 여성의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 아동양육의 사회적 책임, 여성의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이라는 의제를 설정해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인물이다.

박노자 교수는 나혜석이나, 유부남 애인과의 동반자살(1926)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프라노 가수이며 배우인 윤심덕씨 등을 '진정한 영웅'이라 말했다. 여성들의 욕망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대초기 사회에, 진정한 해방을 위해 저항한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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