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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빛으로 다가왔지만 분단은 그림자로 그 뒤를 따랐다. 잠정적으로 지도 위에만 존재했어야 할 삼팔선은 사람들 뼛속 깊이까지 새겨진 일획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핏빛 짙은 암흑, 다가올 전쟁의 역사를 기록하는 첫 줄이기도 했다.

기대했던 <희망 삼천리>보다 <가거라 삼팔선>이 인기

광복이 되고 2년이 지나 우리 손으로 음반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그 음반에 담을 노래도 새로 만들어졌다. 한편으로는 '찾아 보자 자유를 건설하자 조국을/ 해방 삼천리'(<희망 삼천리>(김득봉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절)로 빛을 노래했지만, 같은 음반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자를 노래할 수밖에 없었다. <가거라 삼팔선>(이부풍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이었다.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다 같은 고향땅을 가고 오건만/ 남북이 가로막혀 원한 천 리 길/ 꿈마다 너를 찾아 꿈마다 너를 찾아/ 삼팔선을 헤맨다

아 어느 때나 터지려느냐/ 아 어느 때나 없어지려느냐/ 삼팔선 세 글자는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더냐/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


▲ <가거라 삼팔선> 신문 광고(1948년)
ⓒ 이준희
설비가 부족해 '숯불로 열을 가하고, 기름 짜는 압축기로 눌러 음반을 찍었다'는 전설 속에서 태어난 <가거라 삼팔선>. 그 음반을 사기 위해서는 미리 주문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초 <희망 삼천리>의 성공을 예상했던 음반사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가거라 삼팔선>의 인기가 당황스럽기도, 반갑기도, 씁쓸하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 마음속에 분단의 그림자는 그만큼 짙게 퍼져 있었다.

불길한 분단의 뒤를 따르는 전쟁의 기운 역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든 사람도, 노래를 부른 사람도, 노래를 듣는 사람도 모두 손 모아 '삼팔선아 가거라'하고 기원했지만, 그렇게 해서 없어질 삼팔선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기에 기대 남에는 '대한'이, 북에는 '조선'이 새로 생겨났다.

'이북도 우리나라요 이남도 내 땅인데…'

'달도 하나 해도 하나 사랑도 하나/ 이 나라에 바친 마음 그도 하나이련만/ 하물며 조국이야 둘이 있을까 보냐/ 모두야 우리들은 단군의 자손'(<달도 하나 해도 하나>(김건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 1절)이라며 남과 북이 하나임을 짐짓 강조해 보기도 했고, '임진강 나룻가에 소 먹이는 아해야/ 오늘도 삼팔선에 파수병이 섰더냐/ 이북도 우리나라요 이남도 내 땅인데/ 파수란 웬말이냐 꼴을 베는 아해야'(<흘겨본 삼팔선>(김건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 1절)라고 내 땅이 갈린 상황을 한탄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분단의 삼팔선은 파수병이 서로를 노리는 전선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노래책에 실린 <전우야 잘 자라> 악보(1954년)
ⓒ 이준희
결국 전쟁이 터지고야 만 1950년 6월 25일. 불을 뿜는 총포의 굉음과 삶을 찾는 피란민들의 아우성 속에 노래 소리는 한동안 묻혀 버렸다. 한여름 열기를 피로 적셔 넘긴 뒤 서울이 다시 남측으로 넘어오고 찬바람이 불고서야, 전쟁이 낳은 새로운 노래가 소리 높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래는 더 이상 남과 북이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우야 잘 자라>(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에는 동포이면서 원수가 된 적군에 대한 원한이 맺혀 있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흐르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 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있구나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고지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고무줄놀이 노래가 된 군가

군가이기도 하고 유행가이기도 했던 <전우야 잘 자라>는 아이들 고무줄놀이 노래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한 원한은 삼팔선의 뒤를 이어 모두의 뼛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런 원한 때문이었을까. 전쟁 이전에 나왔던 <아내의 노래>(김다인 작사, 손목인 작곡, 김백희 노래)는 '님께서 가신 길은 영광의 길이옵기에/ 이 몸은 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소'라며, 가서 죽을지도 모를 남편의 용기를 북돋는 <아내의 노래>(유호 작사, 손목인 작곡, 심연옥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 <전선야곡> 음반(1952년)
ⓒ 이준희
전쟁이 2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그것은 또 하나의 일상이 되었다. 언덕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수백, 수천 시체의 언덕을 새로 쌓아야 하는 와중에도, 그래서 총소리는 자장가로 들렸을지 모른다. 얼핏 낭만적이기까지 한 <전선야곡>(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신세영 노래)은 1951년 가을 전선의 모습을 담아 1952년 봄에 발표되었다.

가랑잎이 휘날리는 전선의 달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도 차가운데/ 단잠을 못 이루고 돌아눕는 귓가에/ 장부의 길 일러 주신 어머님의 목소리/ 아 그 목소리 그리워

들려 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아/ 꿈길 속에 달려간 내 고향 내 집에는/ 정안수 떠 놓고서 이 아들의 공 비는/ 어머님의 흰 머리가 눈부시어 울었소/ 아 쓸어안고 싶었소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전쟁 속 일상의 회복은 후방에서 더욱 뚜렷했다. 1952~3년에는 제법 많은 유행가가 피란지 부산과 대구에서 만들어졌다. 개중에는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샌프란시스코>(손로현 작사, 박시춘 작곡, 장세정 노래) 1절)를 부르는 꿈같은 노래도 있었지만, 현실은 또 현실이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쟁이 가져 온 상처인 이산의 아픔은 새롭게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을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데/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을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 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 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 보자

<굳세어라 금순아>(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가수 현인(1957년)
ⓒ 이준희
통일만 되면, 북진통일 그날만 되면 헤어진 금순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간절히 바랐던 그날은 지금껏 오지 않았다. 그 때 초생달 외로운 영도다리 위에서 피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했던 그 심정을, 요즘 날마다 등장하는 연속극 속 금순이는 모를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끝났으나 남은 것은 통일이 아니라 원한과 아픔으로 더욱 굳어진 분단이었다. 간단하게 죽 그어졌던 삼팔선은 이리저리 복잡하게 비틀린 휴전선으로 모습만 바꾸었다.

전쟁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리가 끝났다는 안도감은 모든 것을 새로 일구어야 하는 막막함과 범벅이 되었다. 다시 보따리를 싸서 피난지 부산을 떠나 서울로 환도하는 길은 희망과 불안이 엉킨 묘한 회한으로 설렜다. <이별의 부산정거장>(호동아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에 울린 기적 소리는 그러한 범벅과 엉킴으로 전쟁의 끝을 실감케 한 신호이기도 했다.

▲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사지(1954년)
ⓒ 이준희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 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의 아가씨가 슬피 우네/ 이별의 부산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 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유리창에 그려 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두 자 봄 소식을 전해 주소서/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쟁의 끝과 더불어 조금씩 되살아난 여유는 '서울 가는 십0놈들아 외상값을 갚고 가거라'하는 우스개 '노가바'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흔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일부가 되어 남았고, 노래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전쟁을 그렸던 그 때 그 노래들은 어느덧 비극적 클래식이 되고…

'편지 한 장 전할 길이 이다지도 없을쏘냐'(<한 많은 대동강>(야인초 작사, 한복남 작곡, 손인호 노래) 2절) 울분을 터뜨리는 실향의 아픔,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단장의 미아리고개>(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 노래) 2절) 절규하는 생이별의 한, '나이는 열네 살 내 고향은 황해도/ 피난 올 때 부모 잃은 신세이지만'(<어린 결심>(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남인수 노래) 1절) 구두닦이, 신문팔이로 살아야만 하는 전쟁고아의 애처로움. 모두가 그대로 삶이었고, 그 삶의 진정을 담은 노래였다.

노래 한 가락 목놓아 부른다고 잃은 고향을 다시 찾는 것도 아니고, 헤어진 남편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죽은 부모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나마 그런 노래가 있었기에 삶은 또 계속될 수 있었다. 의료시설도 충분치 않았던 피폐한 전후에 노래는 전국민적인 한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약이기도 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지 52년이 지난 지금, 신문 팔던 전쟁고아가 손자 둔 할아버지로 늙었을 만큼 세상은 변했다. 그러나 분단은 여전하고, 실향과 이산도 여전하다. 분단의 노래, 실향의 노래, 이산의 노래도 여전하다. 전쟁을 그렸던 그 때 그 노래들은 어느덧 비극적 클래식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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