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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 28일. 다섯살 생일날에 어머니와 함께 사진관에 갔습니다.
ⓒ 정병태
저희 어머니는 술을 거의 못하십니다. 간혹 생신 같은 날에 억지로 권해서 포도주 한 잔이라도 들어갔다가는 과거사가 신세타령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하긴, 그 덕에 어머님으로부터 4·3 사태며 살아온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만 말입니다. (4·3사태 : 최근에는 4·3 항쟁이라 불리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어머니의 과거사에는 "항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사태"로 남아 있습니다.)

얼치기 문학도였던 고등학교 때는, 여러 번 들어서 이제는 거의 외우다시피한 그 얘기를 언젠가는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민중자서전"이나 현기영씨의 소설을 보고서는, "아하 내가 쓰려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는데" 했습니다.

철모르는 어린 때였지만, 어머니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 칼에 밀리고 총에 쫒기면서도 끈질기게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어머니의 신세타령은 한편으로는 서럽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한 것이, 마치 남도의 소리 같았습니다. 그 한 자락을 옮겨 적습니다.

어머니는 제주도 애월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물질을 그렇게 잘했다네요. 해녀 대회에 나가서는 헤엄은 1등이었는데 잠수를 오래 못해서 종합 2등을 했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한강으로 물놀이도 자주 갔는데, 한강을 열 번씩이나 오가는 것도 봤습니다.

▲ 제가 여섯살인가 일곱살 때의 어느 더운 여름날입니다. 어머니께서 한강을 "왕복"하시다가, 지나가던 사진사를 불렀습니다.
ⓒ 정병태
아버지 정호. 아명 순엽. 1901년생. 평안북도 철산 태생.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배달과 우유배달을 하면서 고학으로 와세다대 상과 졸업. 그 후 귀국하여 일제하에서 관리의 길을 걸음. 고위 관료에게서 볼 수 있는 우월감과 자존심이 강했음. 다소 괴팍한 성격이며 유학에 심취했던 전형적인 보수 성향의 지식인. 전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뒀음. (기자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형 일웅은 그곳에서 사고로 죽음. 어머니보다 몇 살 어린 두 누이는 생존.)

어머니 문무생. 아명 해전. 1926년생. 제주도 애월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물질을 했음. 애월 초등학교 1학년 중퇴. 18살에 제주 3성의 하나인 양씨에게 시집가서 재칠, 태수 형제를 뒀음. (작은형 태수는 열아홉쯤엔가 자살. 기자보다 열 살 위인 큰형 재칠은 광부로 독일에 가서 현재는 병원 의료기술자로 근무 중.) 4·3 사태 때 빨갱이로 몰렸던 남편이 제주를 떠나 목포에서 전전하다가 일본으로 밀항한 후에는 홀로 두 아들을 키우다가 아버님을 만남.

1901년생과 1926년생, 와세다대 졸업과 애월 초등학교 1학년 중퇴, 평안북도 철산과 제주도 애월 - 도저히 맺어지려야 맺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이 맺어진 것은,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지만, 전쟁이라는 혼란 상황 때문이라고 해야겠지요. 워낙 나이 차가 나다 보니, 내막을 모르는 사람은 저희 식구를 시아버지-과부며느리-손자로 보기도 했습니다. 씨를 의심하는 큰시누이(저에게는 큰고모님)의 구박도 심했답니다.

당시 육군훈련소에 부식을 조달하는 작은 회사를 했던 아버님은 난리중에 임시 훈련소를 따라 제주도로 갔고, 어머님이 그 사무실의 사환으로 들어간 것이 인연의 실마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1학년 중퇴라는 짧은 학력이었지만 상당히 영민했고 성실하셨던지,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엉망이었던 일을 전부 바로잡아 놓았고, 나중에는 일을 도맡다시피했답니다. (당시 어머니는 일본으로 도망간 전 남편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젊은 과부에게, 힘든 것이라면 어려운 살림에 두 아들 키우는 것이고, 한이라면 못 배운 것이었는지,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빌자면 "두 자식 잘 키워주고 공부도 시켜주겠다"는 말만 믿고 서울로 따라왔답니다. 아버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서울로 올라오긴 했는데, 서울에 있다던 "몇 채의 기와집"은 아버지의 소실이었던 기생첩이 이미 날려버린 후였습니다. 그나마 노량진에 남아 있던 "작은 땅쪼가리"가 집이 허름한 바람에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답니다.

어머니는 공부고 뭐고 다 포기하고, 두 자식마저 제주 이모할머니께 보내놓고, 우선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습니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는 이모할머니 손에서 크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어머니께 "그때 제주로 가버리지 그랬어요?" 하고 물으니까, 어머님 대답은 이랬습니다. "그때는 너도 젖을 떼고 빽빽 울고 있었는데, 기왕 일부종사 못한 거, 너까지 애비없는 자식으로 만들 수 없는 노릇 아니냐."

어머니는 서울역 앞에 작은 가게를 얻어 국밥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화폐개혁이 있던 너댓 살 때라고 기억하는데, 전차표가 2원50전, 버스비가 5원이던 시절에, 뚝배기에 담긴 푸짐한 선지해장국 한 그릇에 10원(100환)이었습니다. 새벽 네 시 조금 지나 첫 기차가 도착할 때부터 목포행 완행 막차가 떠날 때까지 장사를 하셨으니, 노량진 집에도 못 들어오고 가게에서 쓰러져 잠깐 눈을 붙이시는 정도였습니다.

제 어렸을 적을 더듬어 보면,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나 정을 느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국밥 장사부터 '야미 담배' 마는 일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만 하셨기 때문에 거의 볼 틈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오죽했으면 세수도 잘 안하고 다니는 저를 담임 선생님께서는 "의붓자식이라 저러는가보다"하고 생각하셨다네요.

(야미 담배 : 당시에는 전매청에서도 담배를 사람 손으로 만들었는데, 담배 만드는 직공들이 몰래 빼내온 재료로 만든 담배를 말합니다. 그것으로 담배를 말아서 팔았는데, 요즘 기계로 만든 담배와 똑같은 것이, 지금 생각해봐도 참 신기합니다.)

▲ 다섯살 생일날 창경궁(당시에는 "창경원"이라 했습니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어머니는 국밥집을 하시느라 저를 돌볼 틈이 없었는데, 제 생일이라고 큰맘먹고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벚꽃 진 창경궁 나들이를 하신겁니다. 당시에는 창경궁 구경은 최고의 호사였죠. 왼쪽이 어머니고 두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가까웠던 친구분들입니다.
ⓒ 정병태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국밥장사가 잘 되는 바람에, 제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노량진에 있던 집터에, 당시로서 드물었던 2층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저희집의 기반을 만든 것은 어머니십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렇게 말하면 뭣하지만, 아버지는 젊고 부지런하고 착한 제주 여자를 꼬셔온 덕에 늘그막을 편안히 지내신 셈입니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는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주변의 유혹이 많았는데도 "내 팔자가 이런가부다" 하고 살아온 바보였구요.

어머니는 일생을 힘들게 살아오셨지만, 남들에게 잘 베푸는 손 크신 분입니다.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면 내 눈에서는 피가 난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법 없이도 살 분이시죠. 가히 제주도 여자의 표상이라 할 만한 분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어머니의 신세타령 속에서 역사를 배웠고 심성을 길러온 셈입니다. 제게 많은 스승이 있었지만, 저희 어머니만큼 큰 스승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만큼 아름다운 여인도.

어른들은 아이가 자라도 현재의 모습으로 보지 않고 어릴 때의 모습으로 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 역시 어른을 예전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올해 여든이시지만 제게는 사십 오년 전 제 생일 때 찍은 흑백사진 속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평생을 사랑의 시를 써서 바쳐도 모자랄 여인, 어머니, 내 어머니.

시편

어머니 저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보다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없어요.
산 사람 마음을 어루만지려면 광대가 돼야 하구요,
무우꽃보다 아름다웠던 스물의 아름다운 아들에게
불 지진 까아만 흔적만 남긴 억울한 넋들을
물에 흘려 바람에 실려 보내려면 무당이 돼야 하는데요
아니, 이 작은 가슴 하나만이라도 달랠 수 있다면
한 풀지 못한 춤을 접고 한삼자락 태워
바람에 날리는 하이얀 재를 거둬 시를 쓰겠는데요.

제가 뿌린 말이 가슴살 저미는 소금으로 거두어진다면
아이고 어머니 아이고 어머니 데굴데굴 구르기라도 하겠는데요.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소주를 마시면서
속 부대끼는 구역질이라도 하겠는데요.

저도 늙어가고 있어요.
한때는 제 몸의 기름을 뽑아 불 켜고 그을음으로 쓰겠다고 했지만
이젠 남의 시를 보면 그저 눈물만 나와요.
어머니 당신 모르게 시를 썼고 당신 모르게 접었어요.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제는 예쁜 말도 말랐네요.
잠드시기까지 한숨을 줄여드릴 도돌이표 자장가만 남았네요.


저희 어머니와 같은 시대를 살아온 모든 어머니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내며

덧붙이는 글 | 울 어멍 : "우리 어머니"의 제주말

아버님은 일제하에서 군수와 전매청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친일파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차마 제 입으로 뭐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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