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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과 기미가요, 일장기를 거부하는 오키나와

▲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조선인들의 묘지
ⓒ 김대호
미국은 대부분 전쟁을 오키나와에서 시작한다. 2차 대전 때는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일본군과 지상전을 벌인 곳이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부터 최근의 이라크 전쟁까지 전쟁의 출발점은 오키나와다. 기자가 만난 60대 노인들은 오키나와를 '일본이지만 일본이 아닌 땅'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오키나와에 도착한 지 3일이 되어가지만 일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장기는 공항을 제외하고는 발견할 수 없었고 8월이 되면 본토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극우파들의 '기미가요'와 '천황만세' 소리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파출소에는 국기게양대조차 없었고 학교에는 국기봉만 덩그러니 운동장을 지키고 있었다. 대신 일본 최대 명절인 '오봉(추석)'을 맞아 귀향하는 인파들로 공항과 시내는 만원을 이루고 상점들은 대부분 철시해 도시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오키나와인들은 키가 작고 피부가 검은 편이며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 남방계로 홋카이도(북해도)의 아이누족과 함께 일본 본토인들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1429년 태양왕이 세운 류큐(琉球)왕국을 1879년 메이지 천황이 강제로 복속한 후 본토인들은 오키나와인을 한국·중국인에 이어 3등 국민으로 대우하면서 차별과 멸시를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키나와인들이 본토에 반감을 갖는 결정적인 이유는 2차대전 당시 20만여 희생자를 낸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 때문이다. 이곳 주민들은 미군과 일본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오키나와는 2차대전 중 일본 본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진 곳으로 271만6691발에 이르는 미군 폭격기와 전함의 포탄 발사로 주민 20만656명이 사망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집단자살의 광기가 벌어진 구 해군사령부 지하벙커 입구
ⓒ 김대호
이중 일본 본토 출신 군인과 한국·대만출신 징용자 6만5908명, 미군 1만2520명을 제외한 12만명 가량이 오키나와 출신(군인·군속 2만8228명, 일반 전투참가자 5만6861명, 주민 3만7139명)이다. 이 전투에 대한 오키나와 주민들과 일본 본토인들에 대한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ADTOP@
집단자살의 광기 구 해군사령부

"청장년 전부가 방위소집되어 싸우다 모두 불타 몸만 남았다. 노약자와 부녀자는 소방공호에 몸을 맡긴 상황에서도 헌신했다. 젊은 여자들은 간호와 포탄운반, 정신대에 입대했다."

당시 오키나와 근거 지대 오오타 사령관이 해군기지가 함락되기 전 일본 해군 차관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전문이다. 미군의 맹공에 기지가 함락되기 직전 오오타 사령관은 전문을 남긴 후 1945년 6월13일 저녁 참모장과 함께 할복 자살했다. 이 자살은 수많은 주민들과 병사들의 자살강요로 이어졌다.

미군의 함포사격을 피하기 위해 1944년 일본공병대가 만든 해군사령부 지하벙커는 모두 450미터로 동굴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는데 1945년 6월 4000여명이 집단자살 광극을 벌였다.

▲ 할복자살한 오오타 사령관의 집무실
ⓒ 김대호
1970년까지 300미터를 복원한 상태인데 나머지 150미터가 복원될 경우 또 얼마나 많은 시신이 발견될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1945년 3월 23일 미군의 공습이 90일간 지속되면서 6월 한 달 동안에만 인구 1인당 52발의 탄환이 발사돼 20만명이 사망했는데 군인보다 민간이 사상자가 더 많았으며 이 중 일본군의 세뇌와 선동으로 인한 집단자살이 상당수다.

일본군은 정규군의 80%가 사망했는데도 항복하지 않고 주민들을 인간방패 삼아 오키나와 남부의 기얀 반도로 군인 3만, 주민 10만명을 몰아 넣고 절벽에서 병력이 궤멸될 때까지 최후의 항전을 벌이다가 자살의 광극을 벌였다. 이것은 미군의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 사령부의 지구옥쇄(持久玉碎) 작전이었다.

오키나와전에서는 옥쇄작전으로 인해 전사자가 항복한 사람의 6배에 이르렀다고 하니 천황제를 사수하기 위한 광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다 보니 오키나와 전투를 바라보는 본토인들과 오키나와인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나와시에 사는 야마사키(78·남)씨는 다음과 같이 패전 직전 상황을 말했다.

"밤에는 모두 막대기를 들고 걸었다. 길보다 시체가 많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미군 폭격에 아버지와 두 누이를 잃었고 작은 아버지는 일본군에 속아 자살했다.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미군의 포로가 되면 치욕을 보인 뒤 죽인다고 자살을 강요했다. 아버지가 돌을 들어 자식의 머리를 짓뭉개고 서로 난도질하고 자폭하거나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는 사람들로 넘쳤다. 포로가 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 본토를 지키기 위해 천황이 오키나와 사람들을 버린 것이다."

▲ 작전모의를 하던 지하벙커 작전실 입구
ⓒ 김대호
이 과정에서 세계사에 유례 없이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살극을 벌였으며 6월22일 일본군이 완전 괴멸됨으로써 오키나와전은 종료되었다. 그 후 두발의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은 8월15일 항복을 선언했다.

▲ 오오타 사령관과 간부들이 집단 자살극을 벌인 곳. 아직도 총탄자국이 선명하다.
ⓒ 김대호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천황에 대한 영웅적인(?) 헌신과 미군에 대한 항전 의지를 통해 군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단자살의 광기가 벌어진 구 해군사령부 지하벙커 사령관실을 가지런히 꾸며 위패를 모셔놓고 입구에는 미군에 의해 참혹하게 죽은 오키나와인이나 폭격하며 웃음 짓는 미군조종사들 사진을 전시해 놓았다. 이를 통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서의 일본만을 부각하고 있다.

야마사끼씨는 "천황은 류큐 왕국을 빼앗아갔고 본토민을 보호하기 위해 오키나와인을 희생시켰으며 끝내 미국에 이 땅을 팔아 넘겼다"고 말한다.

▲ 지하벙커의 통행로
ⓒ 김대호


조선인에 미안한 오키나와인

▲ 일본인 묘지를 지나는 미국인들
ⓒ 김대호
미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대접전을 벌였던 오키나와 남단에는 태평양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평화기념공원이 자리잡고 잇다. 이곳에는 한국 정부와 일본 후생성이 확인한 313명의 한국인 희생자 명단이 기록돼 있다.

가슴 아프게도 그 비문에는 분단의 상처가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대한민국 231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82명으로 따로 적혀 있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1만여명의 조선인들이 이 전투에 투입됐다고 하는데 나머지 빈 공간은 언제 메꿀 것인지 안타깝기만 했다.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그들 원혼은 파도 드높은 이곳 하늘을 멀리 떠돌며 비되어 흩뿌리고 바람되어 불 것이라…'(조신인위령탑 비문중에서)

▲ 조선인 추모탑
ⓒ 김대호
한국인위령탑은 평화기념공원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현지 가이드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과 같이 이름을 새길 수 없다는 유족들의 반발로 그랬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돌로 무덤을 만들었는데 돌무덤 앞에는 동판으로 새긴 태극기가 빛이 바랜 채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키나와 국제대학 오석필 교수는 "한국인 위령탑의 비문 글씨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 즉 다까끼 마사오 소좌가 쓴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만난 오키나와 주민들은 가해의식은 없고 피해의식만 가지고 있는 일본 본토인들과 달리 당시 희생된 한국·중국인들에 대한 미안함을 늘상 표현하곤 한다"고 말한다.

베트남전에서 자행한 학살로 무고하게 희생된 베트남인들과 버리고 온 아이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유사법제와 우경화를 반대하는 오키나와 사람들

쇼와 천황은 죽는 날까지 오키나와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오키나와를 희생시킨 천황에 대한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4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연두회담에서 오키나와 기지를 무제한 보유한다고 선언한 뒤 무장 미군이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자 자신들을 두 번 버렸다는 반발이 거센 탓이었다.

1972년 오키나와가 본토에 반환되어 오키나와 현이 되자 이에 항의하는 현민 총결의대회가 개최되었으며 1975년 황태자 부부가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는 히메유리 탑 앞에서 주민들이 화염병 공세를 퍼붓기도 했다.

▲ 벙커 입구에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건 학
ⓒ 김대호
1982년에는 일본 교과서 검정에서 주민학살 기술 삭제에 항의하는 현민대회가 열렸고, 1986년에는 천황을 칭송하는 기미가요를 반대하는 현민 총궐기 대회가 있었다. 결국 쇼와 천황이 죽고 난 1993년에야 천황 황후가 오키나와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정부 내에 오키나와 개발청을 만들고 1972년 이후 65조에 이르는 막대한 개발비용을 쏟아붓고 세금감면혜택까지 주고 있으나 여전히 주민들은 일본 정부에 마음을 열지 않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국기는 졸업식장에서조차 걸리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학교 졸업식에서 일장기 게양에 반대해 학생들이 집단퇴장하는 사태가 빈발하자 몇 년 전 법으로 게양을 의무화해 강제로 걸게 만들었다. 이로써 오키나와는 60년만에 일장기를 내거는 치욕을 당했다.

오키나와에서는 전쟁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집권 자민당을 비롯한 여당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전통적으로 전쟁과 군국주의를 반대해온 사회당과 공산당이 세를 발휘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 <오키나와타임즈>를 비롯한 이곳 언론들은 일본의 유사법제 통과와 우경화 움직임에 대해 연일 비판기사를 내보내고 있어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을 실감케 했다.

이토만시에서 만난 타무라씨(여·38)는 "고이즈미 수상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전범이 아닌 전몰자에 대한 추모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전이라는 용어 대신 패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옳지 않은가. 고이즈미가 왜 평화가 깨졌는지 그 원인을 안다면 유사법제와 같은 나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다.

패망 58년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 오키나와는 디플레이션 조짐까지 보이는 자국 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재무장과 우경화의 길을 선택한 일본에게 '왜 평화가 깨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부터 솔직히 인정하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던지고 있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천황과 일장기, 기미가요를 거부한다
인터뷰 오키나와국제대학 오석필 교수

▲ 오끼나와국제대학 상경학부 오석필교수
- 오키나와인들이 미국과 일본 본토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무엇인가?
"1백여년 전 천황이 류쿠왕국을 복속 시킨 뒤 이곳 주민들은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3등 국민으로 대우받아 왔으며 1945년 전쟁당시 본토와 천황제를 사수하기 위해 오키나와인들을 배수진삼아 3개월 동안 무려 20만명을 희생시킨 탓일 것이다. 그후 오키나와가 미국령이 되고 또한 일방적으로 일본에 복귀되는가 하면 미군의 병참기지화 되는 것에 대한 반감도 클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천황과 일본정부가 오키나와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욱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미군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1970년에는 미군군용차에 불을 지르는 등 시위가 있었다. 95년에는 미군에 의한 초등학교 소녀폭행 사건 발생하자 10만여명이 모여 총궐기대회를 벌이기도 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생각은?
"미군의 70%가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다. 베트남, 걸프전, 한국전쟁 등 이곳이 전쟁의 병참기지가 되고 있는 셈인데 주민들은 자신들이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일본은 전쟁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피해의식만 강조하지만 내가 만난 오키나와 사람들은 한국과 중국에 대한 가해의식과 미군과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유사법제와 수상의 신사참배 등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여론은?
"<오키나와타임즈>를 비롯한 이곳 언론들은 일본정부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기사를 많이 쓴다. 기사와 논설을 통해 유사법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으며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일본정부의 대폭적인 경제지원과 교육효과로 젊은 세대는 많이 일본화가 된 상태지만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50대 이상은 천황과 일본정부의 우경화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일본정부가 법을 통해 강제로 국기게양을 의무화하고 있지만 오키나와에서 천황과 기미가요가 자리잡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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