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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평화통일연대와 민중연대,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등 충북지역 시민사회단체는 올해 1월 1일 뇌일혈로 자택에서 쓰러져 현재 충북대병원에서 투병중인 정진동 목사(74·민중운동가)의 병원비 마련을 위한 모금행사를 29일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벌였다.

▲ 정진동 목사가 입원한 병실을 방문 쾌유를 빌고 있는 백기완 선생, 유초하 교수(왼쪽부터)
ⓒ 김홍장
정 목사는 노동빈민운동의 '대부'격으로 30여년간 통일운동을 비롯 반독재투쟁, 민주화 운동, 특히 노동문제 중 서민들의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민중운동의 산 증인이다.

▲ 불꽃같은 삶의 주인공 정진동 목사
ⓒ 김홍장
이날 현장 모금 행사를 준비한 시민사회단체 가운데 충북평화통일연대 장민경 사무국장은 "정 목사는 오랫동안 통일·인권·민주화·반전평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평생 몸을 던져 외길을 살아오면서도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했다"며 "쓰러지기 바로 전날인 지난해 12월 31일 ‘국보법 연내 폐지’ 소식을 밤새워 기다리다 ‘국보법 연내 폐지’ 무산 소식에 못내 아쉬운 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새해 첫 해가 밝아오기도 전에 뇌일혈로 쓰러져 충북대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다"고 밝혔다.

이후 정 목사는 중환자실에 입원, 의식을 잃고 죽음과 길고 긴 힘겨운 사투 끝에 놀라운 정신적 투혼을 발휘,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아직 뇌일혈 후유증으로 왼쪽 팔과 다리가 마비돼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로, 상당 기간 재활 치료가 불가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목사 돕기 각계 참여 줄이어, 충북대 병원 측 입원 치료비 전액 부담키로

민중연대 조순형씨도 "지역의 모든 재야·민중·민주 세력이 뜻을 모아 정 목사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기로 하고 이날 현장 모금 행사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이날 모금행사에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이규재 의장을 비롯, 이종린 전의장과 고문단이 참석해 정 목사의 빠른 쾌유를 빌며 함께 뜻을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 정 목사의 인생 역정에 감복, 입원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기로 결정한 김승택 충북대 병원장
ⓒ 충북대 병원
이 밖에 ‘통일광장’ 안학섭 선생, 전 영등포 산업선교 조지송 목사,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 노영민 열린우리당 의원 등 각계각층의 따뜻한 관심과 참여가 줄을 이었다. 이날 행사준비위원회는 현장 모금 행사에서 "약 1000여만원 가량을 모금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지난주부터 정 목사의 건강 상태와 모금행사 준비 등을 취재하던 중 뜻밖에 김승택 충북대병원장이 병원비 전액을 부담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 병원장은 "민족의 평화적 통일과 반독재투쟁, 민주화운동, 반전평화운동, 소외된 계층의 인권 운동에 평생을 헌신해온 정 목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 한다"면서 "충북대 병원 측에서는 정 목사의 높은 공적과 어려운 형편을 감안하여 입원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1932년 12월, 충북 청원군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가마니를 짜서 팔고 짚신과 나무장사를 하며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이후 대한신학교를 나와 1950년 4월 초 고향인 청주에 전도사로 부임, 넝마로 생계를 유지하며 가시밭 인생을 걷게 된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인사로, 민주화 이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민중운동가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정춘수의 친일 행각에 부끄러운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시민들에 의해 철거되고 있다고 보도한 당시 기사 자료.
ⓒ 김홍장
그런 그에게 또 다른 역사의 아픔이 가슴에 서려 있다. 그것은 장남 고 정법영이 1978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의문사한 것이었다. 그의 사망과 관련, 국민의 정부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의문사로 판명 받았을 뿐 아직까지도 정확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막내아들 정세영도 청주 민정당사 점거로 농성 사건과 관련 집회시위법으로 구속되는 등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의 과정 속에서 정 목사를 둘러싸고 혹독한 탄압이 계속 가해졌다.

▲ 청남대를 대통령 유물 전시관으로 만든 것에 항의하며 철거 투쟁을 하고 있다. 뒷 벽면에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 김홍장
1972년 3월 정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충북노회 교역자로 도시산업선교회의 뜻을 품고 서울 영등포 산업선교회 조지송 목사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정 목사는 서슬 퍼런 군사 독재 시대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청주시청 청소부 사건’을 주도하게 된다. 170여명 청소부들의 근로조건을 해결해주고 퇴직금 제도까지 만드는 최초의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후 신흥제분 노동조합 사건을 비롯해 무려 800여건의 각종 노동·인권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어느날 청주도시산업선교회에서 100일이 넘는 노동자들의 단식투쟁 있은 이후 이곳은 문익환 목사, 문동환 목사, 김관석 목사, 인명진 목사, 조화순 목사, 안광수 목사, 박형규 목사, 권호경 목사, 허병섭 목사, 조남기 목사, 김진홍 목사 조승혁 목사 등이 찾아와 뜻을 나누는 장소로 자리잡게 된다.

▲ 청남대 벽면에서 철거된 역대 대통령 전시관의 모습, 우측부터 조성학 신부, 정진동 목사, 신성국 신부가 철거된 현장을 확인하고 있다.
ⓒ 김홍장
뿐만 아니라 함석헌 선생과 성래운 교수, 계훈제 선생, 백기완 선생, 고영근 목사, 안병무, 한완상, 김용복 선생 등 민주 인사들이 집회가 있을 때마다 정 목사와 늘 함께 했다.

정 목사는 1979년 옥살이를 비롯해서 무려 30여차례가 넘는 연행과 옥고를 치러야만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정 목사에게 정부가 준 것이라고는 1980년 광주5·18민주화운동과정에서 광주민주유공자로 인정된 것이 전부였다.

현재 논란을 겪고 있는 ‘과거사 청산’ 문제가 표면화되기 훨씬 전인 1996년 친일 역사 청산을 주도하며 행동에 옮겼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춘수의 친일 행각을 알려내는 운동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전개, 당시 청주 3·1공원에 세워져 있던 친일 정춘수 동상을 철거하는 등 평생을 통일운동과 반전평화 운동, 소외된 민중들의 인권 운동에 앞장서 왔다.

이에 몇몇 뜻있는 학계와 민주인사들이 모여 아시아의 노벨상인 막사이사이상 인권상 후보로 추천하려는 움직임에 정 목사 본인이 나서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며 완강히 거부하고 나서 스스로 이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아온 정 목사의 집필로는 "노동현장에 보낸 편지" "민주화로 가는 길" "민중의 자유는 멀고 험하다" "끌 수 없는 정의에 불꽃" "나는 이 길을 가야한다" "격동 30년"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김홍장 기자는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협동사무처장으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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