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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투병과 성적 저하로 기운이 빠져버린 석진이, 성적은 바닥인데도 잠만 잤던 영균이, 모범생 대열에 있었지만 사각의 교실을 혐오했던 재홍이. 새천년을 맞아 희망과 기대만이 화두였던 지난 2000년 6월, 고3인 세 친구와 선생인 나는 새로운 변화와 다짐을 계획하고 여행길에 올랐다.

아침 6시 30분, 서대전역에 모인 우리는 서울행 첫 기차를 탔다. 우리는 의자 등받이를 넘겨 둘씩 대칭으로 어색한 듯 기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 서대전역에서
ⓒ 박병춘
석진이의 파란 눈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학교에서는 착용이 불가능한 파란색 콘텍트 렌즈를 끼고 있었다. 무스를 덕지덕지 발라 머리를 뒤로 넘긴 데다가 파란 눈까지 이국적 이미지가 물씬 풍겼다.

해도해도 성적 향상이 안 된다는 영균이는 시디플레이어에 베토벤 음악 시디를 넣고 이어폰을 끼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모습이면서도 고3의 스트레스를 애써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과묵한 재홍이는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 무엇인가 메모를 하고 있었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비장한 각오라도 하는 듯 굳게 다문 입술이 참 사내다워 보였다.

천안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세 친구가 일어섰다. 잠시 후 돌아온 녀석들 몸에서 담배 냄새가 배어났다. '이 넘들, 담배는 뼈를 녹인디야. 공부 할라믄 그만 끊어라, 잉!’하는 말이 입술까지 이르렀다가 침 속에서 녹아버렸다. 얼마나 단맛이었으랴.

“얘들아, ‘그렇게 뜨거운 햇살을 받고도 이토록 빨간색을 간직하고 있다니….’ 이 시 구절에 제목 한 번 붙여볼까?”

“고추요!”, “사과요!”, “단풍잎?”
“고추나 사과나 겉이 빨갛지 속은 아니잖냐! 단풍은 가을에 드는 거고.”
“에이, 샘 뭔데요?”

“제목은 수박이다. 생각해 봐라. 한여름, 그 뜨거운 햇살 받은 수박 쪼개 봐라. 그 원색의 빨간색, 감탄스럽지 않냐? 여기서 뜨거운 햇살이라 함은 온갖 시련과 고통을 함축하고, 빨간색이라 함은 시련과 고통을 감수한 결과물 아니겠냐. 에휴, 오늘도 무지 덥겠다. 오늘 우리 여행, 빨간색으로 한 번 만들어 보자구. 문학 시간에 시 분석하는 거 같아 썰렁하지? 암튼 힘 내자.”

서울역에 도착, 청량리역을 향해 전철을 탔다. 전철을 처음 타본다는 영균이에게 서울 사람들과 서울 문화에 관해 일러주었다. 오른쪽, 왼쪽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타고 내렸다. 대전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 수많은 사람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세 친구에게 의미 있게 다가서길 바랐다.

▲ 청량리역에서
ⓒ 박병춘
경춘선 열차를 타려면 제법 시간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청량리역 부근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모두 한 그릇씩 더 먹어야 할 만큼 생태찌게 맛이 일품이었다. 건배도 했다. 미성년 고교생들에게 소줏잔을 돌리는 선생? 누가 뭐라든 상관없었다. 분명히 술이었지만 음료수였다. 녀석들은 이미 술꾼의 경지에 와 있었다. 한 잔만 마셔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내 얼굴은 이미 빨간색 수박을 능가하고 있었다.

나는 빈 소줏병 하나를 내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세 친구가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런다. 이상하게 바라보지 말거라. 소중한 소줏병이다.”

경춘선 열차를 일컬어 젊음과 낭만의 열차라고 말하는데 이견이 없다. 수많은 연인들과 삼삼오오 여행객들이 원색의 물결로 기차안을 꽉 메웠다. 얼큰하게 달아오른 취기가 창밖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했다. 경춘선 열차를 타고 잠을 자는 것은 여행객의 도리가 아니다.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복된 일이다.

“얘들아, 참 좋구나. 우리 지금부터 바깥 풍광도 구경하면서 각자 다짐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이 종이에 우리들의 10년 후 모습을 써 보기로 하자. 신중하게 생각하기 바란다. 나 또한 다짐을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다짐들을 한데 모아 이 소줏병에 담자. 이것이 바로 우리만의 타임캡슐이다. 이 타임캡슐을 보관할 장소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 청평사 부근이다.”

▲ 춘천역 도착
ⓒ 박병춘
열차는 춘천역에 도착했고, 우리는 곧바로 소양강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호반의 도시라고 하는 춘천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소양강댐에 도착하여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선착장에서 신혼부부 한 쌍과 더불어 비싼 운임을 저렴하게 조정하여 유람선 대신 보트를 탔다.

청평사 입구까지 10분 남짓 보트를 탔다. 아니다. 곡예를 했다. 아니다. 죽을 것 같았다. 그네 타는 것조차 두려운 내게 보트는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괴물 같았다. 세 친구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벌벌 떠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신혼의 신부가 내뱉는 괴성은 보트 조종사를 더욱 신나게 만들었고, 신랑은 나와 동급의 동지였다.

“자, 아까 기차에서 썼던 우리의 다짐을 타임캡슐에 넣자.”
청평사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소줏병 타임캡슐에 다짐문을 넣고 천재지변에도 끄떡없을 바위 아래 단단히 묻었다. 오른손을 겹겹이 쌓은 후 우리 넷은 파이팅을 외쳤다. 2000년 6월, 우리만의 성스런 의식이었다.

▲ 2010년에 보자, 타임캡슐에 미래를 담고
ⓒ 박병춘
우리는 돌아와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세 친구 모두 한여름 불볕 더위를 견뎌냈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여름 내내 논문 한 편을 완성했다.

4년이 지난 지금, 석진이와 영균이는 군복무 중이다. 재홍이는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을 앞두고 있다. 우리는 가끔 소식을 주고받으며 6년 후 2010년, 타임캡슐을 캐러 가는 꿈을 꾼다. 그리고 또 2010년에 또 다른 타임캡슐을 묻으러 여행을 떠날 것이다. 2000년 여름은 참 더웠지만 결코 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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