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1941년 국방헌금을 낸 손영목
ⓒ 전갑생
손영목(孫永穆, 창씨명 孫 永穆, 1888년생)은 밀양출신으로 진성학교(進成學校)를 졸업하고 일제 식민지 때 공무원, 징병후원자로 나선 친일파다. 그는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 지방행정 공무원으로 합격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총독부의 나팔수'로, 강원도·전북도지사에서, 국민총력연맹 이사, 대의당, 대화동맹 간부 등을 맡으면서 해방되기 전까지 맹렬하게 활동했다.

말단 서기에서 도지사로 성장한 친일행정가 손영목

손영목은 고향 밀양에서 학교를 졸업한 이후 바로 공무원으로 변신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서 그는 조선민중들을 탄압하고 조선총독부 정책을 적극 홍보하는 말단 나팔수로 자청한 것이다.

그의 친일 공무원 이력은 화려하다. 1910∼17년 경상남도 내무부 도서기(道書記)로 약 7년 동안 도청 서기로 일하다, 1918∼21년 고성군수(관등 8등, 공훈18급, 19년 8등10급 정8, 1920년 7등7급 종7, 1921년 6등8급 공훈 정7)로 승진했다.

손영목이 도 서기에서 군수직으로 급성장하게 된 배경은, '남보다 탁월한 능력과 조선총독부에 맞는 충실한 황국신민 공무원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특히 그가 황족(皇族)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표현하고, 3·1운동 당시 도 서기로 봉직하면서 시위진압과 조선총독부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한 것이 급성장의 주요 원인이다.

그는 고성군수 3년을 거쳐 1922년 동래군수(6등8급 공훈정7), 1923∼28년 울산군수(관등 4등5급 정6훈6)로 약 6년간 근무하다가, 1929년 조선총독부 내무국 직속 사무관 및 중추원 통역관으로 발탁된다.

손영목은 1930∼31년 강원도 직속 참여관, 1932∼1934년 경상남도 직속 참여관 및 사무관으로 승진한다. 그 당시 조선인 참여관은 도 장관(道 長官)의 자문과 임시 사무에 종사하여 주관사무(主管事務)에 불평이 있으므로 폐지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현재의 제도하에서는 참여관이 유일하게 한국인 도 장관 후보자 지위에 있으므로 그대로 존속케 하여 도 장관 자문, 도 행정 감찰 및 제반행정에 관한 선전의 임무를 맡게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믿었다.

한편, 그는 조선인 최고의 영예인 도지사로 승진되었다. 1935∼36년 강원도 지사로 임용되고, 1935∼36년 조선총독부 문관보통분한(分限) 회장 및 위원장 등을 겸임했다. 손영목은 일본어에 능통하고 '충실한 식민지 종' 혹은 '황국신민'으로 뚜렷한 두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손영목. 그는 만주척식공사 이사로도 겸임하고 있었다.
ⓒ 전갑생
그의 충실한 친일행각은 다음 잡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이 잡지는 1917년 2월 창간된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실적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조선(朝鮮)》인데, 손영목은 《조선(朝鮮》1935년 12월(제247호) "皇族宮殿下竝に侍從を迎へ奉りて" 이라는 제목으로 역대 황족들을 칭송하고 업적 등을 나열하면서 극찬했다.

그는 "성상전하(聖上殿下)께서는 조선에서 산업 문화를 세우시고 일반 민정시찰하려고...(1935년) 9월 15일 동경출발 17일 부산 상륙하여 내선(內鮮, 조선) 각 지역을 순시하다가 본도(本道, 강원도)을 9월 31일 내방하여 ... 관내 현황 등 보고를 올리고 ... 농촌개량의 실험담을 들었습니다... 시정 25주년의 광영(光榮)은 관내 시찰을 친히 황족궁 전하께서 본도를 찾아 주심은 자로 이전부터 지금까지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며 앞으로 신명(神明)을 다해 개인적 이익을 내세우기 보다 좀더 노력하여 전하와 조선총독부를 위해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라고 읍소했다.

손영목은 일본 황족들의 방문을 '경사스롭고 참배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일본 황족 탄생일을 기억하여 신사로 찾아가 참배하자"라고 강원도민들에게 역설했다. 1937년 손영목은 '황족을 사랑하는 남다른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는지 전라북도 도지사로 재임용되어 1940년까지 근무했다.

징병후원회 간부에서 대의당 간부까지

1940년 전북 도지사에서 물러난 손영목은 만주척식회사의 후신인 만주척신공사(滿洲拓殖公社)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징병후원회 사업부장 겸 이사,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국민동원총진회 이사, 1941년 8월 24일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대화동맹 이사, 대의당 위원 등 맹렬하게 '황국신민'으로 봉사헌신(?)했다. 특히 1941년 5월 13일 120원을 국방헌금으로 납부하면서 일제에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다.

▲ 조선총독부 하수인된 손영목. 그는 강원도 참여관에 임용되었으며, 중추원 통역관도 역임했다.
ⓒ 전갑생
이처럼 손영목의 친일 민간단체 활동 사례를 살펴보면, '타의에 의해 친일파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손영목은 1942년 조선실업구락부(朝鮮實業具樂部) 이사로 참여하여, 1945년 1월 17일 오전 10시 서울 부민관에서 전조선 각지로부터 성은에 감읍하는 일제 충견 20여 명이 모여 '처우개선 감사대회'를 개최하였다. 주최자인 손영목은 감격에 넘치는 인사말을 통해 열변을 토했다.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징병후원사업부(國民總力朝鮮聯盟事務局徵兵後援事業部) 징병후원사업부장을 맡아 일했다. 이 단체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조직부서 중 하나로 징병제가 실시되면서 신설된 부서였다. 또한 1944년 12월 10일 반도무훈현창회(半島武勳顯彰會) 발기인으로 민규식(閔奎植), 윤치호(尹致昊)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제3주년 기념식을 기하여 전조선 13신문사 및 일본 5신문과 통신사의 경성 총지사의 제창에 의하여 이 단체의 첫 위원회가 44년 12월 10일 오전 경성일보 귀빈실에서 개최되었다.

▲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된 손영목
ⓒ 전갑생
다음으로 그는 1944년 9월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 이사로 조병상(曺秉相), 김동환(金東煥)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 단체는 이성환(李晟煥)을 중심으로 한 전쟁협력단체로 관변단체 성격이 강했다.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징용, 징병, 군사기지화를 위한 노무 동원 등에 앞장섰다.

손영목은 1944년 10월 16일 전선역원대회(全鮮役員大會)에 참석하고, 1945년 2월 28일 국민총력동원 경기도역원대회에서 원호운동을 시찰하기 위하여 각 도에 이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면서 경북도로 파견되었다.

그는 1945년 7월 24일 대의당(大義黨) 결성 및 '아세아민족분격대회' 개최식에 참석하면서 위원으로 참여했다. 대의당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전쟁 협력과 황도주의 확산을 위해 박춘금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다. "一身·一家의 소의(小義)를 포기하고 진충(盡忠)·애국의 ‘大義’에 살자"는 취지를 내걸었다.

대의당의 취지서에 따르면 "전국(戰局)은 바야흐로 황국이 흥폐를 결정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 위기를 신기(神機)로 돌리는 데는 국민의 결사적인 결의와 분투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들 반도 2600만 동포는 황국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몸과 가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소의(小義)를 던지고 오직 충군애국이라는 대의(大義)에 살아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 1932년 경남상남도 참여관 손영목
ⓒ 전갑생
대의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오등은 황도의 본의에 기하여 국민사상을 통일하여 전력증강과 국토 방위의 임무에 취할 것을 기함.
1. 오등은 지도자가 아니다. 국가에 대하여는 병졸이며, 동포에 대하여는 충복이 될 것
1. 오등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反戰·反황국사상)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

대의당은 "조선, 중국, 만주의 민족은 일본과 운명을 같이 하여 서양의 침략주의를 분쇄해야 한다"는 대아시아주의를 모토로 했다.

다음으로 손영목은 박춘금과 함께 대화동맹(大和同盟) 이사로 참여하였다. 1945년 2월 11일 대화동맹 발회식에 참석하여 윤치호, 이광수, 등과 함께 영광스럽게(?) 참여한 것이다. 대화동맹은 징병, 증산, 황국신민화 등 침략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전쟁협력단체다. 대화동맹의 운동목표는 황회공민(皇會公民) 자질의 연성, 향상이며, 결전태세의 강화(특히 징병, 징용, 모략방지에 중점을 둠), 내선동포의 정신적 단결 촉진, 증산자의 공출 책임 완수(유휴지 경작, 한뙈기 땅에도 곡물과 야채를 심을 것. 각 학교 운동장을 식량증산에 전용할 것) 등이다.

▲ 1935년 강원도지사로 재임하면서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기고한 친일글.
ⓒ 전갑생
특히 손영목은 대화동맹 발회식 때, "우리 동맹은 반도 2천만의 총력을 집중시켜 성전완수에 돌입하는데 추진력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1945년 6월 16일 강원도 도지사(고등관 1등)에 재취임하면서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그가 1941년∼1945년 5월까지 친일 민간단체에 활동한 것은 친일 공무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이지 않는가 싶다. 또한 1945년 6월 23일 조선마사회 평의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1945년 10월 17일 손영목은 미군정청에 의해 강원도지사에서 해임되었다. 그리고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채포되어 검찰로 송치되었다. 1949년 5월 16일 손영목은 1차 공판을 받으면서 "일제 정책에 적극 활약한 기소사실을 솔직히 시인"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와해 시기쯤 손영목은 보석으로 풀려나 친일파로 단죄되지 못하고 말았다.

▲ 1945년 6월 6일 강원도지사로 재임묭된 손영목
ⓒ 전갑생
손영목은 1910년∼1945년 8월 15일 일제 36년 동안 친일 행정가로, 황국신민자로, 조선인을 징병 보내기 운동을 펼친 '악독한' 친일파였다. 조선민중들의 고혈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수행하면서 온갖 행각을 벌인 손영목은 반민특위 와해로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아직까지 손영목은 우리 사회에서 꼭 청산해야 할 친일파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