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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릉
ⓒ 한성희
서삼릉에서 제일 먼저 들르게 되는 능은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1491~1515) 윤씨의 희릉이다. 원래 서삼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질투가 아니었다면 중종의 일가가 묻혀 있어야 할 능역이다.

19살에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1488~1544)은 아들을 보지 못하다가 중종 10년(1515년) 2월 25일 원자(인종)를 얻고 기뻐한다. 하지만 장경왕후는 산후병을 얻어 7일 만인 3월 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윤4월 2일 발인해 4월 4일 태종의 헌릉(서초구 내곡동) 오른쪽 산줄기에 남동 방향으로 좌향(坐向ㆍ무덤의 방향)을 잡아 장례를 치른다. 정경왕후의 능호는 뒤의 경사를 넓힌다는 뜻에서 희릉(禧陵)이라 했다.

▲ 희릉
ⓒ 한성희
그러나 22년 후, 정유년인 1537년(중종 32년) 4월 김안로가 희릉 능침의 돌이 물에 젖어 있는 흉당이라며 천장을 주장한다. 하지만 중종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며 계속 반대한다.

기묘사화로 유배를 갔던 김안로는 자신을 탄핵했던 심정을 탄핵하고 다시 정권을 잡는다. 김안로가 정적이었던 정광필마저 죽이려고 일으킨 소동이 희릉 천장이다. 정광필이 장경왕후 국장 당시 3도감 총호사였던 것을 물고 늘어져 흉당에 파묻은 죄를 묻겠다는 의도였다.

끈질지게 풍수를 거론하며 중종의 윤허를 받아 멀쩡한 희릉을 파헤쳐 9월 9일 현 서삼릉으로 천장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김안로는 천장한 지 한달 뒤에 문정왕후까지 폐위를 기도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정유삼흉(丁酉三凶)으로 악명이 높았던 김안로, 허황, 채무택은 유배지에서 정유년에 사사된다. 정작 김안로가 없애려던 정광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승승장구한다.

김안로가 일으킨 정유년 희릉 천장 때문에 장경왕후는 서삼릉에 옮겨 왔다. 정치적 이유로 능이 왔다갔다 하는 건 비단 희릉만은 아니다. 그만큼 조선 왕릉은 조선 정치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무덤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왕조는 조선 왕조밖에 없지 않을까 할 정도로 조선 왕릉은 조선 역사와 맞물려 있다.

▲ 슬픈 표정을 애써 감추는 듯한 무인석.
ⓒ 한성희
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의 병이 깊어지자 우의정 홍언필과 좌의정 윤인경을 불러 세자에게 왕위를 전위하도록 명한다. 이튿날인 11월 15일 중종은 57세로 승하했고, 1545년 2월 3일 장경왕후의 희릉 오른쪽 산줄기에 안장된다.

왕이 함께 묻히면 왕의 능호를 써야지 왕비의 능호를 쓸 수 없다. 대문의 문패를 남편의 이름으로 거는 것과 같은 이치다. 희릉은 중종이 묻히자 중종의 능호인 정릉(靖陵)이라 하고 정자각을 왕과 왕비가 묻힌 두 산줄기 사이로 옮긴다.

오른쪽 산줄기라 기록에 전하지만 왕의 기준에서 오른쪽이고, 보는 사람에겐 왼쪽이 되며 이것은 살아서는 왼편을 높이고 죽어서는 오른편을 높인다는 법칙에 따른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각과 현대의 시각은 정반대로 다르다. 현대는 주인공이 아닌 제3자의 관점을 기준으로 하지만 조선은 상대를 기준으로 하므로 항상 반대로 봐야 이해가 된다.

정경왕후와 중종처럼 정자각 하나를 쓰고 두 언덕에 묻혀 있는 이런 왕릉 형식을 '동원이강릉'이라 한다. 정릉은 나중에 단릉으로 바뀌지만 당시엔 동원이강릉이었다.

1545년 7월 1일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으면서 부모 곁에 묻어달라는 유명을 남긴다. 영의정 유인경이 인종의 유명에 따라 답사하여 선택한 곳이 정릉의 오른쪽(지금의 시각으로는 왼쪽) 백호(白虎) 자리다(인종실록권2). 이곳이 효릉이며 인종은 소원대로 부모 곁에 잠들었다.

문정왕후의 질투는 무서웠다

▲ 위 사진의 왼편 무인석과 투구 모양이 다른 오른편 무인석의 뒤에 종마목장이 보인다.
ⓒ 한성희
그러나 문정왕후가 누구인가? 수렴청정을 거쳐 마마보이 아들 명종을 휘두르던 제2계비 문정왕후는 계비인 장경왕후가 중종과 나란히 잠들어 있는 꼴을 참지 못한다.

중종은 죽은 지 17년 후인 1562년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에 의해 잠자던 곳에서 끌려 나와 한강을 건너가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옮겨진다. 옮겨간 이 정릉(靖陵)은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이 정자각까지 들어차는 흉당이었다.

자신이 중종과 나란히 잠들고 싶어 지아비를 파내 천장한 문정왕후를 어이없어 하겠지만 당시의 무덤에 대한 풍수 정서를 안다면 십분 이해 갈 일이다.

조선의 왕들은 대개 원비보다는 계비와 함께 묻혀 있는 경우가 많다. 왕과 나란히 잠들어 있다는 것은 사후에 친정과 자신이 낳은 자식이 미래를 보장 받는다는 걸 의미한다.

이해는 하지만 문정왕후의 무모한 중종 천장은 당시에도 비난을 받았다. 조선 역사상 죽은 지아비와 전처를 질투해 능을 옮긴 예는 문정왕후 빼고 전무후무한 일이다.

문정왕후가 죽자 명종은 문정왕후 소원대로 정릉에 안장하려고 하지만 대신들은 물이 들어차는 흉당이라고 반대한다. 결국 명종은 문정왕후의 천장 잘못을 시인하며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에 장사 지낸다.

그리고 명종도 2년 후에 어머니 옆에 묻혀, 문정왕후의 태릉(泰陵)과 명종의 강릉(康陵)을 통틀어 오늘날 태강릉으로 남아 있다. 중종의 두 아들 인종과 명종은 각각 친어머니 옆에 잠들어 있다.

그렇지만 문정왕후가 그 소동만 부리지 않았다면 중종 일가는 모두 서삼릉에 사이좋게 잠들어 있을 것이다. 무서운 셋째 마누라를 둔 덕분에 왕과 왕비의 능이 4개나 있어 조선제왕 중 능을 가장 많이 남긴 왕이 중종이다.

▲ 장경왕후 능상. 병풍석이 없고 무덤을 보호하는 호석인 석난간과 장명등이 있는 조선 전기 양식이다.
ⓒ 한성희
죽은 중종이 산 문정왕후에게 끌려나가 삼성동으로 옮기자 장경왕후 홀로 남은 능은 다시 희릉이 됐다. 이때 정자각도 다시 옮겨온 것으로 추측된다.

장경왕후의 사후는 이렇게 파란만장하다. 김안로의 정적 제거 권모술수에 한강을 건너왔고, 아들 인종이 젊은 나이에 죽어 곁에 묻히며, 문정왕후의 투기로 남편을 빼앗긴다. 죽어서도 이런 꼴을 당한 장경왕후의 혼은 비통함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을 것이다.

중종은 왕비가 세명이나 되지만, 1506년 중종반정으로 6일 만에 폐위된 원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온릉은 경기 양주의 장흥에, 장경왕후는 고양시 서삼릉에, 문정왕후는 노원구 태릉에, 자신은 강남 삼성동에 있어 사방에 제각기 흩어진 이산가족이다. 더구나 세 왕비 모두 강북에 있고 자신은 한강 건너 혼자 있으니 마누라를 여럿 뒀어도 사후 복이 어지간히 없는 왕이다.

희릉과 종마목장

▲ 정자각 대들보 위에 피뢰침처럼 생긴 것이 부시. 전각에 새가 앉지 못하게 하기 위해 부시를 올려 놓는다.
ⓒ 한성희
아이러니하게도 장경왕후가 죽고 3월 23일에 희릉에 묻을 지석(誌石)의 지문(誌文)을 지은 사람은 당시 도제학이었던 김안로다. 지문은 살아 생전의 행적을 거짓 없이 적어야 하고 능의 상설(象設)을 끝낸 뒤 무덤 앞에 묻는다.

다음은 중종실록에서 김안로가 쓴 지문을 일부 발췌해 정리한 장경왕후 기록이다.

장경왕후는 16살이던 1506년 궁에 들어왔다가 숙의로 봉해지고 1507년 8월 4일 중종의 계비로 책봉된다.

8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고모뻘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에게 양육됐던 장경왕후는 17세에 왕비가 되어 25세에 죽기까지 친인척의 관작이나 죄벌을 청하는 일을 금했을 만큼 현숙했다. 당시 여자로선 드물게 글을 익혀 경서에도 능한 총명한 왕비였다.

장경왕후의 병이 위독하자 중종이 근심하며 문병 와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묻자 “은혜입음이 지극히 크니 말씀드릴 것이 없다고 눈물만 흘린다. 다음날 병이 더해지자 부축을 받아 글을 써서 중종에게 올린다.

“지난 여름 임신 중 꿈에 사람이 나타나 ‘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億命(억명)이라 하라’ 하므로 벽에 써서 기록하였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종이 벽을 보니 과연 ‘億命’이란 글자가 있었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자 특별히 상복인 백의를 입고 애통해하기까지 했다. - 중종실록권21


인종이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을 어머니는 미리 알고 이런 예지몽을 꾼 것인지? 그러나 인종의 이름이 억명이라 했다는 기록은 없어 억명으로 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종의 정성 때문인지 희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거대하고 당당하다. 희릉은 조선 전기에서 중기로 오면서 변화하는 석물의 특징을 담고 있으나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러 조선 전기 양식을 갖추고 있다.

▲ 웅장한 무인석 뒤에 종마목장의 흰 울타리가 보인다.
ⓒ 한성희
특히 문인석의 당당한 모습은 무게 있는 위엄까지 느끼게 한다. 저 거대한 문인석의 무게는 대체 얼마나 나갈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희릉을 둘러싼 종마목장의 초지가 사방에서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장경왕후의 수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화재인 왕릉 부지를 잘라 종마목장을 만든다는 무지막지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군사정권에 의해 시작된 서삼릉의 수난은 박정희 시대를 이은 전두환 시대에도 계속돼 1984년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대비한다는 이유로 종마목장이 들어섰다. 이 종마목장의 현재 역할은 경마를 위한 말을 기르는 일이다.

왕릉 곁에 도박을 위한 경마를 기르는 종마 목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수많은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자랑스런 우리 민족의 수치이며 동시에 군사정권들의 문화재 인식이 어떤 수준이었나를 증명한다. 얼마나 문화재를 우습게 여겼으면 이런 짝이 났을까 하는 통탄이 저절로 나온다.

▲ 희릉에 올라서면 빙 둘러 종마목장이 붙어 있어 사방에서 흰 목책이 보인다.
ⓒ 한성희
1960년대부터 국유지를 마음대로 분양하고 팔아치운 군사정권의 습관이, 문화재가 들어선 만만한 부지들을 절단 내버렸으며 문화재를 훼손하고 왕릉의 존엄성을 능멸하기에 이르렀다. 왕릉 문화재 훼손에 격분하던 어떤 사람 말처럼 “옛날 같으면 능지처참할 일”이다.

왕릉은 풍수지리를 엄격하게 따져 명당에 조성된다. 현재 서삼릉의 안산은 골프장이 들어섰고, 우백호는 목초지, 좌청룡 자리엔 농협대학, 그리고 풍수 중 득수에 해당하는 금천(禁川)이 흐르던 지역은 종마목장이 자리 잡아 팔다리가 다 잘린 풍수형국이다.

비단 서삼릉 뿐 아니라 곳곳에서 자행된 군사정권의 문화재 훼손 행태를 보면 어디서부터 복원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정도다. 그래서 서삼릉 살리기에 나선 고양시의 시민단체들과 유림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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