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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국회 내 간첩암약 폭로사건 이후, '고문'이라는 이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후 주 의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은 자신이 고문에 의해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우리사회에 고문은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90년대 이전의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90년대는 물론 2000년도까지도 여전히 공안기관 지하 밀실로 끌려가 국보법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이 자행됐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여 차례에 걸쳐 고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보도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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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삼석씨가 지난 18일 오후 광화문에서 열린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위한 국민촛불대행진' 중 연단에 올라와서 '국가보안법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왔는데, 저는 살아서 나와서 죄송하다'며 큰절을 한 뒤 국가보안법에 의해 고문당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저는 93년 9월 정기국회에서 안기부법 개정안 통과를 앞두고 터졌던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의 당사자입니다. 이 사건은 안기부법 개정안을 막기 위해 안기부(김 덕 안기부장)가 자신들의 프락치였던 백흥용을 이용해 조작한 사건이나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9월 8일 정오 경, 저는 집에서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저지 문제'에 대한 원고를 쓰던 중 안기부 수사관 10여명에게 불법연행됐습니다.

압수수색영장도 없이 구두를 신은 채 방에 들어온 수사관들은 수갑을 채운 뒤 저의 안경을 빼앗고 주먹으로 명치를 쳐 무릎을 꿇게 한 뒤 제가 10년간 보아오던 도서문헌들과 3년간 군사관련자료, 일본의 군사대국화와 전후(戰後)처리 관련자료, 신문스크랩, 디스켓 등 사과상자로 수십 상자를 압수했습니다.

봉고차는 안기부 지하실로 향하고

여기에다 신혼사진, 신혼비디오 테이프, 일기장, 통장, 아내가 모은 정신대 활동 관련자료, 정신대 비디오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연행되기 한 시간 전쯤에는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안기부 협력자 백흥용의 계획에 따라 강모씨가 불러낸 여동생도 연행되었습니다.

집 앞에서 봉고차에 실렸는데 차 안에서는 고개를 들면 구둣발과 주먹질이 날아왔습니다. 남산 안기부 지하실에 연행되자마자 체육복으로 갈아 입고는 17일간 구타와 기합, 협박, 성추행, 잠 안재우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북한에 언제 갔다 왔느냐", "오스트리아에서 누구와 접선했느냐", "일본에서 북한의 누구와 만났느냐", "국내 연계 조직을 대라"며 위협했습니다.

연행 뒤 3, 4일간 시간 날짜 개념을 잊은 채 거의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구타와 원산폭격, 서서 무릎 쪼그리기와 같은 가혹행위를 수십 회에 걸쳐 당하며 유도신문과 협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저들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습니다. 다음 날 영장을 천천히 읽어보겠다며 수사 책임자에게 요구했으나 그는 묵살했습니다. 화장실 갈 때는 수사관 2-3명과 동행했습니다.

약 일주일 후 화장실에서 160번 명찰을 단 수사관이 저의 성기에 다가와 자기 손이 더럽혀진다며 치솔을 대고서 "다마 넣었나 보자" "얼마나 큰가"하고는 성기를 건드린 후 "다마를 넣지 않았네"하고 말하며 자기 손이 더럽혀졌다고 비누칠까지 하였습니다.

약 열흘 후에는 수사관 160번과 다른 수사관에게서 잠 잘 새벽에 수사내용과 상관없는 한 여성을 대며 "노처녀 몇 번 먹었냐" "맛있더냐"하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전 수차례 그만 하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아랑곳 않고 계속 성적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160번 명찰 단 수사관이 성고문

수사 중에 "누구누구도 다 불었어" "한번 거꾸로 매달아볼까" "널, 영원히 매장시킬 수 있어" "그 머리로 무슨 운동을 해"하는 수사책임자의 원색적인 인신공격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학생운동과는 질이 다르다"며 제가 무슨 거창한 사건 주모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목욕을 시킨다며 구타당한 왼쪽 가슴의 심한 통증을 가라앉히는 샤워를 하루에도 몇 번씩 했고, 협조 않으면 임신 8개월인 아내를 연행조사하겠다는 협박을 계속 했습니다. 다른 수사관은 "동구에서 공부한 이후 우리 회사에 취직하라"며 회유하기도 했습니다.

수사 중에 저의 전화와 안방 대화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광범위하고도 치밀하게 전화도청을 했을 뿐만 아니라 1년여에 걸쳐 미행과 사진촬영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피의자 신문조서를 이미 한꺼번에 작성해 놓은 뒤 날짜를 적당히 소급하여 여러 날에 걸쳐 조사한 것으로 조작했습니다. 공문서 위조란 범죄행위와 다름없습니다. 일본에서 북한공작원을 만나고 왔다는 진술 조서는 쌓여만 갔습니다.

이 조작수사를 온 몸으로 거부한 저는 9월 20일 변호인 접견 때 혀를 깨물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자해를 시도했습니다. 안기부 지하실을 잠시나마 빠져나와 병원으로 실려 갈 때 조금은 자유로운 공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목과 꼬리뼈를 심하게 다쳐 병원에서 X-레이로 목과 허리, 꼬리뼈를 약 20번 찍었습니다. 꼬리뼈가 틀어진 채 안기부로 돌아왔기에 안기부 출입 의사가 항문에 손가락을 넣어 바로 잡았습니다. 참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목에 깁스를 하고 꼬리뼈를 다친 상태에서도 소파를 두텁게 하는 조치만 취한 채 수사는 계속되었습니다.

깁스를 한 상태로 한밤 중에 3시간여 동안 동료를 대라는 반인간적인, 동물적인 수사를 받았습니다. 순간 86년 10월 5공 치하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아직까지 극도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문국진씨가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인간 중에는 가련한 사람의 이야기를 즐기며 동시에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염치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하였습니다.

"다른 방으로 옮겨 옷 벗겨야 되겠구만"

수사종료 이틀 전에 수사책임자와 다른 수사관들은 "너, 태어날 때 너희 부모가 북한 보고 낳았지"하며 "이제 감옥생활하면 관계는 어떻게 가지냐", "혼자 벽 보고 해야지"하면서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수사가 종료됐을 때 제 이름 앞에는 '간첩'이란 두 글자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다른 방에 있던 제 여동생에게 수사관들은 "머리를 잡고 벽에 부딪치게 하거나 뺨을 수없이 때리고, 변호인 접견 뒤에는 대화내용을 다 진술하라고 닦달하면서 잠을 재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조사 중에 "이거 안 되겠구만. 다른 방으로 옮겨 옷 벗겨야 되겠구만. 인간 이하 대접을 받아볼래"하는 성적 모욕을 심하게 당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제 아내인 윤미향(당시 정대협 간사)씨가 9월 20일 오후 4시경 서울지검에 안기부원들을 '불법연행과 가혹행위 혐의'로 조사하여 처벌해 달라며 고발장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혐의 없음' 판정을 내렸습니다.

신혼 6개월만에 '간첩의 아내'가 된 채 만삭이 된 몸으로 남편구원활동, 정신대 대책활동, 집회참석, 면회, 딸아이 키우는 일 등 1인 4~5역을 도맡아 하느라 아내는 매일 파죽음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를 보면 신혼 때 '생고생'시킨 제가 그저 죄인이라는 생각 뿐입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채 검찰로 이송되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검찰은 계속 진술조서를 작성했습니다. 전 뒤늦게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따라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려 했으나 검사는 폭언을 퍼부으며 "너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한 뒤 마음대로 하라며 이후에는 입회서기가 신문조서를 작성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당시 검사가 형사소송법상 권한에 따라 사법경찰관에 불과한 안기부의 수사를 감독하였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전문 법률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묵비권'과 '증거능력'이라는 말을 꺼내자 검사는 "어쭈, 증거능력까지"하며 비아냥댔습니다. 검사의 그런 모습을 보니 더는 검찰에 기대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권을 보호하기는커녕 오로지 처벌 대상으로만 삼는 법기술자에게 기대는 것 자체가 무리였습니다. 또 검찰의 공소장은 안기부의 논리를 100% 옮겨놓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소장의 정형화된 유치한 문구는 반세기동안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서두를 장식해 왔습니다.

법원 판결문, 검찰 공소장 그대로 옮겨

저는 영등포 교도소에, 여동생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93년 겨울 내내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안기부 프락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었습니다.

94년 2월 하순 1심에서 검찰은 15년을 구형했습니다. 1심 법원은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습니다. 여동생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6개월만에 풀려났습니다. '여간첩'을 만들어 놓고 풀어 준 우스운 상황입니다. 탄원에 참가한 국내외 특히, 1만8천여 오사카 재일동포들의 서명용지가 힘을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94년 7월 7일 2심에서 저는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이 선고되었습니다. 94년 10월 25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습니다. 사흘 뒤 안기부 프락치 백흥용은 94년 10월 28일 독일 베를린에서 김삼석 남매간첩사건을 조작하는 데 자신이 개입했다며 프락치 상부선인 김성훈 안기부 과장, 윤동환 수사관을 촬영한 녹화테이프를 공개했습니다.

94년 10월 말 국내에서 민변의 이기욱, 이덕우 변호사가 베를린에 가서 진상조사를 하고 난 뒤 대한변호사협회가 국정조사권 발동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95년 1월 국회정보위원회에 출석한 권영해 안기부 부장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부영, 유준상 의원에게 백흥용이 안기부 요원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백흥용이 안기부 프락치라는 것을 안기부장이 인정했는데도 저는 97년 9월 30일 출소하기까지 대전교도소에서 수감되었습니다. 수형시절 초기에 저는 목, 허리와 꼬리뼈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렇게 4년 20일을 억울하게 0.75평 감옥 안에서 생활해야 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출소한 지 1년이 지난 98년 10월 경 수원 장안구 집에서 아이를 업다 나도 모르게 갑자기 쓰러져 가족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허혈성 질환이었습니다. 수원 한국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바 있고, 그 뒤 약 3개월 정도 투약치료를 했습니다.

98년 12월 경 보안관찰법 상 출소사실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집 앞에서 수원 중부경찰서에 한때 연행되었습니다. 출소 1년 5개월만인 99년 2월 25일에 법무부가 자격정지 4년 잔형의 집행을 면제시켜 저는 복권되었습니다. 한편 99년 10월 7일 보안관찰 처분취소 청구행정소송에서 '나홀로 소송'으로 서울고등법원의 취소판결을 얻어내고 2000년 1월 28일 대법원에서 확정된 바 있습니다.

그 후 2003년 7월 저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다 간첩 출신 조사관이라는 색깔론에 또 한번 홍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90년 5월, 군 생활 안내 지침서인 '청년과 군대'를 집필하고 나서 10월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세상에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뒤 '보안사 안기부 치안본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180쪽의 자료집을 만들어 공안수사기관이 정권 안보를 위해 경쟁하듯 전화도청, 정치사찰, 학원망원, 프락치공작,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하는 반인권 행위를 폭로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민시대에 제가 이 자료집의 한 소재가 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안기부는 해체했어야 합니다. 헌법 제17조, 제18조에는 통신과 사생활의 비밀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지만 공안당국이 자행하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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