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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릉 홍살문 오른쪽에 있어야 할 망료위는 보이지 않고 푸른 잔디로 뒤덮여 있다.
ⓒ 한성희
중종(1488~1544)의 정릉(靖陵)으로 들어서는 길에 습관처럼 홍살문 주위를 살펴보다가 망료위(망례위, 판위)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어라? 망료위가 없는 왕릉도 있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홍살문 옆에는 망료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왕릉 답사 중 망료위가 없는 왕릉은 정릉이 처음이다. 능에 들어서면서 절하고 제문을 불사르는 것을 감독하는 장소인 망료위가 없다는 것은 유실된 것이 분명하므로 하루 빨리 복원해야 한다.

무서운 셋째 마누라 문정왕후 덕분에 무덤에서 파헤쳐 끌려나가 현재 강남구 삼성동 정릉으로 옮겨왔던 중종은 자신이 원했던 장경왕후 옆에서 잠들지 못하고 어거지로 부모 옆에 안장됐다.

▲ 정자각 추녀마루에 보통 왕릉에 3개 있는 잡상이 5개 올라가 있다.
ⓒ 한성희
세 명의 왕비를 뒀던 중종은 원비 단경왕후와 제1계비 장경왕후, 제2계비 문정왕후 사이에서 아들은 인종과 명종 둘밖에 얻지 못한다. 아버지 성종도 왕비 세 명에 연산군과 중종, 두 아들을 둔 것처럼 중종의 두 아들이 모두 왕위에 오르는 걸 보면 부자간에 닮은 운명이라도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형 연산군과 12살 차이가 났던 진성대군(중종)은 연산군의 실정으로 반정을 일으킨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세력의 옹립으로 1506년 9월 2일 19세에 왕위에 오른다.

반정공신의 추대로 엉겁결에 왕위에 오른 중종인 만큼 권한과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원비 단경왕후는 신수근의 딸이라는 죄로 7일간의 왕비 자리에서 물러나 사가로 쫓겨났으니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이 강제로 이혼당한 꼴이 됐다.

반정공신의 지지를 바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국공신'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특권을 보장해 줘야 했다. 정국공신은 반정에 가담한 당사자뿐 아니라 공신들의 부자, 형제, 숙질, 조손에 심지어 사촌들까지 골고루 혜택을 입는 친족집단으로 구성돼 왕권을 약화시키며 정치를 어지럽힌 요인이었다.

▲ 정릉은 장대석(가로지른 돌)이 3단계 있고 문인석, 무인석, 난간석, 병풍석이 둘러진 전형적인 조선왕릉이다. 아버지 성종의 선릉과 비슷한 양식의 석물들이고 조선전기 양식이다.
ⓒ 한성희
중종은 세자가 아니었으니 제왕학(오직 세자에게만 교육시켰다)을 교육받지도 못했다. 따라서 정치를 이끌 경륜도 없었고 자신을 도와줄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도 없었다. 중종 즉위 초기는 공신세력들이 이끌어 나갔고 그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중종으로서는 이들 훈구파를 견제할 세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기묘사화

나름대로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려 했던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할 자구책으로 사림으로 눈을 돌렸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중종에게 딱 필요한 인물이었다. 성종대부터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했던 신진 사림들은 조광조를 밀어주는 중종의 정책에 힘입어 적극 등용될 수 있었다.

조광조는 사림들의 기반이었던 향약 보급과 현량과 실시 등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며 도학정치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러한 정책은 단지 중종의 신임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기득권을 무너트리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중종13년(1518) 조광조는 현량과란 새로운 인재등용책을 발의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댔다. 관리를 시부(詩賦)로 뽑기 때문에 성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벼슬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얻을까 궁리하고, 얻고 나면 놓치게 될까 봐 근심하는 폐습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량과는 천거를 받아 왕이 선택하는 인재등용책으로 경학에 능한 신진세력들을 등용할 수 있고, 덕행을 보고 천거하는 현량과를 시행하면 분경(奔競·개인적인 일로 하여 대소관리가 서로 찾아보는 것)하는 폐습이 사라질 뿐더러 대현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병풍석의 면석에 새겨진 문관문양은 당시 사림들이 활발하게 정계로 진출하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본격적인 문치주의의 상징처럼 보였다.
ⓒ 한성희
이러한 조광조의 주장은 기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조정대신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현량과의 실시 목적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개혁정치에 뜻을 같이 하는 지지세력들을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사림세력을 강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기존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무리한 개혁정책은 1419년 실시한 '정국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일로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 등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정국공신 위훈삭제'는 신진세력인 사림이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직접 칼을 꽂은 정면도전이었다. 현량과 실시로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낸 것만 해도 충분히 반발을 가져왔는데, 신진세력들의 집요한 개정논의 끝에 중종반정의 공신 3/4에 달하는 76명의 위훈을 삭탈하고 이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으니 마지못해 허락한 중종마저도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급하고 과격하게 개혁을 몰아붙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중종은 다시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고 공신들 역시 공신삭제에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김전·남곤·심정 등과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는 중종의 이런 심경변화를 알아채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앞세워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고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중종에게 속살거리게 하고,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하는 '생쇼'까지 연출했다.

명분이 없어서 조광조를 죽이지 못한 중종은 조광조를 죽여서 생사여탈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즉시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을 사사하라 명을 내렸다.

▲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무과 출신이고 이들은 어떤 공적도 세운 것이 없다. 어딘가 얼빠진 듯 해학적인 무인석은 코까지 깨져나가 당시 무인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 한성희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행하려던 조광조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도학정신이 계승되어 이황·이이 등의 유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비판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지지 받아 광범위한 사림이 중앙정치에 진출하게 되었다.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화마저도 사림정치로 바뀌는 대세를 막지 못했다. 조광조는 조선 중기에 훈구파에서 사림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추를 담당하며 사림정치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어쨌든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반정을 주도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은 돌아가면서 영상자리에 올랐고, 폭군을 몰아냈다는 반정 명분은 팽개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세상의 비난을 받으며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뽕나무밭은 빌딩 바다로 변하고

중종39년(1544) 11월 14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11대 왕 중종은 57세로 눈을 감는다. 인종 원년(1545) 2월 3일 계비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 줄기에 장사지냈다가 명종17년(1562) 9월 4일 현재 자리로 천장했다.

▲ 중종의 능상에서 물이 스며나와 거뭇거뭇하게 병풍석을 적시고 있다. 잔디도 빈약하다.
ⓒ 한성희
정릉에 올라 능상을 살피니 축축한 물기가 흐르고 있어 장마철에 정자각까지 물이 들어찼다는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렇게 물기가 흐르는 왕릉은 처음 본다. 비가 온 직후라도 능상은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무덤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아버지 성종의 능상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좀 더 높은 줄기에 있기에 물기가 줄줄 흐르지는 않았다. 중종의 능상 역시 성종과 마찬가지로 잔디가 빈약했다.

▲ 일그러지고 휘어진 소나무 가지는 땅으로 향해 있어 고통스러워 보인다.
ⓒ 한성희
능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마저 기묘하게 뒤틀리고 가지를 아래로 뻗고 있어 심상찮게 보인다. 셋째 마누라 때문에 죽어서도 물구덩이에 홀로 있는 중종이 딱해 보인다. 중종 역시 병풍석 두르기 좋아하는 문정왕후 덕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

정자각 아래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잔디에서 모이를 찾거나 참도까지 올라가 노닐고 있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문정왕후가 보우와 의논해서 천장한 정릉 주변에는 수백년 전 역사라는 걸 말해주듯 주위에 즐비한 빌딩 숲이 들어섰다.

▲ 도시의 비둘기는 왕릉 참도에 내려앉아 어도에서 무심히 제 꼬리를 돌아본다.
ⓒ 한성희
정릉을 나서면서 문득, 문정왕후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 정릉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잠실(蠶室)이 왕실에서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운영하던 뽕밭이 있던 곳이니 뽕나무밭이 빌딩 바다로 변한 지금 과히 틀리지 않은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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