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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적 간의 대결은 결판이 나지 않는 한 쉽게 끝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외부적 요인에 의해 대결이 중단되거나 혹은 그 대결의 결과가 왜곡된다면, 두 라이벌은 역량이 남아 있는 한 언제라도 다시 대결에 나서게 되어 있다.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는 중일 간 패권경쟁의 심리적 저변에도 바로 그같은 측면이 있다. 진작 종결되었어야 할 양국 간 대결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 다분히 흐지부지하게 끝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양국 간에 흐지부지하게 끝난 대결'이라는 것은 바로 중일전쟁(1937~1945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중일전쟁은 분명 종전되었지만, 이 전쟁이 명백히 종결되었다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다. (1) 항복 선언을 받지 못한 승자가 있는 데다가 (2) 전쟁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중일전쟁을 항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하며, 이 글에서도 중일전쟁과 항일전쟁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개인 간의 불편한 감정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충돌의 불씨가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중국·일본 두 민족이 중일전쟁에서 명확한 결판을 내지 못한 것은 양국 간 대결의 불씨를 계속 살려 두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제2차 대전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은 친미정권 하의 교육제도 하에서 생겨난 것이다.

제2차 대전을 포함하여 국제질서 전반에 대한 우리의 인식 속에는 상당 부분 미국적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황색 피부를 갖고 있으면서도 '파란 눈동자'로 세계 질서를 인식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우리가 세계 질서를 올바로 인식하려면 적어도 미국적 가치관에서만큼은 벗어나야 한다.

제2차 대전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2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1) 다른 대륙에서라면 몰라도,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이 아시아에서 참가한 전쟁은 제2차 대전이라고 하기보다는 '항일전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미국은 아시아 이외의 대륙에서 벌어진 제2차 대전의 당사자일는지는 몰라도, 아시아에서 벌어진 항일전쟁에서만큼은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속에서 항일전쟁보다는 제2차 대전이 주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미국의 영향권 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중국 등 아시아 피압박민족을 전쟁의 직접적 주체로 인식하기보다는 미국·소련·영국 등 서양 열강만을 전쟁의 당사자로 인식해 왔다.

'우리 민족은 일제 패망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으면서도 미국 덕분에 떡고물을 얻은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환경의 산물인 것이다.

(2) 제2차 대전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관련하여 언급할 두 번째 사항은, 과연 미국이 항복을 독점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 투하가 일본의 항복선언을 이끌어낸 '최종적'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중 두 민족의 항일투쟁에 의해 일본의 패배가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원폭 투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원래대로라면, 일본은 미국뿐만 아니라 한·중 두 민족에게도 항복 선언을 했어야 한다. 그런데 진주만 기습 이후 미국이 아시아에 개입하고 또 원폭까지 투하함으로써 전승의 공로를 사실상 독점하게 된 데서부터 동북아의 온갖 모순과 왜곡이 생겨나고 말았다.

위 2가지 문제 중에서 오늘은 첫 번째만 다루기로 하고, 두 번째는 4회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본이 참전한 전쟁의 실체가 제2차 대전이었는가 아니면 항일전쟁이었는가 하는 점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일본이 참가한 전쟁의 실체가 무엇이었는가를 규명하려면,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구를 주적(主敵)으로 삼았는가를 찾아내면 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관한 이야기부터 하는 게 나을 듯하다. 임진왜란 시기에 도요토미가 남긴 유명한 말 가운데에 이런 것이 있다.

"고려(조선)를 정복하는 것은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전주곡이며, 중국을 정복함은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전주곡이 된다."

이 말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나듯이, 일본인들은 중국과의 대결을 세계 진출의 핵심 관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위와 같은 인식이 도요토미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이후 일본의 세계정책에서 기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은 1927년의 '다나카 상주문'에서도 잘 나타난다. 다나카 상주문의 채택과정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1927년에 일본에서는 정우회(政友會) 출신의 강경파인 다나카 기이치를 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으로 하는 다나카 내각이 출범했다. 다나카 내각은 같은 해 6월 27일부터 7월 7일까지 중국 다롄에서 소위 동방회의(東方會議)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중국 현지의 일본 군정 요원들, 중국주재 일본공사, 상해주재 일본총영사, 펑텐주재 일본총영사, 관동군사령관 등이 참석하였다. 회의 의제는 중국침략정책을 결정하는 것이었으며, 회의의 결론은 '중국 침략을 위해 만주·몽골 지역에 대하여 적극적 정책을 취하고 나아가 중국을 병합하자'는 것이었다.

1927년 7월 25일 다나카 총리는 동방회의의 결정사항을 일본 국왕(소위 '천황')에게 비밀리에 상주하였다. 이후 일본의 대(對)중국 정책의 청사진이 된 다나카 상주문의 핵심적 내용은 이러하다.

"세계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중국을 정복해야 합니다. 만일 중국이 정복되면 다른 나라들도 모두 두려워 복종하고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상주문에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본은 미국이나 소련 같은 서양 국가들을 싸움의 대상으로 본 게 아니라 바로 중국을 주적으로 설정하였다.

이같은 국가정책에 따라 이후 일본은 중국 침략을 한층 더 본격화하였다. 일본이 1931년에 도발한 만주사변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1941년까지 일본이 주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중국이었으며, 또 일본에 주로 대항한 것도 중국이었다. 이 시기에 중국과 함께 항일투쟁에 참가한 한국인들의 공로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일본이 한국·중국 등 아시아 민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이라면, 1941년에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일본은 당시 한국·중국 등 아시아 민족과의 전쟁에서 불리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 것은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오판으로 판명나기는 하였지만, 1941년 당시의 일본 지도부는 불리한 판세를 뒤집기 위해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일본이 생각해 낸 돌파구라는 것은 바로 진주만 기습이었다.

국면 전환을 위해 새로운 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1854년 8월 29일(음력)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하여 러시아 영토인 캄차카반도(오호츠크해와 베링해 사이)의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기습하였다. 당시 크림전쟁(1853~1856년)을 치르고 있던 영국이 새로운 전쟁을 도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크림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국면전환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일본이 1941년에 미국을 끌어들인 것은 일차적으로 국면 전환을 위한 것이었다. 국면 전환을 통해서 일본이 얻고자 한 것은 미국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바로 한국·중국 등 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일본의 선택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중국 등의 저항에 밀려 아시아에서 점차 불리한 국면에 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도 미국을 침략한다는 것은, 주적을 미국으로 바꾸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중국 등과의 전쟁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 넣기 위한 것이었다.

지면 관계상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국면전환을 위해 새로운 전쟁을 도발할 경우에 그것이 성공한다면 다음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1) 자국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 한편,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지지와 인적·물적 자원을 이끌어낼 수 있다. (2) 기존에 싸우던 적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줄 수 있다. (3) 전체적인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본다면,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제2차 대전에 참가했다기보다는 한국·중국 등 아시아 민족의 항일투쟁에 맞서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전쟁의 본질은 항일전쟁이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제2차 대전은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본질(항일전쟁)을 은폐하는 현상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본질이 은폐되었기 때문에 전후(戰後) 동북아에서는 전쟁 처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와 중일관계 등이 제대로 해결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본질적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언제라도 반드시 터질 수밖에 없는 불씨로 남게 되는 것이다. 중국이 '포스트 미국' 시대에 대비하여 일본과의 결판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항일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바로 미국의 원폭 투하였다. 일본이 실제로 참가한 전쟁이 한국·중국과의 싸움이었다면, 1945년에 한국·중국도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과 함께) 당연히 일본의 항복을 받았어야 한다.

그런데 다소 엉뚱하게도 전공(戰功)을 독차지한 것은 원폭 투하를 감행한 미국이었다. 전쟁의 본질적 당사자가 아닌 미국이 일본의 항복선언을 독점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는 제4회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아무튼 제2차 대전에 가려 항일전쟁이 제대로 결말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중·일 간의 최종적 대결은 다음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현존 동북아 패권국가 미국의 위력이 감소하면 할수록, 중·일 양국도 한판 대결을 위한 준비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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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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