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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의 국회 내 간첩암약 폭로사건 이후, '고문'이라는 이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그 후 주 의원에 의해 '간첩'으로 지목된 열린우리당 이철우 의원은 자신이 고문에 의해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우리사회에 고문은 없었으며, 있었다고 해도 90년대 이전의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90년대는 물론 2000년도까지도 여전히 공안기관 지하 밀실로 끌려가 국보법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이 자행됐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증언들이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10여 차례에 걸쳐 고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보도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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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내 '고문 수사'의 담당 검사는 정형근"

▲ 독일유학생부부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던 박종대씨. 지금은 국내에서 번역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박종대
1996년 10월 나는 이른바 '독일 유학생 부부 간첩 사건'으로 아내와 함께 안기부에 구속되었다. 세 살 난 아들을 혼자 바깥 세상에 남겨둔 채였다.

구속 사유는 간단했다. 1994년 안기부에서 북한의 고급 공작원으로 발표한 독일 교민 김용무씨와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창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으로 시끄럽던 시절이었다.

나는 당시 안기부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물론 지금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직접 확인도 했거니와 6년 동안 줄곧 곁에서 지켜본 바로도 그랬다. 하지만 안기부의 발표가 나자 가깝게 지내던 교민이나 유학생들조차 그를 멀리했고, 그 또한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스스로 세상과 담을 쌓고 칩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그를 계속 만났다. 흔한 '조작 사건'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유학생 사회에까지 심어놓은 안기부 프락치에 의해 나의 행적은 낱낱이 파악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우리 부부를 옭아매는 올가미가 되었다. 나는 운동 경험도 민주화 경력도 없는 사람이다. 기껏해야 사리에 매임 없이 사고하고 행동하려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안기부에 들어가면 언제든지 간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흔히 국가보안법 폐지를 두고 경제도 어려운데 무슨 그따위 것에 신경을 쓰느냐고 한다.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양심이다.

이하의 내용은 출감 직후에 정리해 놓은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아내와 함께 안기부 취조실로 끌려가다

독일유학생부부간첩단사건이란?

1994년 10월 안기부는 '한병훈·박소형 독일 유학생 부부 간첩 사건'을 발표했다. 두 사람은 독일 유학 중 김용무씨에게 포섭되어 네차례에 걸쳐 입북해서 공작원 교육을 받았고, 간첩으로 암약하던 중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진술을 통해 독일 유학 중에 김용무씨와 가깝게 지낸 성균관대 정현백 교수와 다른 교수 두 명이 용공 혐의로 안기부에 긴급 구속되었지만 곧 풀려났다.

나는 독일 쾰른대학 유학중이던 1996년 방학때 한국에 잠시 들렀다가 <한겨레 21> 잡지를 김용무씨에게 빌려주었다는 것이 문제가 돼 구속됐다. 1심에서 국가기밀누설죄가 적용되어 3년6월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는 국가기밀누설죄가 풀려 2년 6월로 감형됐다. 대법원에서 '심리 미진'이라는 이유로 파기 환송되어 다시 고법에서 재판을 받은 뒤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김용무씨는 안기부 발표로는 독일의 권위 있는 주체사상 강사였지만, 내가 보기엔 곧지만 무능력한 선비였다. 작년에 송두율 교수와 함께 귀국할 예정이었으나 국가정보원에 의해 사전 영장이 청구된 것을 알고 비행기표를 반납했다고 한다. / 박종대 기자
취조실은 내가 3층, 아내가 2층이었다. 10평 정도 크기의 취조실에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침대와 책상이 눈에 띈다. 책상 앞에 앉자 20여 명의 수사관들이 매섭게 노려본다. 그러더니 대뜸 묻는다.

"북한에 몇 번 갔다 왔어?"
"노동당엔 언제 가입했어?"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간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대답이 못마땅한지 그들은 앉은 자세에서 내 안경을 벗기고는 뺨을 후려친다. 그러고는 일으켜 세워 이빨을 꼭 다물게 한 뒤 다시 뺨을 갈기고 주먹 안쪽으로 얼굴을 난타한다. 가슴과 아랫배, 다리에도 그들의 손과 다리가 날아든다. 그들의 눈에 살기가 번뜩거린다. 난생 처음 당해 보는 폭력이었다. 그것도 국민의 인권과 자유를 지키라고 권력을 쥐어준 국가 기관에 의해서였다. 그 뒤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폭력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한바탕 폭력을 휘두르고 나면 벌을 세웠다. 엉덩이와 발뒤꿈치를 벽에 붙이고 양팔을 바짝 귀에 댄 채 한 시간 이상씩 서 있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팔이 내려오거나 자세가 흐트러질라치면 수사관들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원래 단순해 보이는 벌이 시간이 지속되면 더욱 견디기 어려운 법이다. 팔은 떨어져 나갈 것 같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육체적인 고통도 고통이지만 심적인 수치심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아마 상대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너뜨려 자기 방어 의지를 꺾어 버리려는 수단인 듯했다.

사실 안기부 수사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시켜 버린 상태에서 시작한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는 한에서나 가능하지 만일 스스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쉽게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이렇게 나는 인격적으로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야, 넌 왜 그렇게 비겁하냐. 너 마누라도 이렇게 되어 있는데 둘 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래? 애도 하나 있다면서? 나 같으면, 차라리 내가 다 했소. 그러니 우리 마누라는 살려 주시오, 하겠다.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아내도 이런 꼴을 당하고 있을까? 아니, 여자한테까지 이러지는 않겠지? 아냐, 어쩌면 더 할지도 몰라. 나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밖에는 없었다. 덫에 걸린 한 마리 벌레나 마찬가지였다. 살기 위해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직접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서히 나의 정신을 파괴시켰고 나를 조금씩 길들여 갔다.

첫날의 수사는 오후 3시경에 시작해서 다음날 10시경에 끝났다. 이제 침대에 누워서 자란다. 잠이 올 턱이 없다. 자는 둥 마는 둥 시늉만 하고 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라고 깨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밥을 삼켜야만 하는 생리적인 욕구가 너무 싫었다. 밥을 먹고 나자 다시 어제의 과정이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그러던 중에 취조실 문이 열리고 수사관들이 전부 일어선다. 꽤 높은 사람인가 보다. 그가 내게 담배를 한 대 물려준다.

"우리가 너 같은 사람을 구속해서 뭐가 좋겠어? 수사에 협조만 하면 돼. 여기서 살아 나가는 방법은 딱 세 가지다. 첫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하고 용서를 구해라.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대남 공작부지, 너 같은 피라미가 아니다. 둘째, 수사에 협조해라. 수사관이 뭘 원하는지를 분명히 캐치해서 시키는 대로 해. 어떤 사람은 여기 들어와서 괜히 눈치 없이 행동하다가 욕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수사관이 하나를 원하면 열을 알아채고 말하기도 해. 누가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는지 이야기 안 해도 알아들겠지? 셋째, 우리와 거래를 하는 경우다. 우리에게 줄 것은 주고 얻을 것은 얻어라."

"여기에서 살아나가려면 세가지 중 선택을 하라"

나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다만 여기서 살아 나갈 방법이 있다는 말에만 귀가 솔깃했다.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것이 나에게 해당될까? 애당초 북한과 관련해서는 털어놓을 것이 없고, 그러니 거래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수사관이 원하는 것을 재빨리 눈치 채서 시키는 대로 하라는 소리일까?

둘째 날도 꼬박 새고 새벽 여섯 시경에 침대에 누웠다. 사흘째도 전날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수사관의 입맛에 맞는 말이 나올 때까지 얻어터지고 벌을 서야 했다. 어느 수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넌 지금 여기서 양반 대접받고 있어. 진짜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들어오면 뼈마디도 추리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 알았어? 힘들더라도 참아. 김용무가 나쁜 놈이지, 니가 무슨 죄가 있겠어? 학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정말 안타깝다. 어린 아들도 있다면서? 너희는 부부가 함께 들어왔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는 나갈 거야. 법에도 인정이라는 게 있거든.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가두어 놓지는 않아. 그러니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나갈 거야. 수사에 협조해. 알았지?"

부부를 구속하면 전혀 낯선 두 사람을 엮는 것보다 조작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인질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아이라도 있으면 금상첨화다. 게다가 법정에서의 증거능력에 있어서도 유리하다. 확고한 물증이 없을 때는 피의자의 자백이 중요한데, 이때도 한 사람의 자백만으로는 증거로 채택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관련된 다른 사람의 증언이 있으면 증거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니까 두 사람을 엮어 서로 자백을 짜맞춰 놓으면 한 쪽의 자백이 다른 쪽의 범행을 증명하는 올가미가 되는 것이다. 손 안대고 코푸는 격이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우리 두 사람의 진술을 맞추려고 노력했고, 나중에는 정 맞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상대방의 진술서를 가져다가 아예 베끼게 하였다.

나흘째 되던 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뒤척이고 있는데 누가 들어와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잠을 잘 때도 수사관 두 명이 항상 지키고 있다).

"언제 잠들었어?"
"한 시간 가까이 된 것 같아."
"이상한 점은 없어? 잠꼬대 같은 건 안 해? 잠은 잘 자는 것 같아? 계속 잘 체크해 봐."

순간 소름이 쏴 하고 끼친다. 이 사람들은 나의 무의식까지도 감시를 하는구나.

내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부모님이 면회를 오신 뒤였다. 지병으로 혼자 몸도 간수하기 어려운 어머니가 내 가슴을 치시며 말했다.

"이 나쁜 놈아, 그래 할 기 없어 역적질을 했나, 내가 니보고 뭐라 카더노, 그런 데 가면 그런 사람 조심하라고 그랬제? 근데 이게 우찌된 일이고? 내, 니는 믿었다. 그런데 니가 날 속있나? 니가 날 속있다고? 난, 이제 몬 산다. 우리 고만 죽자."

아, 이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이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를 속였다는 말에 그저 가슴만 무너져내린다.

"아이구, 선생님들, 제발 우리 아들 살리 주이소. 절대 그럴 아가 아입니더. 얼마나 착하고 바른 아안 줄 아십니꺼, 우린 지금까지 정말로 바르게 살았심니더. 정말 남들한테 나쁜 짓 안 하고 살았십니더!"

수사관들은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말투도 상냥하게 바뀌었다. 혹시 가혹행위 같은 것은 없느냐는 형의 물음에 당당히 말한다.

"안기부, 많이 바뀌었습니다. 옛날 안기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전혀 걱정 마십시오. 근데 박종대씨가 협조를 잘 안 해서…."

호칭도 박종대씨로 바꾸며 천연덕스럽게 내놓는 말이다. 어머니가 다시 통곡한다.

"니, 숨기는 거 있으면, 응∼응, 싹 다 말해라. 응∼응, 니가 살고 우리가 사는 길은, (통곡) 다 말하고 용서를 비는, 응∼응, 길뿐이다. 만약 니가 이번에도 내 말 안 들으면, (통곡) 인자 니는 내 새끼 아이다. 응∼응, 우리 의절하는 기다. 응, 알았제?"

몇 년 전부터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도 목이 메어 말을 밖으로 내어놓지 못한다.

면회 시간은 15분이었다. 소파에 쓰러지시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그만 자리를 떠야 했다. 그 순간 아이가 아빠를 외치며 달려온다. 아빠, 아빠를 외치며 달려오는 아이를 누군가 가로막는다. 내 뺨 위로 길게 눈물이 흐른다.

그 뒤부터 나의 대답은 '김용무씨가 간첩이 아니다'에서 '간첩인 줄 몰랐다'로 바뀌었다. 안기부라는 과거의 악명에 눌리고, 구타와 체벌에 찢기고, 아내와 아들, 그리고 부모라는 인륜을 볼모로 잡힌 상태에서는 이미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김용무씨로부터 사상 학습과 시청각 교육을 받은 것으로 되었다(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김용무씨에게서 북한 비디오를 몇 편 빌려보았다. 독일에서는 북한 영화를 보는 것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또 본다고 해서 뭐 그리 대수겠는가? 마르크스 책을 읽으면 무슨 큰일이라고 날 듯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은 빼고 말이다).

그러려면 증거가 있어야 했는데, 내가 원체 아는 게 없다 보니 수사관들이 학습 커리큘럼까지 정해 주며 북한의 원전들을 갖다 주었다. 그러면 나는 그 책들을 읽고 정리했다. 이렇게 적은 내용이 아마 논문 몇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안기부에서 주체사상을 처음으로 공부하다

이처럼 나는 안기부에서 주체사상을 처음 공부하였다. 다른 조서 내용도 이런 식이었다. 이를테면 '북한에 갔지?'하는 물음에 그것만큼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안 갔다'고 하면 입북 제의는 받은 것으로 하자고 했고, 아들 녀석 돌에 김용무씨가 축의금 조로 준 5만원 상당의 돈은 느닷없이 한국에 들어오는 공작금으로 바뀌었으며, '한국 잘 갔다 오라'는 말은 '남한 정세를 파악하고 오라'는 말로 탈바꿈하였다. 이렇게 나는 안기부에 의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

마지막으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현재 국가보안법에 관한 정치적 공방을 지켜보면 여야 어느 쪽이나 재판부의 판결문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들이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같잖은 짓이다. 과거의 사법부가 어쨌는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조작사건들을 방조하지 않았는가?

판결문의 내용이라는 것도 그렇다. 내 경우 안기부에서 작성한 조서를 베낀 것이나 다름없다. 법정에서 가혹행위와 불법적인 수사 과정을 호소했지만 모두 배척되었다. 오히려 항소심 재판부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발표를 믿지 않는 사람은 사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만일 사법부만이라도 양심과 상식을 존중하고 국민의 인권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더라면 공안기관의 조작사건들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80년대와 90년대 초에 구속되지 않은 걸 정말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랬더라면 한층 혹독하게 다루어졌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김용무씨가 한국에 들어와 증언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진실이 드러나면 수사 과정에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것도 자연스레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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