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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 본회의장 앞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및 치적을 기록한 명문.
ⓒ 이민정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셨다."(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옆 명문)

"거짓말이다. 그런 기록 본 적 없다. 이승만은 주변에 알리지 않고 혼자 도망쳤다."(한국현대사 연구자들)

국회 본회의장 입구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명문(銘文)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이 전 대통령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과 명문이 국회의사당에 설치된 것은 이 전 대통령이 제헌국회 의장을 지낸 인연 때문. 이승만기념사업회(회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는 지난 97년 국회에 이 전 대통령 동상건립 추천서를 제출했고, 2년 뒤인 99년 12월 '의회 지도자상 건립안'으로 국회를 통과해 2000년 5월 15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러나 이승만 동상은 건립 초기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독립유공자유족회 등 관련 단체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의회주의를 파괴한 이 전 대통령을 의회 지도자로 기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것이었다.

"사수 결의하는 의원들, 도망가는 이승만"

이 전 대통령의 생애와 치적을 기록한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오마이뉴스>가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문의한 결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서울을 떠난 뒤 거짓말이 담긴 '대국민 방송'을 내보냈을 뿐이다. 그가 국회의원을 피신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다.

서중석(한국현대사) 성균관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관련 자료를 거의 다 살펴봤지만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피신시켰다는 건 처음 들어본다"며 "이승만은 50년 6월 27일 새벽 2시에 국회의원은 물론 국무위원 대부분에게도 알리지 않고 대구까지 혼자 도망갔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국회의원들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심야국회를 열어 전시대책을 논의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한 뒤 "이때 신 장관과 채 총장에게 상황을 정확히 보고받지 못한 의원들은 '수도사수 결의'를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서 교수에 따르면, 급히 대구까지 내려갔던 이 전 대통령은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것도 아닌데 남쪽으로 너무 많이 내려왔다"는 측근들의 이야기를 듣고 27일 대전으로 올라와 "국군이 승리하고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유명한 대국민방송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현대사 연구자 A씨도 "당시 무초 미국 대사도 이승만에게 먼저 떠나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며 "선우종원 같은 사상검사들도 '좌익 제거에 앞장선 자신들에게까지 알리지 않았다'며 배신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국민과 의회도 속였는데 의회 지도자라니"

한편 전황을 정확히 듣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있던 국회의원들은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하기 시작한 28일 오후가 돼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나 국군이 한강 다리를 폭파했기 때문에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난 이들이 많았다.

서 교수는 이에 대해 "김규식, 조소앙, 엄항섭 등 임정 출신 중간파 의원들은 거의 못 떠났고 피난 직전까지 기밀자료를 정리하던 조봉암 당시 국회 부의장도 한강을 못 건널 뻔했다"며 "이승만이 국회의원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알렸다면 많은 의원들이 전쟁 초기에 납북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홍석률(한국현대사) 성신여대 교수도 의원들에게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은 배경에 대해 "전쟁 직전에 실시된 1950년 5.30 총선에서 이승만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민족주의 성향의 중간파 의원들이 국회 다수를 차지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전 대통령은 서울 수복 후 자신의 잘못 때문에 서울에 남겨졌던 국회의원 및 시민들에게 사과하라는 각료들의 조언도 듣지 않았다.

서 교수는 "이승만은 사과하기는커녕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북한군 점령 아래서 생활했던 시민들을 '잔류파', '적에게 협력한 부역자'로 낙인찍고 처벌했다"며 "이처럼 의회와 국민을 속이고도 반성하지 않은 이승만을 의회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기리는 건 부적절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문구 수정해야... 동상부터 치워라"

이에 대해 명문 문구를 수정하거나 국회의사당내 이 전 대통령 동상의 존치 자체를 재고해야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강창일 열린우리당 의원은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동상 옆을 매일 지나다니면서도 명문에 그런 문구가 있는지 몰랐다"며 "사실 관계를 확인해 본 뒤 <오마이뉴스> 지적이 맞다면 국회에 문구 수정을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은 "국회의원들이 4.19 혁명으로 민중이 끌어내린 독재자 동상을 다시 국회에 세운 것 자체가 근본적인 잘못"이라며 "동상을 치운 뒤 동상을 받치는 좌대만 남겨놔 국회의원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제2의 제헌국회'라는 기대까지 받으며 출범한 17대 국회가 역사적 사실이 왜곡돼 있는 이승만 동상의 명문부터 바로잡을지 주목된다.

"이승만 박사는 진정한 의회주의자"
[전문]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옆 명문

▲ 이승만 동상 명문
ⓒ오마이뉴스 이민정
다음은 이승만 동상 옆 명문(銘文) 전문이다.

우남 이승만 박사

우남 이승만 박사(1875-1965)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부터 조국의 근대화와 반식민지 투쟁에 투신하셨다. 이후 미국에 건너가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1운동이 난 그해 12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임되셨다.

1948년 제헌국회의 초대의장이 되어 대한민국의 기초가 된 헌법을 제정, 공포하시고 이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8년 7월 24일 취임하였으며, 6.25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셨다.

이에 우리들은 건국의 기초를 닦고 탁월한 외교로 국권을 수호, 신장하고 의회 정치 발전에 초석을 놓으신 우남 이승만 박사의 뜻을 기리고, 의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가는 데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동상을 국회에 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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