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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기 전에 혁명가이자 전사였던 시인의 삶

▲ 책 표지. 표지에 보이는 그림은 셰브첸코가 1842년에 그렸던 <카테리나>
ⓒ 안병기
<유랑시인>은 우크라이나의 국민시인이라 불리는 타라스 셰브첸코가 쓴 대표적인 장시 21편을 추려 한데 묶은 책이다. 책 제목은 1840년 처녀시집인 <콥자르>(Kobzar, 유랑시인)에서 따온 것이다.

'콥자르'란 우크라이나의 민속악기인 콥자(kobza)라는 현악기를 타는 가객을 뜻하는데, 우크라이나의 민속에서는 대개 떠돌아다니며 구전 서사시나 민요를 노래하는 눈먼 늙은 유랑가수로 그려진다.

타라스 셰브첸코(Taras Hryhorovych Shevchenko, 1814~61)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던 약소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다. 식민지의 백성 중에서도 최하층 계층인 농노라는 신분이 그가 등에 짊어지고 태어난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운명을, 민족이 처해 있는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묵과하지 않았다.

어떤 지역에 인접한 땅, 변경지대라는 뜻을 지닌 '오크라이나'(Okraina)에서 유래한 '우크라이나'라는 나라. 폴란드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거치면서 민족으로서의 자존심마저 갖지 못했던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그는 끊임없이 억압의 현실을 상기시키고 독립 의식을 일깨웠다.

러시아 제국이 가하는 억압뿐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억압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차르의 압제정치뿐 아니라 농노제에도 반대하는 시를 썼다. 그의 시는 근대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역사 의식을 담금질해냈다.

우리나라 민족시인들을 합쳐 놓은 듯한 시 세계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비교하며 그의 시를 읽었다. 그의 시는 대단히 스펙트럼이 넓다. 때로는 셰브첸코의 자리에 이육사와 윤동주 시인을 대치시키며 읽어도 무방하며 장시 <하이다마키>를 읽을 때는 신동엽 시인을 떠올리며 읽어도 좋을 것이다.

맑고 순수한 개인적인 감성을 노래한 서정시는 윤동주의 시와도 닮아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소재로 쓴 <하이다마키>나 <히말라야> 같은 시는 그 서사적 구조가 신동엽의 시 <금강>과 흡사했다.

그런가 하면 불의에 대한 저항을 노래하는 시 <이단자>는 김남주 시인의 시편에 비견할 만하다.

사악한 이웃들이 이웃사람의
새로 지은 좋은 집을 불태워 무너뜨리고,
그 불로 따스하게 몸을 녹이고
늘어지게 그들은 잠까지 잔다. 그러면서
그들은 잊어버린다. 회색잿더미를
바람에 날려 아주 없애버리는 것을.
재는 네거리에 그대로 쌓여 있고,
재 속에선 거대한 불길의 불씨가 가물거린다.

- 시 <이단자>의 처음 부분


그런가 하면 셰브첸코는 농노 주인을 비롯한 상층 계급의 남자들에게 농락당한 후 출산한 아이와 함께 버림받은 여성들의 고통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아마도 <카테리나>나 <하녀>와 같은 장시는 이에 속할 것이다.

성모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한 시 '마리아', '나는 그때 열세 살을 넘겼지'같은 자전적 요소를 담고 있는 시도 들어 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간 시, 비장한 콥자르의 현

셰브첸코 시인은 우크라이나 남부 초원지대 황량한 들판에 솟아 있는 코사크 전사들의 버려진 무덤과 그 위에 비치는 처연한 달빛을 노래한다. 때로는 이름 모를 잡초 속에서 죽어간 전사의 주검 위를 배회하는 검은 독수리와 해 저문 초원을 휩쓸고 가는 쓸쓸한 바람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의 시는 우크라이나 역사를 구비치는 비장한 콥자르의 현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더없이 슬프되, 읽는 이를 그 슬픔에 마음을 상하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끝없이 적셔지는 마음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어 가며 살았던 전사 집단 코사크들에 대한 묘사에 이르게 되면 마음은 홀연 창공이라도 나는 듯 아연 활기를 되찾게 된다. 유라시아 초원과 수로를 말과 배로써 거침없는 질주. 이런 대목은 마치 미하일 숄로호프의 웅장한 대하 소설 <고요한 돈강>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식민지 시대와 저주받은 시인의 운명

옮긴이 박형숙

한정숙은 서울대학교 역사교육학과와 같은 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튀빙겐 대학교에서 혁명기 러시아의 경제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봉건사회><노동의 역사><비잔티움 제국사> 등이 있다. / 안병기
러시아 차르 전제정의 지배를 받고 있던 19세기 우크라이나에서 농노라는 신분적 굴레를 쓰고 태어났던 세브첸코. 화가가 되고자 하였으나 정치범으로 체포되어 온갖 간난신고를 겪은 끝에 그는 47세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파란만장한 생애였다.

그것은 어쩌면 식민지 시대 시인의 공통된 운명인지도 모른다. < Last Farewell > (마지막 안녕)이라는 시를 남기고 죽어간 필리핀의 시인 호세 리잘도 그러했으며, 일제하의 시인 윤동주도 그러했다. 시인의 운명이 조국의 운명과 일치하는 나라에서의 시인의 삶이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

셰브첸코라는 시인의 시는 오늘, 먼 나라 코리아에 사는 한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나는 셰브첸코라는 시인의 조국을, 민족을 내가 바라보는 세계의 일원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담론의 기초 단위는 어디까지나 민족이며 국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책의 역자인 한정숙 교수는 '책을 내면서'라는 역자 서문에서 민족국가들이 독립을 얻어 새롭게 형성되는 과정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유럽과,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의 해체까지도 거리낌 없이 논의되는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치열하게 숙고할 것을 촉구한다.

이 책은 시선집으로 읽어도 좋고 열정적 혁명문학가로서의 셰브첸코의 삶을 기록한 하나의 평전으로도 읽어도 좋다. 역자는 시인의 삶과 문학에 대해 충실한 해제를 싣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 시들에 대해 의미, 역사적 상황까지 해설을 덧붙여 놓았다. 꼼꼼하고 성실한 역자의 주석은 이방의 나라에 사는 독자에게 이방인인 셰브첸코라는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 글의 마지막은 셰브첸코의 시 '노래'라는 시로 끝낸다. 오늘같이 투명한 가을날은 현악기에서 울리는 현의 목청은 큰 법이다. 소리내서 크게 한 번 읽어보시라. 어떤가, 식민지 시대 시인의 비감한 목소리가 가슴을 얼얼하게 만들지 않는가.

강물은 푸른 바다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않네.
코사크는 행운 찾으나
행운 얻지 못하네.
코사크가 드넓은 바깥세상 나가보니
푸른 바다가 춤추네.
코사크 마음도 춤추며
노래를 부르네
"어디로 가니 젊은이야, 작별 인사도 없이?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 어여쁜 아가씨는
그 누가 돌보라고 팽개쳐버렸니?
타향에는 정든 이 없네-
타인들과 더불어선 살기 괴롭네!
함께 울어줄 사람 없고
말벗도 하나 없네."

코사크는 저쪽 편 기슭에 앉아 있고
푸른 바다는 춤추네.
행운 얻으리라 생각했건만-
스쳐 지나가는 것은 슬픔뿐이네.
두루미 떼는 유유히
고향 쪽으로 날아가네
코사크는 흐느끼네- 지나온 길은 모두
가시덤불로 덮였네.

셰브첸코의 시 <노래> 전부


한 우크라이나 시인의 파란만장한 생애
타라스 세브첸코 약전(略傳)

타라스 셰브첸코(Tarasa Shevchenka, 1814~61)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농노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자라면서 역시 농노였던 할아버지가 낭송하는 우크라이나의 민중시를 들으면서 성장했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시세계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1838년 러시아의 많은 문화계와 사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마침내 농노신분에서 해방되었다.

1840년 처녀시집 <유랑시인>(콥자르)을 출판하여 가장 아름답고 강렬한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이후에는 미술가보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43년 이후 고향 우크라이나를 여행하면서 지식인을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민족문제를 논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의 자율 및 해방적 범슬라브주의를 지향하는 최초의 근대적 정치결사인 키릴루스-메토디우스 형제단원들과 가까이 지냈다. 그의 시집 <삼 년>은 형제단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그들의 현실 비판의식을 고취시켰다.

1847년 봄 셰브첸코는 체포되었다.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민간인이었던 셰브첸코에게 어처구니 없이 러시아 육군 일등병이 되는 형벌을 내렸으며 일체의 집필과 미술창작 활동을 금지시키고 유배형에 처했다.

10년만에 유배형에서 풀려나 1857년 상트 페테르부르그로 돌아와 미술 아카데미에서 강의하며 시 창작을 계속했으나, 유배생활에서 얻은 중병 때문에 외로움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 안병기

덧붙이는 글 | 지은이:타라스 셰브첸코
펴낸이: 한길사
책값:2만 7천원


유랑시인 -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시정

타라스 셰브첸코 지음, 한정숙 옮김, 한길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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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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