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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일본과의 패권경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일본만큼 중국을 양적으로 많이 침탈한 나라가 드물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래서 과거 일본에게서 받은 치욕을 어떻게든 되갚고자 하는 정서가 중국인들의 의식 저변에 흐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오늘날 한·중 양국의 반일감정은 비교적 '낯선' 것이라 할 수 있다. 1870년대 이전만 해도, 동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은 다른 역내(域內) 국가들에게 국가적 치욕을 안겨 줄 만한 강국이 못 되었다. 물론 왜구의 존재가 역내 국가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된 적은 있으나, 일본이 대규모로 대륙 국가를 점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본과 다른 국가 사이에 원한 같은 게 쌓일 만한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일본이 탈아외교(脫亞外交)를 표방한 1870년대 초반부터 상황이 본질적으로 달라졌다. 탈아외교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아시아 방식을 버리고 서구 방식의 대외정책을 구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서구제국주의를 모방한 일본은 그때부터 함포를 앞세워 동아시아 국가들을 침탈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대만침공(1874년)-운요호사건(1875년)-오키나와합병(1879년)은 이러한 탈아외교의 표현이었다.

서구열강이 중국의 문호를 열던 아편전쟁(1840년) 당시만 해도, 일본은 아직 전근대(前近代)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주변국들을 위협할 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중국무대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나중에는 서구열강보다 양적으로 더 많이 중국을 침탈했다.

어찌 보면, 중국으로서는 아편전쟁 때 유럽 국가들에 당한 수모보다 훨씬 더 큰 수모를 일본에게서 받은 셈이다. 근대 중국이 역사적 수모를 겪은 아편전쟁 때부터 일제 패망(1945년) 때까지의 105년의 기간 동안, 아마 일본만큼 철저하게 중국을 침탈한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 시기의 중국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 우리에게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중국이 영국·프랑스 등 '코 큰' 유럽 국가들에 수모와 치욕을 받는 장면이다. 물론 1840년 이래 영국·프랑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중국인들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중국을 침탈하는 방법을 잘 관찰해 둔 일본은 나중에 유럽을 능가하는 방법으로 훨씬 강도 높은 침탈을 강행했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중국인들로서는, 먼저 찾아온 절도범보다는 나중에 찾아와 더 악랄하게 괴롭히고 떠난 강도범을 더 생생히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 통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일본은 뒤늦게 중국무대에 등장하였지만 선두주자들을 하나씩 제치고 1937년에 가면 사실상 단독으로 중국무대를 석권하게 된다. 이 점은 여러 가지로 입증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중국에 투자된 외국자본 총액 중에서 일본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을 갖고 그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아편전쟁 이후로 1900년 전후까지 중국을 침탈한 4대 국가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였다. 달리 말하면, 유럽 4강 체제가 중국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1902년 현재 중국에 투자된 외국자본은 총 15억930만 달러인데, 그 중 일본자본은 5360만 달러로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일본은 위력이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율이 그 후로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후 일본은 영일동맹(1902년)과 러일전쟁(1904년) 승리를 바탕으로 중국 내 영향력을 가일층 강화한다. 이리하여 일본은 신해혁명(1911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6국 은행단(일본·영국·프랑스·미국·독일·러시아)의 일원으로 중국을 지배하게 된다. 1900년 전후의 4강 체제가 1911년 전후에는 6강 체제로 바뀌고, 그때 최초로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 '빅 6'에 포함된 것이다. 1914년 현재 일본의 대(對)중국 투자액은 전체 외국자본의 12.9%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곧이어 검토하겠지만, 이 시기의 6강 체제가 3강 체제-2강 체제로 좁혀지다가 결국에는 일본 단독 체제로 귀결된다.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프랑스·독일·러시아가 중국무대에서 탈락하자, 중국시장은 일본·영국·미국의 3강 체제로 압축되었다. 1930년 현재 중국에 투자된 전체 외국자본 34억8760만 달러 가운데 일본자본은 14억1160만 달러로 40.5%를 차지한다.

그리고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시장이 일본과 미국의 2강 체제로 한층 더 좁혀진다. 1936년에는 전체 외국자본 중 일본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48.9%로 거의 절반에 육박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을 사실상 단독으로 장악하게 되었는데, 1941년 현재 전체 외국자본 중 일본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74.5%에 이르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1902년에 불과 3.6%에 불과하던 일본자본 비율이 40년도 채 안되어 4분의 3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은, 후발주자인 일본이 얼마나 '효율적'이고 집중적으로 중국의 뼈와 살을 침탈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위와 같이, 1868년 이후에 비로소 근대화 작업에 착수한 일본은 뒤늦게 중국무대에 뛰어들었으며, 얼마 안 있어 '선배'들을 제치고 중국무대를 단독으로 석권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따라서 근대 중국이 시련을 겪은 1840~1945년 기간 동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일본이 중국에 가하는 고통이, 다른 나라가 중국에 가하는 고통보다 점점 더 커졌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인들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일본을 더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중국이 차세대 동북아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 경쟁에서 일본을 반드시 제압하려고 하는 데에는, 비단 일본이 지금 당장 강국이라는 점 외에, 위와 같이 과거에 일본에 의해 강도 높은 침탈을 받았다는 역사적 한(恨)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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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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