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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표지
ⓒ 사계절출판사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해볼 것이다. 하지만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주인공 바르톨로메 앞에서라면 그런 생각을 접게 된다. 바르톨로메, 그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보면 인상을 찡그리고 마는 추한 외모에 기형아 같은 난장이의 신체를 갖고 태어났다. 불구인 것이다. 때문에 가족은 바르톨로메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

아무리 가족이라 하더라도 악마 같은 외모를 지닌 바르톨로메에게 진한 애정을 나눠주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태어나면서 지닌 육체와 외모 때문에 바르톨로메는 차별을 받는다.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지만 바르톨로메는 낙담하지 않는다. 비록 아버지가 자신을 냉랭하게 대하지만 어머니가 있고 형제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은 그런 바르톨로메를 비웃듯 그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긴다. 아버지가 공주의 마부가 된 탓에 가족이 마드리드로 향하게 되는데 아버지가 바르톨로메는 시골에 남겨두고 떠나려는 것이다. 불구인 아들이 마드리드에서 학대받을 것을 염려한 탓이기도 했고 자신의 자식이 ‘몹쓸’ 아이인 것이 알려질 것이 못내 꺼림칙했던 것이다.

바르톨로메는 아버지에게 사정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골방에서 지내도 되니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애원한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바르톨로메를 데려가자고 하고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바르톨로메를 데려가기로 한다. 위기가 무사히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위기는 이제 시작이다. 마드리드에는 바르톨로메가 평생 ‘인간개’노릇을 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운명이 기다리기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태어나면서 불구인 바르톨로메의 ‘의지’와 인간을 무릎 꿇게 만들려는 가혹한 ‘운명’과의 싸움을 다루고 있다. 운명은 시시각각 바르톨로메를 노린다. 마치 ‘너 같은 아이는 살아갈 자격이 없다’는 듯 처음에는 아버지를 통해서 시련을 주더니 그 다음에는 절대왕권 시대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주를 통해서 시련을 준다.

공주가 주는 시련이란 무엇인가? 우연히 바르톨로메를 본 공주는 단번에 바르톨로메에게 반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반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다. 흥미로운 장난감을 봤다는 감정에서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자신의 것임을 선언한다. 그 선언의 자리에는 마부인 아버지도 있었다. 허나 마부가 공주의 뜻을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직접 공주에게 바르톨로메를 데려다준다. 그리고 바르톨로메는 공주의 장난감이 된다.

비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에서 바르톨로메가 겪어야 하는 시련들은 온통 비극 투성이다. 완전히, 하나도 남김없이 인간성을 상실해야 하는 과정은 그 어느 것보다 비극적이다. 하지만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모습은 비극이 아니다. 비극을 만드는 시련들에 대항하는 바르톨로메의 도전과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는 글자를 배운다. 마드리드에 자신처럼 난장이임에도 당당히 일을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주 고된 과정을 거치며 글자를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 된다. 오히려 바르톨로메를 옥죄는 결과가 된다. 그럼에도 실망하지 않은 바르톨로메는 무언가를 배우려 한다. 그래서 그림을 배운다. 그것 또한 쉽지 않다. 하지만 바르톨로메는 나약하고, 겁 많은 약자지만 오뚝이처럼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배우려 한다. 딱히 비결이 있는 건 아니다. 유달리 그가 강한 심성을 지녔기 때문도 아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인간대접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쉽게 쓰러지는 존재인가? 하지만 인간처럼 강한 존재도 없다. 바르톨로메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그린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는 훌륭할 수밖에 없다.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소설들이 판치는 무대에서 인간이 운명을 딛고 승리하는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빼어난 솜씨로.

이것과 더불어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작품 속에 집어넣어 바르톨로메의 의지를 형상화시키는데 이용하고 있는데 그 상상력이 참으로 놀랍다. 비슷한 양식으로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를 이용한 <헤르메스의 기둥>를 연상케 하면서도 상상력의 단위에서 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위치했으며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를 이용한 <진주 귀고리 소녀>를 연상케 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진하게 소설의 감동을 부각시킨다.

본문 중에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다’라는 성경의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세상에서 너무나 뻔히 통용되는 구절로 여겨진다. 하지만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와 함께 이 구절의 ‘진실’한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재미나 영향력을 볼 때 출판사 의도답게 청소년에게 좋은 격려제가 된다. 이 점은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 소설의 재미는 물론 인간의 의지를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감동'이 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사계절(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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