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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에는 '광복절 노래'가 있다. 하지만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라고 시작하는 그 노래를 일상에서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념행사용 노래이고, 대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라기보다는 높은 분들이 만들어 부르라고 하는 노래에 가깝기 때문이다.
60년 전 8월 15일, 누가 뭐래도 우리 역사상 일대 사건이었던 광복과 뒤이어 펼쳐진 이른바 '해방공간'. 그 무렵 만들어져 대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는 어떤 게 있을까. 그리고 그 노래들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광복 이후 최초 대중가요음반 <흘러온 남매>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방송에서 그 당시 유행했던 유행가라고 단골처럼 소개하는 노래들이 있다. <신라의 달밤> <귀국선> <가거라 삼팔선> <울어라 은방울> 같은 대중가요도 있고, <독립행진곡> <조선의 노래> 같은 이른바 '해방가요'도 있다.
그러나 방송에 소개됐다고 해서 그 노래들이 정말 그 당시에 불려졌던 건 아니다. <신라의 달밤>은 1949년 4월에야 음반이 발매되었고, <귀국선> 역시 1949년에 발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통상 광복 이후, 1948년 8월까지로 언급되는 해방공간에서 널리 불렸던 대중가요로는 <가거라 삼팔선> <울어라 은방울> 정도를 확실히 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해방공간에서 불려지던 다른 대중가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현재 많이 잊혀졌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와 대중의 감정을 담아 일상의 노래로 널리 불린 곡들은 분명 있었다. 그런 노래 가운데에는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발굴해서 가치를 되새겨 봐야 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남인수팬클럽을 통해 공개된 음반 <흘러온 남매>는 해방공간의 노래로 그 뜻을 되살려 볼 만한 소중한 자료이다.
| | | ▲ 정영해 소장 <흘러온 남매> 음반 앞면 | | ⓒ 이준희 | 남인수팬클럽 회원인 정영해씨가 소장하고 있는 <흘러온 남매> 음반은 80년대 이전 음악 전문사이트인 '가요114(www.gayo114.com)'의 작업으로 지난 7월 말 복원, 공개되었다. 이 음반은 1947년 겨울 무렵, 고려레코드라는 음반회사에서 처음 발매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레코드는 1947년 8월 광복 이후 최초로 국산음반을 제작한 곳으로, 첫 작품 <애국가>를 비롯해 <조선의 노래> <여명의 노래> 같은 해방가요와 <가거라 삼팔선>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대중가요 음반을 발매해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번에 공개된 <흘러온 남매> 음반은 <애국가>나 여타 해방가요 음반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음반번호가 1002인 것을 볼 때 <가거라 삼팔선>(음반번호 1007)보다는 몇 달 먼저 발매된 것이 분명하다.
광복 직후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정식 음반으로 상품화되지는 못했던 <사대문을 열어라> 같은 경우를 논외로 치면, <흘러온 남매>는 현재 확인 가능한 광복 이후 최초의 대중가요 음반이 되는 셈이다.
분단에 대한 비탄과 통일 열망 노래한 KPK악단
이른 시기에 나온 대중가요 음반이라는 점 외에 <흘러온 남매>가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KPK악단과 관련 있다는 점이다. 현재 확인 가능한 KPK악단 관련 음향자료로는 이 <흘러온 남매> 음반이 유일하기 때문.
KPK악단이라 하면, 지금은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이름만 보면 혹시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극우비밀결사단체인 'KKK'단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KPK악단은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활동한 대표적인 악극단이다. 당시 한국 대중음악을 선도했던, 지금도 몇몇 사람들에게는 전설적인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공연단체.
<흘러온 남매> 음반딱지에 표기된 내용을 보면 노래 반주도 KPK악단이 직접 했다. 작사와 작·편곡을 모두 맡은 김해송이 KPK악단을 총지휘했던 사람이며(KPK라는 이름부터가 김해송, 백은선(연출), 김정항(무대미술) 세 사람 이름의 영문 첫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노래와 대사 녹음에 참여한 계수남, 남인수, 노명애, 심연옥, 이난영은 모두 1947년 당시 KPK악단 무대에서 주연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 | ▲ 1954년 무렵 간행된 노래책에 실린 <남남북녀> 가사 | | ⓒ 이준희 | | 신문광고로 확인할 수 있는 KPK악단 공연 내용에서 <흘러온 남매>를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1954년 무렵 간행된 노래책에 <흘러온 남매> 노래 가사와 거의 같은 것이 <남남북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을 볼 때, <흘러온 남매>는 1947년 9월에 KPK악단이 공연한 <남남북녀>의 주제가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이렇다할 자료가 없어 공연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이번에 공개된 <흘러온 남매>를 그 주제가로 본다면 <남남북녀> 내용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비 오고 바람 부는 하늘 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흘러온 남매/ 운다고 이 설움이 풀어질 거냐/ 눈물 어린 ***엔 원한이 깊다
하늘을 지붕 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바람 속에 갈 곳이 없어/ 찬 이슬 찬 바람에 쓰러져 울면/ 어머님의 옛 사랑이 다시 그리워
이북에 어머님은 안녕하신지/ 이북에 아버님도 평안하신지/ 집 없는 몸이라고 한을 할 거냐/ 울지 말자 이북에는 부모가 있다
위는 <흘러온 남매> 음반 앞면(A)에 있는 첫 번째 노래로 분단 이후 부모와 헤어져 남쪽으로 내려온 어린 남매가 부르는 내용이다(***은 음질상 확인이 불가능해 부득이 미표기). 그리고 아래는 뒷면(B)에 있는 두 번째 노래로 1, 2절은 이북에 있는 부모가 부르는 내용이며, 두 번째 노래 마지막 3절은 모두가 합창을 하는 대목이다.
(대사)이 에미는 너희들이 한없이 그리워도 가로막힌 운명선이라 천추의 한이로구나. 삼천리 강산에 삼팔이란 웬 말이냐. 목을 놓고 울어 봐도 시원치 않다 시원치 않다.
이 에미는 너희들이 한없이 그리워도/ 가로막힌 운명선이 천추의 한이로다/ 삼천 리 강산 위에 삼팔이란 웬 말이냐/ 목을 놓고 울어 봐도 시원치 않다 -1절
너희들은 남쪽에서 끝까지 참아 다오. 이 애비는 북쪽에서 힘차게 싸우겠다. 다 같은 혈족이요 우리나라 민족이 아니냐. 원수 같은 삼팔선은 우리의 힘으로 뚫고야 말 것이다.
너희들은 남쪽에서 끝까지 참아 다오/ 이 애비는 북쪽에서 힘차게 싸우겠다/ 다 같은 혈족이요 우리나라 민족이다/ 붉은 피 한 방울을 아끼일쏜가 -2절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지를 지키시오/ 우리들은 남쪽에서 바다를 지키리다/ 다 같은 혈족이요 우리나라 민족이다/ 이 강산 넓은 땅에 꽃을 피우자 -3절
아래는 <흘러온 남매> 두 번째 노래('가요114' 음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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