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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은 앞날을 내다보는 희망의 디딤돌

▲ 박도, 우담기념관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 눈빛
한 시대 역사는 그 나라와 그 민족의 모든 것을 줄기차게 이어주는 생명의 숨결이다. 한 시대 역사는 그 나라와 그 민족이 지구촌 위에 쏟아낸 땀방울과 피, 삶과 문화가 고스란이 들어 있다. 한 시대 역사는 그 나라와 그 민족이 살아낸 지난 날의 흔적이자 앞날을 내다보는 희망의 디딤돌이다.

한 시대 역사의 기록은 아무나 대충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그 누군가의 편향된 잣대에 의해 분명코 피부로 겪었던 역사의 흔적을 적당히 묻어 버리거나, 이리 구부리고 비틀어서도 아니 된다. 또한 한 시대 역사의 기록을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다 하여 대충 잘라 버리거나 시치미 뚝 떼고 모른 척해서는 더더욱 아니 될 말이다.

외침으로 온갖 수모를 당한 역사의 기록도 그렇게 정확하게 기록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사를 우리 스스로 좌우의 편향된 시각으로 적당히 비틀어 짜집기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렇찮아도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중국이 동북아 공정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넘어 이제는 우리의 고조선사까지 중국사에 넣으려 하고 있지 아니한가.

여기 지난 일제 강점기 시대, 식민의 역사와 조국 해방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이 담겨있는 책이 있다. 그것도 누군가의 손끝에 의해 씌어진 그런 기록이 아니라 그때 그 모습을 눈으로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영상의 기록이다. 일제의 가혹한 감시와 탄압 속에서, 빈약한 사진기술로, 그때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는 것,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 아니겠는가.

남과 북의 편향된 시각으로 버려져 있었던 우리의 독립운동사

▲ 1889~96년 경의 서울
ⓒ 눈빛
"분단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독립운동사도 좌우의 편향된 시각으로 인하여 많은 제한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남쪽의 독립운동사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역사에 치중되어 있고, 북쪽의 역사는 김일성 우상화에 치중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연 중간의, 남북 양측에서 접어둔 사각지대가 있었다.

우리 나라가 식민지화되면서 거대한 민중의 저항이 일어났고, 거족적 투쟁의 에너지가 분출되어 세계 도처에는 그 처절한 투쟁의 기록들이 산재해 있다. 이를 간단히 좌우로 도식화하고, 나머지는 묻어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어느 투쟁 하나도 단편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면면이 지속된 저항이었다는 사실도 다시 발견할 수 있다."
- 우당기념관 이종찬, '이 사진집을 펴내면서' 몇 토막


강원도 안흥 산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글쓰기에 포옥 빠져 있는 작가 박도와 우당기념관 이종찬 전 국회의원이 광복 60돌을 맞아 펴낸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눈빛). 지난 9월에 처음 나온 이 책은 1876년 일본과 체결한 병자수호조약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지난 70년 동안의 우리 역사가 흑백사진으로 또렷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 조선 후기 양반가의 모습
ⓒ 눈빛
이 책은 모두 3부에 230여 장의 빛 바랜 흑백 사진이 담겨 있다. 제1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는 우리나라가 이미 근대화를 향해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제2부 '일제의 강점과 민중의 저항'에는 일제의 강점과 수탈 그리고 그에 저항한 무장투쟁의 기록을, 제3부 '독립을 일궈낸 사람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애국선열들의 일대기가 고스란이 담겨 있다.

이 사진집의 글을 쓴 작가 박도는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진을 우당기념관에 비치해 놓은 데 놀랐다"고 말한다. 이어 "기념관이 좁아서 창고에도 사진 액자가 더 있다는 얘기를 듣고, 항일 종갓집의 종손은 역시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번뜩 우당기념관 소장 사진을 사진집으로 엮으면 현대사에 귀중한 자료집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되뇐다.

박도는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 의열단 운동, 조선의용군 활동,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등은 매우 소홀한 역사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다"라며, 이 사진집에서는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로 인해 그동안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던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일부나마 새롭게 재조명해보고 싶었다고 덧붙힌다.

빛 바랜 흑백사진으로 보는 1896년 병자수호조약

▲ 일제의 '남한 대토벌'에 맞서 끝까지 싸우다 체포된 항일 의병장들
ⓒ 눈빛
제1부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는 구한말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1897년), 기와집과 초가집이 서로 어깨를 겨루며 빼곡히 들어찬 흑백 사진을 시작으로, 1889~96년 경의 서울, 1890년경의 광화문, 설빔 차림의 어린이들, 머리를 땋아 내린 농촌의 아이들과 연자방아를 찧는 아낙네 등의 사진들이 빼곡히 실려 있다.

특히 물동이를 이고 가는 처녀나 어느 양반집 잔칫날의 대가족 기념사진, 양가집 소녀들이 정월 대보름날 마당에서 널뛰기 하는 모습, 숯불 다리미로 다림질하는 안방마님과 다듬이질을 하는 소녀들의 천진스런 얼굴, 가마를 타고 가는 어느 양반과 그 가마를 들고 카메라를 째려 보는 가마꾼의 모습 등은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속내를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임에 틀림 없다.

또한, 강가 빨래터에서 빨래를 머리에 인 소녀들의 찡그린 모습과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앳띤 소녀, 해금(깽깽이)을 타는 거리의 악사들, 엿판을 맨 어린 소년이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표정, 서민들이 패물이나 가재도구를 잡히고 돈을 빌려 썼던 전당포, 문방구와 복덕방, 갓장이가 길가에 앉아 갓을 만드는 모습 등에서는 그 당시 풍속과 서민들의 서글픈 삶이 엿보인다.

지금도 땅을 치게 하는 을사늑약 문서

▲ 사열을 받고 있는 광복군 제2지대
ⓒ 눈빛
제2부 '일제의 강점과 민중의 저항'에서는 개화기 강화도의 사진이 제일 먼저 나온다. 이어 외침을 막고자 만든 돈대와 강화도 사건을 일으킨 일본 군함 운요호, 동학농민운동으로 체포된 전봉준의 서울 압송, 일본인 부대와 보급물자를 나르는 조선인 노무자들, 의병 활동을 벌이는 의병들,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사진 등은 아픈 역사의 상채기를 툭툭 건드린다.

동학군을 이끌고 공주에서 싸우다 참패하여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된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모습은 초라하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퉁퉁 부은 맨발에 장단지까지 걷어 올라간 다 떨어진 삼베 바지, 턱수염까지 덮어 버린 콧수염, 볼이 쏘옥 들어간 훌쭉한 얼굴, 부릅 뜬 두 눈은 우리 안에 갇힌 호랑이가 따로 없다.

을사늑약 문서는 땅을 치게 만든다. 글씨를 모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게 찍은 이 사진에 나오는 1, 2조를 살펴보자.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 도쿄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시, 지휘한다. 제2조 한국은 금후 일본국 정부에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아무런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는다."

아아, 우리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열사

▲ 유관순 열사의 당당한 모습
ⓒ 눈빛
제3부 '독립을 일궈낸 사람들'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와 이상설 사진을 시작으로, 신민회 결성과 우당 이회영, 양기탁 등 주요 인사들,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신흥무관학교 이상룡, 이시영 등의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임정 주요 요인들이었던 김구와 신규식, 이동녕 등의 사진, 북경파 독립운동가였던 김창숙, 신채호 등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중 3·1 운동 시위에 참가했다가 갖은 고문 끝에 결국 옥사하고 만 유관순(1904~1920) 열사의 사진과 수형기록부는 가슴이 미어지게 만든다. 퉁퉁 부은 듯한 얼굴, 빛나는 눈동자, 머리를 동그렇게 말아 올린 옆모습, 한 쪽 가슴과 옆구리에 붙은 '유관순'이라는 세 글자, 그리고 나이와 신장과 특징, 지문번호가 기록된 이 한 장의 흑백사진. 절로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일제 총독부에서 도청, 군청 및 경찰관서를 총동원하여 징용자를 모집, 신체검사를 하고 있는 모습도 자꾸만 눈에 밟힌다. 일장기와 내선일체를 강요하는 표어, 관공서 앞마당에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일제 관리들이 징용에 나설 것을 설득하고 있는 장면, 강제징용을 당해 트럭에 실려 부산항으로 출발하고 있는 징용자들의 불안한 표정. 정말 가슴이 너무 아프다.

▲ 조선의용대에 새로 편입된 여군(1939년)
ⓒ 눈빛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는 일제가 지난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맺으며 우리 나라 곳곳을 제멋대로 짓밟던 때부터 외세에 의해 광복을 맞이하는 1945년 사이에 있었던 우리의 서럽고도 뼈 아픈 역사가 흑백사진으로 고스란이 담겨 있다. 열 편의 글보다 사진 한 장이 더 낫다고 웅변하듯이.

그렇다고 이 책이 우리 민족의 힘 없는 모습과 어두운 그림자만 보여 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겉으로 보면 우리 나라의 광복은 외세의 힘에 의해 다가온 것처럼 보이지만, 광복은 결코 외세의 힘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끈질간 무장투쟁에 의해서 더 빨리 성취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이 한 권의 책이 조목조목 되짚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우당기념관 엮음, 박도 글, 눈빛(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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