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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썼던 기사인 <음식 만들기 전담하는 남편의 고민>에서 유별나게 술을 좋아하고, 많이 마신다고 잠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유별난 술 버릇에 대해 다음에 언급한다고도 했었구요. 그 부끄러운 과거를 이제 고백할까 합니다. 그리고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이 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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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만들기 전담하는 남편의 '고민'

결혼을 하고 한두 달 정도 제가 술을 자주 마시는 것에 대해 아내는 그냥 신혼 초 인사때문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연애를 할 때만 해도 아내는 제가 어색한 술자리를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만드는 것을 상당히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회사 회식에도 불려나가 기쁨조 역할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을 넘어서면까지 술 마시는 횟수가 줄어들지 않고, 귀가 시간도 새벽 네 시를 넘기는 경우가 많아지자 아내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참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면 왜 그렇게 친구가 생각나고 대화가 재밌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저의 부름에 어김없이 달려오구요.

술 마신 다음날, 어차피 밥을 하는 것은 제 몫이라 해장국을 먹는 따위의 황홀한 호사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내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길 때는 일주일 정도까지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제가 한 밥은 참 잘먹었습니다. 한 끼도 거르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 동안은 잠잠하다가 다시 술을 먹는 날들이 이어지자, 아내가 처음 꺼낸 카드는 '각서'였습니다. 각서의 내용은 "귀가시간이 열두 시를 넘길 시에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99년 2월에 결혼을 했으니까, 첫 각서를 쓴 것은 아내가 우리 아들을 가졌을 때로 기억합니다.

12월 말 처음으로 각서를 쓰고 아들이 태어나서 두 돌을 넘길 때까지 그 각서는 가뜩이나 좁은 집 거실에, 그것도 결혼 사진 옆에 떡하니 액자로 해서 걸려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서귀포에서 올라오실 때는 재빨리 떼서 숨겨놓았구요.

그러나 아내는 시간이 갈수록 이 각서의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내의 다음 조치는 정말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술 약속이 있는 날, 딱 한 번 제게 문자로 귀가 시간을 통보한 후 그 시간을 단 일초라도 초과하면 아예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녁을 같이 먹다가 밥상에서 아주 천천히 거사를 앞둔 사람처럼 굳은 결의에 차서 제게 얘기를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저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문을 잠그면 뭐 내가 갈 데가 없나'라며 콧방귀를 뀐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내의 이 방법이 단순히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제가 항상 방탄막처럼 사용하는 누나들(아내의 입장에서는 손윗 시누이)에게도 미리 언질을 줬더군요.

"혹 사랑하는 동생이 내가 문을 안 열어줘서 형님들 집에 와도 절대 문 열어주지 마시라. 그래야 사랑하는 동생의 술버릇을 완전히 고친다"라고 말입니다(나중에 셋째 누나가 저에게 양심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백기투항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예 문을 안 열어주는데 어쩔 도리가 없더군요. 한 번은 친구 강아무개군의 집에서, 또 한 번은 김아무개군의 집에서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친구들의 아내들과 허물없는 사이라고 해도 솔직히 많이 창피하더군요.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아내는 제 귀가가 늦은 날이면 어김없이 문자를 보냈고, 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기는 날이면 저는 문 앞에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비는 상황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물론 부부싸움할 때는 어김없이 주된 이유로 등장을 했구요. "정말 너처럼 독한 여자 첨 봤다"고 제가 포문을 열면 아내는 "그럼 너는 처음 안 봤으면 두 번 봤나? 어디 또 있나 보지?"하면서 정말 유치하지만 전쟁처럼 코피 터지게 싸워야 했습니다.

2년 전 이맘때입니다(날짜까지도 기억하지만 차마 적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또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그 분을 이제 본격적으로 언급해야 할 때 같습니다.

그날은 항공사에서 여행사초청송년회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여행사에 근무합니다. 저녁 여섯 시에 시작한 행사에서 저는 언제나처럼 방실이 언니의 노래를 부르며 까불었고 그런 모임에서 으레 알게된 다른 여행사 직원들과 2차, 3차를 가게 되었습니다.

술에 꽤 취한 상태로 택시를 타서 집으로 귀가했습니다. 모임이 이른 시간에 시작해서 집에 도착할 때의 시간은 채 열두 시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아내가 정한 귀가시간을 넘어서지 않았을 거구요(추측이지만, 확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살던 집은 50세대가 채 안 되는 조그만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만 사글세였구요. 저희 라인만 20평이었습니다. 다른 세대는 전부 35평 이상이었습니다. 그 단지에서 저희만 남의 집에 살고 있던 것이었지요. 7층에 뒷자리가 3으로 끝나는 호수였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탄 뒤 습관처럼 내렸습니다. 열쇠로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 걸어 잠근 것이 느껴지더군요. 순간 분노가 생겼을 겁니다. 그 다음에 제가 한 행동은,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세 번 정도는 간헐적으로 초인종을 눌렀고, 발로 열리지 않는 문을 몇 번인가는 걷어 찼을 겁니다. 그리고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구요.

한 5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파트 단지 공터에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게 설마 저를 잡으러 오는 것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번개처럼 아파트 단지에 들어오는가 싶더니 두 명의 경찰관이 저의 양 어깨를 잡았습니다. 다행히 수갑을 채우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경찰차 뒷자리에 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제 옆에는 건장한 경찰관 두 명이 동승을 했구요. 그때까지도 그들은 제 어깨를 꼬옥 잡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아파트 단지에 경찰차가 출동을 하기까지의 상황을 베란다에서 많은 사람들은 보았을 테고, 술이 정말 확 깨더군요.

'아 아무리 독하다지만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자기 남편을 경찰에 신고하는 부인이 있을까.'

파출소까지 3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오히려 침착해졌습니다. 좀 서글퍼졌고 갑자기 집에 있는 아들 생각까지 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리일 듯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들만은 포기 할 수 없다는 생각에까지 미쳤습니다. 제 아들은 저희 부모님이 학수고대하던 열두 명의 손자, 손녀들 중 유일하게 강씨 성을 가진 친손자였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없는 살림이지만 노트북 컴퓨터만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구요. 대학 때 다들 그랬듯 몇 번 돌을 던지고 파출소에 끌려 가서 바로 훈방조치를 당했던 경험은 있어도 바로 현장에서 연행되는 상황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신상명세를 간단히 얘기하고 저는 그때 비로소 채 열두 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파출소 벽에 걸린 시계가 고장나진 않았을 테니까요. 책상 앞에 앉아 경찰이 묻는 말에 대답을 했고, 그가 받고 있는, 걸려 왔는지 걸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전화가 제발 부모님만은 아니기를 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빨리 끝났고 정말 이십분도 안 되어서 파출소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런 의문은 금세 시들해졌고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기분으로는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 사무실에 의자를 두 개 붙이고 누웠습니다. 당연히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지붕이 내려앉을 만큼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내가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됐을까?"

다음날 근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두 말 할 나위 없습니다. 단지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저녁이 되어 어차피 부딪혀야 할 부분이기에 일단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았더군요.

'마음을 가다듬자.'

속으로 얼마나 주문을 외듯 다짐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아들은 절대 포기 못하겠다" "아들의 엄마니까 나중에도 편하게 보자" 등 해야 할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습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밥은 왜 하나 싶었지만, 그래도 아들은 우선 먹여야 되겠기에 쌀을 씻어 압력밥솥에 넣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아, 드디어 가족들에게도 알려졌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전화를 받자 상대방이 "여보세요"하는데 들어보지 못한 못한 음성이었습니다.

"저, 7X5호인데요…."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은 7X5호 아줌마였습니다. 저희들이 처음 이사올 때 저랑 아내랑 어디 다니느냐고 꼬치꼬치 묻던 아줌마여서 금방 얼굴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집을 사서 오는 거냐, 전세냐, 사글세냐"를 차례로 물어 저는 친절하게 "사글세로 왔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아줌마의 말은 바로 이어졌습니다.

“전 그래도 죄송하다고 전화라도 올 줄 알았어요.”
“네???”
“어제 일 기억 못하나요?”

순간, 저는 50세대 가까이 되는 아파트 전체를 다 돌아다니며 사과해야 하나 싶었지만, 일단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줌마의 다음 말에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불면증땜에 잠을 못 자는데, 어제처럼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문 앞에 신발 자국은 빨리 지워주세요."

즉, 술이 취해 엘리베이터를 잘못 타서 7x5호를 눌렀던 것이고, 그 댁 아줌마가 저를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제 아내는 이 상황을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했던 것이고요.

저를 경찰에 신고하며 사과까지 요구한 이 아줌마는 아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교양있게 말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얘기 했습니다.

"저 아까 죄송하다고 한 것 취소할게요. 저 죄 값 달게 받았어요! 문 앞에 발자국도 지울 생각 전혀 없어요."

아주 천천히 이렇게 얘기를 하니 상대편 수화기에서는 제 귀청이 떠나가도록 큰소리가 울렸습니다.

"뭐? 이러니까 남의 집 세들어 사는 것들은 안돼!"
저도 질세라 아주 교양있게 얘기 했습니다.
"저희들 돈 없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에요. 어차피 길게 살 생각도 없어서 사글세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이번 여름에 더 큰 아파트 사서 갈 거에요."

그 사이 아내는 어린이집에 들러 아들을 데리고 왔고 저는 비명 같은 그 아줌마의 소리를 들으며 정말 교양있게 끊었습니다. 아내를 보니 참 계면쩍었습니다. 정말 아내가 신고했을리가 없다고,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같았습니다.

확인 결과 경찰과 전화를 했던 것도 아내였고, 고성방가죄로 벌금을 무려 오만원을 납부하기로 하고 신원을 확인해 준 것도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미처 해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저는 금세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파출소에서도 제가 얼마나 당당했는지 허풍을 떨었습니다. 그나저나 집 사서 나간다고 큰소리 친 게 걱정이었습니다. 늦었지만 정말 미안하다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며칠 동안 아파트 단지를 나오고 들어서면서 그 아줌마가 보이면 일부러 당당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아줌마의 싸늘한 눈초리가 무서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주도는 신구간이라고 해서 입춘전후 일주일 동안 집중적으로 이사를 하기 때문에 그때는 마땅히 다른 집을 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또 저희는 대출을 받아야 하는 처지라 관심도 없었구요. 그래도 항상 퇴근할 때는 생활정보지를 챙겨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혹시나 하구요.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안 돼서 임대주택을 포기한 사람이 생활정보지에 광고를 냈더군요. 덜컥 계약을 해 버렸습니다. '6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구하는 게 문제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고 그 다음날부터 바로 잔금 마련에 나섰습니다.

다행히 누나들이 돈을 빌려주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저희는 임대주택이지만, 꿈에 그리던 우리집으로 된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렇게 박영한님의 소설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몸성히 겪고 지금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갚아야 할 대출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참 편합니다.

저희가 사는 아파트의 임대기간은 5년입니다. 임대기간이 지나면 현 입주자에게 제일 먼저 분양 혜택이 있구요. 지금 사는 곳이 대규모 단지라, 만약 저희들이 분양을 받는다면 조금 이익이 될 듯합니다. 물론 잔금을 계속 갚아 나가야 되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아주 짧게 글을 맺습니다. 지난주 일요일 오후 우리 딸애를 처남댁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저희 아파트 바로 옆동에 이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XX4동에 이사가 있나 보다' 하고 슬쩍 보는데, 또렷이 그때 그 아줌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죄값을 치르려면 아직 멀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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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대학원에서 제주설문대설화를 공부했습니다. 호텔리어, 입시학원 강사, 여행사 팀장, 제주향토음식점대표,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교사 등 하고 싶은일, 재미있는 일을 다양하게 했으며 지금은 서귀포에서 감귤농사를 짓고 문화관광해설사로 즐거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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