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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철용 반민특위 조사관이 추모식에 참석, 친일청산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 윤평호

친일파의 실체를 규명, 친일청산의 학문적 기초를 다진 고 임종국 선생 15주기 추모식이 6일 충남 천안에서 열렸다.

최근 친일청산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듯 추모제에는 어느 해보다 많은 지인들과 인사들이 참석, 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떠올리며 친일청산의 의지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추모식은 지난 89년 11월 오랜 지병과의 싸움 끝에 타계한 선생이 잠들어 있는 천안시 광덕면 천안공원묘원 내 무학지구 철쭉 4-1 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식을 주최한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천안민주단체협의회(의장 김치철) 관계자들 및 선생의 유족, 지인들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오후 2시에 시작한 추모식은 쾌청한 늦가을 날씨 속에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의 사회로 1시간 가량 진행됐다.

"최근 친일청산운동 상징하듯 날씨도 맑아"

▲ 추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 윤평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인사말을 통해 “예년에는 추모식을 할 때면 비가 오거나 날씨가 매우 추웠다”며 “오늘은 최근 친일청산운동을 상징하듯 날씨도 맑다”고 말했다.

“추모식 준비가 갈수록 잘되고 참석인원도 늘고 있다. 추모식이 잘 될수록 친일파 청산도 그만큼 잘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다. 저나 여기 오신 여러분이나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은 조금도 기울지 않다. 그 마음이 전 국민에 뿌리내려 친일파 청산이 올바르게 되도록 힘쓰자.”

임헌영 소장의 인사말이 끝난 뒤 이봉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은 임종국 선생의 약력을 소개했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이어 임종국 선생이 지난 1988년 CBS 대담프로에 출연, 자신의 성장기와 친일파 연구 시작 동기 등에 대해 말씀한 내용이 5분 가량 육성으로 소개됐다.

임종국 선생이 천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이용길 민주노동당 충남지부장은 추모사에서 “선생의 서재는 크지 않았지만 일제시대 관보와 일간지, 법정의 재판기록 등 연구자료로 빼곡했다”며 “선생의 기품은 마지막 남아있는 독립군 사령관을 보는 듯했다”고 말했다.

내년 3·1절 맞춰 기념사업회 발족 예정

이날 추모식에는 뜻밖의 손님도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현재 청주에서 거주하고 있는 정철용 전 반민특위 조사관이 추모식에 함께 한 것.

정철용 조사관은 “국회에서 친일청산이 논의되고 있지만 그 자료들은 거의 모두 임종국 선생이 발굴한 것들”이라며 “반민특위 좌절 후 입밖에 내지 못한 친일청산을 임종국 선생은 평생동안 연구했다”고 말했다. 정 조사관은 “오욕으로 얼룩진 역사가 우리 세대에서 반드시 끝나도록 친일청산을 완수하자”고 덧붙였다.

고인의 차남인 임정택(31)씨는 유족 인사에서 “선친의 뜻을 받들어 추모식을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오후 3시 5분쯤 분향과 참배가 끝난 뒤 추모식 참석자들은 천안시 목천읍 독립기념관으로 이동, 친일미술전을 관람한 뒤 서울로 상경했다.

임종국 선생의 기일은 원래 11월 12일이지만 기일에는 가족들이 묘역을 찾고 추모식 참석자들의 편의를 위해 추모식은 6일 열렸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내년 3·1절에 맞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발족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기념사업회는 한 개인에 대한 추앙이 아니라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세우는 운동적인 사업”이라고 말했다.

▲ 추모식 모습
ⓒ 윤평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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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학론' 저술 이후 본격적인 친일연구 돌입
임종국 선생님 행적

임종국 선생님께서는 1929년 10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님의 4남 3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일곱 살 때 아버님이 교회 일로 상경하게 되자, 소년 종국도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선생님께서는 1980년 천안으로 내려가실 때까지, 거의 40년을 서울에서 사셨습니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던 해엔, 중학교 3학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이때 열일곱 살 소년으로서, 일본군의 퇴각이란 충격적인 경험을 하셨고, 그것은 선생님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에 진학하셨는데, 그럼에도 일찍이 형성된 문학에 대한 열정과 미련은 쉽게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59년, 선생님은 ‘문학예술’지에 ‘비(碑)’란 제목의 시를 발표하심으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일생을 통해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 시기에 하셨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신 뒤로 두어 해 동안은, 신구문화사란 출판사에서 근무하신 적도 있습니다.

1965년 한일회담은 임종국 선생님의 생애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의 나이는 서른 일곱 살, 문학사회사를 집중해 연구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연구가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와 접목이 되면서, 그것은 친일연구의 싹이 되었고, 결실은 1966년 ‘친일문학론’의 탄생으로 나타났습니다.

선생님은 ‘친일문학론’이란 큰 저서를 내신 뒤에 한동안 공백기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충전된 힘으로, 다시 본격적인 친일 연구에 들어가신 때는 1970년대였습니다. 이 시기의 연구 영역은 더욱 넓어져서,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친일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연구 방법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이었습니다.

집필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80년대엔, 선생님께선, 친일파 개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 내력까지도,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셨습니다.

1980년, 선생님은 건강을 회복하고 집필에도 전념하기 위해서,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짓고, 요산재(樂山齋)라 이름지은 뒤, 줄곧 이 곳에서 일제침략사와 친일파들의 배족사를 규명해 나가셨습니다. 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87년 ‘친일논설집’, 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차례로 펴내셨습니다.

그 뒤로는,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또한 친일문제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 ‘친일파총서’ 열 권을 펴내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지병과 맞선 싸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신 선생님께선, 1989년 11월12일 0시40분에, 숙원사업을 마저 이루지 못하시고, 조용히 운명하셨습니다.

민족의 정기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역사의 상처를 한몸에 끌어안고, 반민족 범죄자들과 싸워 왔던, 시인이시며, 문학평론가시고, 재야사학자이였던 임종국 선생님은, 자신의 큰 뜻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그만 저희들 곁을 떠나신 것입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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